106화
그 뒤로는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아네트가 가만히 그의 머리칼을 쓰다듬더니 콧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작은 새의 지저귐처럼 듣기 좋은 목소리였다. 마음 같아선 좀 더 듣고 싶었는데, 이상하게 몸이 무거워지는가 싶더니 아래로 쑥 꺼져 들어갔다.
라펠은 자신의 의식이 아주 깊은 밑바닥까지 가라앉는 걸 느끼며 눈을 감았다. 그리고 아주 푹 자버렸다. 다음날 정오까지 말이다.
‘이런, 제기랄!!’
이 상황에서 잠이 오다니! 아네트의 능력을 모르는 그는 태평한 자기 자신이 싫어졌다. 대낮이 다 되어서야 일어난 그는 아네트의 침실을 살살이 뒤졌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아네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대충 셔츠만 걸친 차림으로 뛰쳐나가, 눈에 보이는 하녀를 아무나 붙들고 물었다.
“아네트는? 지금 어디에 있지?”
“마님께선 외, 외출하셨습니다. 주인님.”
눈을 동그랗게 뜬 하녀가 목소리를 떨며 대꾸했다. 라펠은 딱히 까다로운 주인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폭풍 같은 기세로 윽박지르니 무섭긴 했다. 그나마 얼굴이 잘생겼기에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심장 마비가 왔을지도 몰랐다. 너무 무서워서 말이다.
“아침부터 대체 어딜 갔는데?”
“송구합니다. 제가 미처 들은 바가 없어서…….”
하녀의 대답을 들은 라펠은 말없이 이마를 짚었다. 하여튼 잘도 요리조리 돌아다니는 여자였다. 얼굴만 봐선 집에 얌전히 앉아 있을 것처럼 생겨놓고.
간밤에 아네트가 했던 의미심장한 말들을 떠올린 라펠은 초조하게 입술을 깨물었다. 어찌나 세게 씹어댔는지, 약간의 피 맛이 입안에 맴돌 지경이었다. 그제야 라펠은 자신이 한 행동에 놀라 흠칫했다. 지금 자신이 불안감을 느끼고 있는 걸까? 혹여 그녀에게 버림받기라도 할까 봐? 끄응, 소리를 내며 라펠은 양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감쌌다.
‘하여간 속마음을 알 수 없는 여자야.’
그래서 라펠은 더욱 미칠 것 같았다. 당장이라도 아네트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무슨 생각을 하는 거냐고, 설마 날 버릴 거냐고 추궁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다. 하지만 자신에게 그럴 자격이 없단 사실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처음부터 입을 꽉 닫고 그녀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건 바로 자신이었으니까.
그리고 지금은 그 대가를 아네트에게서 고스란히 돌려받고 있었다. 자업자득의 늪에 걸린 라펠은 짜증스러운 걸음으로 자신의 방에 돌아갔다. 그리고 외출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이대로 집에 있다간 무슨 주인을 기다리는 개처럼 안절부절못할 게 뻔했다.
그럴 바엔 차라리 자신도 해밀튼에게 찾아가 답답한 속내나 토로할 작정이었다. 이참에 몇 가지 질문도 할 수 있다면 더욱 좋고. 어쩌면 자신이 아네트의 말을 지나치게 과대해석하는 걸지도 모르겠지만, 도무지 잊혀지지 않는 걸 어쩌란 말인가? 라펠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묘한 불길함을 느끼며 그녀의 말을 곱씹었다.
‘내 가족이 그녀를 미워한다고? 대체 왜 그런 소리를 한 거지?’
어차피 라펠의 가족이라고 해 봐야 셀그라티스와 벤 마치, 단 둘뿐이었다. 그중 하나는 심지어 가족이라고 칭할 수도 없는, 남보다도 못한 사이였고 말이다. 그러니 아네트가 지칭하는 대상은 분명 셀그라티스일 것이다.
한데 도무지 짚이는 구석이 없었다. 아네트는 결혼 이후 왕과 마주친 적이 없었으니까. 그뿐 아니라 둘 사이에 딱히 불화가 있었던 적조차 없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라펠은 지금껏 둘의 관계가 오히려 좋은 편이라고 생각했다. 그게 아니라면 셀그라티스가 그런 여자를 놓쳐선 안 된다며 자신을 그토록 몰아세웠을 리 없잖은가?
라펠은 눈살을 찌푸리며 셔츠의 단추를 채우는 손을 좀 더 빨리 놀렸다. 그나마 자신에게도 이럴 때 찾아갈 만한 사람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전직 왕의 비밀기관 소속이었던 해밀튼이라면, 분명히 뭔가를 알고 있을 터였다.
