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과거의 악몽 속을 헤매는 남자에겐 그녀의 목소리가 닿지 않았다. 아네트는 이 추운 복도를 홀로 배회하는 낯익은 실루엣을 발견했다. 빛도 닿지 않는 깜깜한 곳에서 헛손질을 하고, 뭔가를 중얼거리는 모습이 안쓰러웠다. 그래도 요즘엔 잘 자는 것 같더니, 증세가 또 재발한 모양이었다.
‘내가 준 오르골을 틀지 않은 걸까?’
아네트는 그걸 받을 때 라펠이 지었던 떨떠름한 표정을 떠올리며 씁쓸해졌다. 이런 병은 대개 정신적인 문제가 원인이었다. 라펠의 경우엔 전쟁 참전으로 인한 트라우마가 큰 영향을 미쳤다. 그곳에서 라펠은 수없이 잔혹한 폭력과 살인의 현장에 직면했었다. 그리고 몇 안 되는 믿을 수 있는 부관, 로베르트를 잃었다.
성공적으로 적을 도륙한 라펠은 귀환 후 두둑한 작위와 포상을 받았다. 하지만 꽁꽁 숨겨둔 그의 황폐한 정신은 간혹 이런 식으로 발현되곤 했다. 이건 라펠이 평생을 안고 가야 할, 그의 무거운 짐이나 다름없었다.
‘스트레스를 많이 받거나, 정신적인 압박이 심할 땐 증세가 더 악화한댔지.’
아네트는 자신이 읽었던 책의 내용을 떠올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수면장애가 왜 또 발동했는지 짚이는 구석이 있었다. 아마 오늘 저녁 식사에서 나눴던 대화 때문이겠지. 본인 딴에는 처음으로 호감을 고백한 셈인데, 거절이나 다름없는 대답을 들었다. 아마 내색하진 않아도 충격이 클 터였다.
“하여튼 바보 같은 사람.”
작게 중얼거린 아네트는 침실 밖 복도로 나섰다. 조금이라도 빨리 그를 안전한 곳으로, 따뜻한 침대로 데려오고 싶었다. 혼자 헤매는 악몽 속은 분명 쓸쓸하고 외로울 테니까. 그의 고통을 생각하기만 해도 마음이 아파서, 아네트는 조심스레 라펠에게 다가갔다.
오늘 라펠이 겪는 트라우마는 아마 아프기보단 슬픈 것인 모양이었다. 그는 창백하게 질린 채 식은땀을 흘리며, 벽에 이마를 문지르고 있었다. 비록 눈물을 흘리진 않았지만 그 입술 사이에선 꼭 흐느낌 같은 신음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마도 죽게 놔두고 온 자신의 부관, 로베르트를 떠올리거나 자신의 학대 받은 과거를 슬퍼하고 있는 거겠지.
“또 나쁜 꿈을 꿨어요, 라펠? 이젠 괜찮아요. 자, 얼른 이쪽으로 와요.”
아네트는 부드럽게 그의 손을 잡아끌었다. 짙은 흑발에 창백한 피부를 한 라펠은 이 어두운 복도 속에서 꼭 유령처럼 보였다. 심지어 손에 와 닿는 그의 손마저도 축축하고 차가웠다. 그 손을 문지르며 자신의 체온을 나눠 준 아네트가 그를 침대로 데려왔다.
라펠의 단단한 가슴팍을 밀어 침대에 앉히자, 처음엔 거부하듯 버티던 그가 이윽고 몸의 힘을 뺐다. 그리고 아네트가 이끄는 대로 천천히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았다. 아직까지 혼몽한 꿈속을 허우적대는 그의 얼굴이 괴로워 보였다. 식은땀을 흘리며 신음하던 라펠이 자신의 어깨를 쥔 아네트의 팔에 머리를 기댔다. 마치 그녀에게 의지하기라도 하듯이.
아네트는 자신의 팔에 느껴지는 무게감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수면장애에 시달리는 라펠을 재우는 것도 벌써 여러 번. 그는 이제 무의식 속에서도 아네트의 손길을, 감촉을 기억하는 모양이었다.
자신에게 기댄 그의 아름다운 얼굴을 내려다보고 있자니, 기쁘기보단 슬펐다. 누구의 손도 타지 않는 야생의 맹수를 길들인 듯한 느낌.
“이런 건 좋지 않은데.”