* * *
“아가씨…… 아니, 후작 부인. 여기 스콘 더 드세요! 혹시 푸딩은 생각 없으신가요?”
“아니면 케이크는 어떠신가요? 이번에 새로운 과일 납품처와 계약했는데, 그곳의 청포도가 아주 달콤하답니다. 크림과 무척 잘 어울려요!”
간만에 보는 친정의 메이드들은 무척 살가웠다. 아마도 결혼 후 첫 친정 나들이라 그럴 것이다. 그래서인지 아네트에게 뭐 하나라도 더 내주지 못해 안달이었다. 덕분에 아침을 먹고 온 아네트는 자꾸만 앞에 쌓여가는 디저트들을 보며 식은땀을 흘렸다.
“다들 고마워. 그나저나 아버지께선 많이 바쁘신 모양이지? 도통 내려오실 기미가 안 보이는 것 같은데.”
찻잔을 내려놓은 아네트가 넌지시 돌려 물었다. 그러자 아까까지만 해도 화색이 돌던 메이드들의 얼굴이 조금 굳어졌다. 제아무리 이곳에서 오래 근무했어도, 알라만드 바이에른은 결코 친근해질 수 없는 주인이었다. 그녀들 중 한 명이 어색한 웃음으로 아네트에게 대꾸했다.
“아까 집사님께서 아가씨의 도착을 알려드리긴 했는데, 그 뒤론 어찌 된 노릇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집사라. 아네트는 현관 입구에서 마주쳤던 낯선 얼굴을 떠올렸다. 이전 집사였던 제라드가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 버렸으니, 응당 새 집사를 고용했겠지.
로버트라는 이름의 새 집사는 밤색 머리칼에 키가 큰, 무뚝뚝한 인상의 젊은 남자였다. 하지만 그만큼 클래식한 느낌이 있는 남자이기도 했다. 한 마디로 딱 바이에른이 좋아하는 고용인 타입이었다. 아네트는 과연 새 집사에게서 자신의 방문을 보고 받은 알라만드가 어떤 표정을 지었을지 궁금했다.
“괜찮아. 좀 더 기다리지 뭐.”
아네트는 부친을 만나는 게 쉬울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하지만 너무 예상대로라서 쓴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알라만드는 그녀를 벌써 세 시간째 기다리게 하고 있었다. 하지만 여기서 그냥 돌아갈 순 없었다.
아네트는 반드시 부친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들이 잔뜩 있었다. 특히나 왕가의 견제 및 부당한 압박에 대해서 말이다. 하지만 알라만드는 그녀와 별로 이런 얘기를 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래도 별 상관은 없었다. 아네트는 여기서 마냥 기다리기만 할 마음이 없었으니까.
“기다리는 동안 잠시 산책이라도 하고 올게. 몸이 좀 뻐근해서 말야. 굳이 따라 나올 필요는 없어. 요 앞만 잠깐 나갔다 올 거니까.”
자리에서 일어난 아네트가 생긋이 웃으며 선언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메이드들이 잘 다녀오라며 공손히 인사를 했다. 아네트는 간만에 와 보는 바이에른 가의 정원으로 발걸음을 내디뎠다. 산책은 어차피 핑계일 뿐, 그녀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부친을 직접 만나러 갈 작정이었다.
비록 소원한 부녀일지언정 20여 년을 같이 살아왔다. 그러니 아네트는 어딜 가야 그를 만날 수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완벽하게 정돈된 산책로를 따라 걷는 그녀의 발걸음이 한층 빨라졌다. 모처럼 온 친정이라 그런지 그리운 기분이 들었다.
‘아마도 저곳이었지.’
모퉁이를 돌자, 저 너머에 피크닉용 테이블이 눈에 들어왔다. 바이에른 저택의 정원을 산책하다 잠시 쉬어가라고 만들어진 장소였다. 아네트는 정원의 전망이 잘 보이는 저 테이블을 무척 좋아했었다. 그래서 종종 저곳에서 차를 마시며 책을 읽거나, 수를 놓곤 했다.
하지만 아네트가 이곳을 유독 고집했던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그곳의 테이블 옆, 푹신한 의자에 앉은 아네트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머리 위에서 하늘거리는 차양 너머로 바이에른 저택의 본관이 눈에 들어왔다.
‘아버지의 서재가 아마 3층이었던가?’
야외의 테이블에서 차를 마시며 햇볕을 쬐는 일은 매번 되풀이해도 질리질 않았다. 그러다 가끔 뭔가에 이끌리듯 괜히 고개를 들어볼 때가 있었다. 마치 막연한 예감처럼.
그럴 때면 3층 서재, 그 커다란 창가에 알라만드가 있었다. 피 한 방울 흐르지 않을 듯한 새하얀 손을 창문에 대고. 실내의 그늘 속 어두운 보랏빛 눈동자로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예기치 못한 마주침에 아네트가 흠칫 놀라면, 그는 무심한 눈빛으로 몸을 돌려 사라져 버리곤 했다. 마치 자신의 굴 안으로 스르르 되돌아가는 흰 뱀처럼 말이다.
지금도 그랬다. 아네트가 고개를 들어 3층 서재의 창문을 올려다보자, 그곳에 알라만드의 낯익은 백금발이 보였다. 햇살을 받아 찬란하게 빛나는 그 백금발은…… 뜻밖에도 누군가와 치열하게 머리채를 잡고서 싸우는 중이었다.
“……?”
아네트는 순간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햇빛에 어른거리는 잔상을 잘못 본 게 아닐까 싶어서였다. 하지만 다시 봐도 서재 안에선 격렬한 몸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아네트는 눈을 크게 뜨고 창 너머를 올려다보았다. 알라만드는 웬 건장한 체격의 밤색 머리칼을 한 남자와 싸우는 중이었다. 한발 늦게 그 남자의 얼굴을 알아본 아네트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아까 본 그 집사잖아!’
대체 왜 알라만드가 집사와 몸싸움을 벌이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상황은 매우 급박해 보였다. 알라만드가 아무리 젊어 보인다 한들, 벌써 50대에 가까워지는 나이였다. 그리고 바이에른 가 사람들은 몸 쓰는 데에는 별 재능이 없었다.
아네트는 정신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저택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그리고 지나가는 고용인들을 붙잡고 고함쳤다.
“아버지가 습격당하셨어!! 빨리, 3층 서재로!!!”
아네트가 다소 진정된 알라만드와 마주 앉게 된 것은 그로부터 두어 시간 후였다. 얼굴에 든 멍 위로 얼음주머니를 얹은 알라만드는 피곤해 보였다. 눈가에 보라색 그늘이 진 그의 얼굴은 모처럼 사람다워 보였다.
이를 본 아네트는 약간 놀랐다. 언제나 바늘 하나 안 들어갈 것처럼 완벽한 얼굴을 한 부친은 너무 먼 존재였다. 그는 같은 인간처럼 보이지도 않았고, 심지어 나이를 먹는 것 같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 보니 알라만드도 나이를 먹고 있다는 사실이 체감될 지경이었다. 그녀가 낯선 부친의 모습에 놀라는 사이, 알라만드가 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젠 집사마저도 믿을 수 없군. 하마터면 유언장도 마련해 놓기 전에 죽을 뻔했어.”
“어떻게 된 일이죠? 그 집사, 이름이 로버트랬지요. 혹시 이안처럼 신분을 위조해 고용된 사람인가요?”
“아니. 신분은 확실해. 저택에 들여놓기 전까지만 해도 깨끗했으니까.”
“그럼 왜…….”
“바보 같은 질문을 하는구나, 아네트. 들어온 후에도 마음은 언제든지 변할 수 있는 노릇이지. 가령 누군가가 아주 큰 대가를 제시했거나, 가족들을 인질로 잡는다면 어떨까? 그럼 제아무리 하찮은 것들도 한 번쯤은 이를 드러낼 각오를 할 테지. 시건방진 것들 같으니.”
알라만드가 아직까지 손자국이 빨갛게 남은 자신의 목을 쓸어내리며 짓씹듯 내뱉었다. 하마터면 덩치 큰 집사에게 교살당할 뻔했던 그는 목이 잔뜩 상해 있었다. 입을 열 때마다 쉰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게 안타까울 지경이었다.
이를 본 아네트는 갈등했다. 하지만 이것만큼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신중하게 주위를 살핀 아네트가 속눈썹을 내리깔며 속삭였다.
“이것도 혹 폐하께서 꾸민 일인가요? 아버지를 제거하고, 바이에른을 견제하기 위해서요.”
“너……!! 그걸, 네가 어떻게?”
뜻밖의 말에 알라만드의 눈이 커졌다. 그는 아네트가 이 사건의 전모를 짐작하고 있으리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한 얼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