라펠의 남자다운 뺨을 쓸어내린 아네트가 중얼거렸다. 그는 불행히도 마음을 열 상대를 잘못 골랐다. 차라리 라펠이 조금 더 일찍 자신을 좋아해 줬다면, 상황이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그랬다면 아네트는 아마 그와 함께 살아가기 위해 다른 방법을 택했을 터였다.
그러나 라펠은 너무 늦어버렸고, 아네트는 모든 걸 알아버렸다. 그녀는 이미 떠나기로 마음먹은 사람이었다. 다행히 라펠의 감정이 아직 사랑이 아니라, 호의에 가까운 수준 같으니 괜찮을 것이다. 사실상 자신이 떠나 주는 편이 라펠에게도 더 좋을 테고 말이다.
‘어쨌든 폐하께선 라펠을 꽤 아끼시는 것 같았으니 말이지.’
아네트는 자신의 누명을 벗기 위해 왕과 맞설 각오도 되어있었다. 승률은 희박한 싸움이었지만, 이번 생엔 포기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그러니 라펠이 만약 자신을 사랑한다면 그는 몹시 괴로워질 것이다. 셀그라티스는 그의 유일한 가족이었고, 사생아인 라펠에게 모든 걸 쥐여준 은인이기도 했으니까.
“그거 알아요, 라펠? 당신 가족에게 정말 잘 하고 싶었는데… 이상하게 다들 절 싫어하시네요.”
셀그라티스는 그녀를 포함한 바이에른 가 전체를 무너뜨리고 싶어했다. 그리고 이를 위해 쓴 도구가 라펠의 외삼촌인 벤 마치였다. 고로 아네트는 몇 안 되는 라펠의 모든 가족에게 미움받는 셈이었다. 만약 이 사실을 라펠이 안다면 과연 무슨 생각을 할까?
그래서 아네트는 굳이 라펠에게 왕을 어찌 생각하냐고 물었다. 아니나 다를까, 라펠은 자신이 왕에게 일종의 은혜를 입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 빚을 갚아야 한다고 말하던 라펠의 얼굴은 단호했다.
아네트는 차마 그런 라펠에게 친부와, 자신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요구할 수 없었다. 안 그래도 불우한 가정의 희생자였던 라펠에겐 너무 잔인한 선택이었다. 솔직히 그가 자신을 선택할 거라 자신할 수 없었고 말이다. 그러기엔 라펠이 왕에게 받은 게 너무 많았다.
아네트는 눈물을 삼키며 고개를 숙여 그의 이마에 키스했다.
“이젠 나 없이도 혼자서 잘 자야 해요. 당신은 강한 사람이니 할 수 있을 거예요.”
그러자 라펠이 무의식중에서도 거부하듯 희미한 신음을 냈다. 그 반응에 아네트는 작게 웃었지만, 눈동자에서 눈물 한 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우리도 남들처럼 평범한 부부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당신이 날 사랑하고, 내가 당신을 사랑해서 기쁘게 결혼한 그런 관계였다면 참 좋았을 텐데. 전생엔 자신이 아무것도 못 하는 겁쟁이라서 라펠과 사이가 나쁜 줄 알았다. 그래서 이번 생엔 그와 잘 지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어쩌면 서로 사랑에 빠지고, 다른 연인들처럼 상대를 아껴 주고. 그렇듯 평범한 삶을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 아네트는 알아버렸다. 이건 단순히 라펠과 자신의 문제가 아니었다. 누가 한 말이었더라? 결혼은 둘이 하는 게 아니라 집안끼리 하는 거라더니. 실제로 델티움의 왕가가, 그리고 바이에른 공작가가 서로를 졸라 죽이려는 두 마리의 독사처럼 칭칭 얽혀 있었다. 그 사이에 끼여서 등이 터지지 않으려면 어떻게든 발버둥을 쳐 이곳을 벗어나야 했다.
“그러니 당신은 내가 없는 삶에 익숙해질 필요가 있어요.”
부드럽게 속삭인 아네트가 콧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처음엔 산들바람처럼 작고 희미했던 그 노랫소리는 점차 또렷해졌다. 그러자 침대 위에 웅크리고 앉은 라펠의 몸이 뒤로 스르르 넘어갔다. 이제 그는 완전히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었고, 성가신 악몽도 차마 그곳까진 따라 들어가지 못했다.
라펠의 날카로운 눈썹 사이에 잡혔던 주름이 서서히 희미해졌다. 아네트는 그의 표정이 평온해진 걸 확인하고 그 옆에 몸을 누였다. 마주 본 라펠의 얼굴은 가슴이 시릴 만큼 아름다웠다. 아네트는 그 얼굴이 눈을 감아도 잔상처럼 떠오를 때까지 바라보다, 이윽고 천천히 눈을 감았다.
“좋은 꿈 꿔요, 라펠.”
하지만 아네트가 몽유병에 대해 미처 몰랐던 사실이 하나 있었다. 간혹, 드물긴 해도 몽유병 도중에 의식이 깨어나는 경우도 있다는 점이었다.
몽유병이란 아주 이상한 느낌이었다. 말로 표현하긴 어렵지만, 몸에서 영혼만 반쯤 뽑혀 나오는 것 같았다. 나머지 반은 자신의 몸을 멋대로 조종하고 말이다. 한 마디로 의식이 반반으로 나뉘어 있는 느낌과도 같았다. 마치 한쪽엔 잼을 바르고, 다른 한쪽엔 크림을 바른 스콘처럼 말이다.
크림을 바른 스콘 쪽의 라펠은 묘한 눈빛으로 자신의 잼 부분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복도를 헤매며 꼭 유령처럼 신음하고 있었다. 잔뜩 일그러진 표정이, 괴로워하는 눈매가 꼴불견이었다. 그는 몽롱한 상태에서도 이 기이한 경험에 대해 깊은 감명을 받았다.
‘남들이 볼 땐 이런 느낌이었군.’
곧이어 반대편 침실 문이 열리고, 아네트가 걸어 나왔다. 막 잠들려다 나온 모양인지 평소에 비해 약간 부스스한 모습이었다. 인형처럼 무표정했던 그녀의 얼굴이 자신을 발견한 순간, 안쓰러운 듯 흐려졌다. 이윽고 자신의 곁으로 다가온 그녀가 자신의 손을 붙잡았다.
“또 나쁜 꿈을 꿨어요, 라펠? 이젠 괜찮아요. 자, 얼른 이쪽으로 와요.”
아네트는 아까 자신을 차 버린 여자라곤 믿기지 않을 만큼 상냥해 보였다. 라펠은 그녀의 부드러운 얼굴을 보자, 가슴이 얇게 저며오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그의 몸이 이윽고 아네트의 손에 이끌려 침실 안으로 들어섰다. 자연히 라펠의 영혼도 보이지 않는 줄에 끌려가듯 그 안쪽으로 향했다.
자신을 침대 위에 앉힌 아네트가 손을 뻗어 뺨을 쓸어내렸다.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이 꼭 호수처럼 깊고 처연했다. 이를 본 라펠은 심장 한편이 저려오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자신의 몸에 남아있는 나머지 영혼도 이를 느끼는지, 고개가 멋대로 기울어져 그녀의 팔에 머리를 기댔다. 이를 본 아네트가 서글픈 미소를 지으며 속삭였다.
“그거 알아요, 라펠? 당신 가족에게 정말 잘 하고 싶었는데… 이상하게 다들 절 싫어하시네요.”
이게 갑자기 무슨 말이지? 라펠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친부인 셀그라티스는 그녀가 얼마나 좋은 신붓감인지, 왜 그녀와 결혼해야 하는지 거듭 강조했었다. 라펠도 고집이라면 결코 밀리는 편이 아닌데, 그때만큼은 도무지 셀그라티스를 이길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러니 아네트가 뭔가를 오해하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왕은 반드시 그녀를 자신과 결혼시키기 위해 작정한 사람처럼 보였었다. 아마도 아네트가 그만큼 좋은 혼처이고, 좋은 여자이기 때문이겠지. 아네트의 유일한 흠이라곤 친정이 하필 바이에른이란 것뿐이었다.
라펠은 이따 잠에서 깨어나는 대로 그녀에게 이 점을 잘 설명해 줘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는 아네트가 자신의 가족에게 거부당한다고 느끼길 원치 않았다. 바로 그때, 고개를 숙인 아네트가 그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그리고 슬픈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젠 나 없이도 혼자서 잘 자야 해요. 당신은 강한 사람이니 할 수 있을 거예요.”
……지금 그녀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