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벤이 거듭 머리를 조아리며 애처롭게 목숨을 구걸했다. 그런 벤을 흘끗 본 라일린이 다리를 걷어차서 그를 닥치게 만들었다. 벤의 연기력은 무척이나 그럴싸했다. 하지만 라일린의 날카로운 눈까지 속일 순 없었다. 그는 멸시하는 눈빛으로 벤의 가증을 바라본 후, 아네트에게 물었다.
“원하던 정보는 다 얻으셨는지요, 고객님?”
“그런 것 같네요. 어차피 줄곧 숨어있던 자라서 그 이후의 일들은 잘 모르겠지요. 더 이상의 심문은 시간 낭비라고 생각되네요.”
“그럼 이제 이자를 어떻게 처리할까요?”
“음.”
아네트는 속눈썹을 내리깔고 깊은 고민에 빠졌다. 그녀는 과연 무슨 결정을 내릴까? 곁에서 이를 지켜보는 라일린의 눈빛이 흥미진진했다.
“크흐윽, 흐읍! 제발… 부탁입니다, 살려 주십시오.”
벤은 이때다 싶어 은근슬쩍 우는 소리를 드높였다. 어떻게든 아네트의 동정심을 사려는 노력이 처절하기까지 했다. 비록 자신을 윽박질러 있는 사실 없는 사실 다 털어놓게 만든 라일린이 무섭긴 했지만, 그 또한 어차피 아네트의 하수인이었다. 주인 아가씨가 자신을 가엾게 여겨 풀어주라고 하면 제까짓 게 뭘 어쩌겠는가?
하지만 벤이 한 가지 망각한 사실이 있다면, 그의 선택은 늘 최악이었단 점이었다. 처음으로 도박에 손을 대었을 때도, 여동생을 마약에 중독시켰을 때도, 그 이후 왕에게 찾아가 진상을 떨었을 때도, 뭐 하나 좋았던 선택이 없었다. 그 선택들이 쌓이고 쌓여 지금의 결과를 불러왔다.
“……폐하께선 바이에른을 경계하시지. 지금은 왕가에서 받은 피도 많이 흐려져서 ‘푸른 피의 바이에른’이라고 불리지만, 언제 다시 보랏빛 피가 되려고 할지 모르는 노릇이니까.”
생각에 잠긴 아네트가 느릿하게 서론을 떼었다. 왕은 자신의 가문을 견제하려고 물밑으로 여러 수작을 부리고 있었다. 오라비인 아르옌은 샤펠 제국에서 실각할 위기를 겪었었고, 자신은 누명을 써 왕세자비에서 미끄러졌다. 부친인 알라만드도 비록 티를 낸 적은 없었지만, 어쩌면 비슷한 상황을 겪었을지도 몰랐다.
‘아무래도 조만간 친정에 들러야겠어.’
아네트는 부친과 대화해 볼 필요성을 느꼈다. 물론 알라만드는 빈말로라도 대화하기 편한 타입은 아니었다. 그는 자신 같은 위치의 인간은 과묵해야 한다고 믿었다. 사람들이 그를 대하기 어려워할수록, 그의 눈치를 살피며 납죽 엎드릴수록 흡족해했다. 그는 그것이 바로 ‘아랫것들’이 자신을 대하는 올바른 경외감이라고 생각했다.
당연히 이 원리는 딸인 아네트에게도 적용되었다. 솔직히 아버지와 독대하는 상상만으로도 손발이 차가워지고, 숨이 가빠지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두렵다고 해서 마냥 피할 순 없었다.
생각에 푹 빠진 아네트가 불안한 나머지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러자 어디선가 새하얀 손가락이 다가오더니, 그녀의 치아에 물린 입술을 조심스레 빼내 주었다. 입술에 닿는 차가운 손가락의 감촉에 흠칫 놀란 아네트가 시선을 들었다. 그러자 라일린이 생긋이 웃으며 말했다.
“고객님께선 몹시 영리하시지만, 간혹 생각에 깊이 빠지면 주변을 잊어버리시더군요. 이런 소외감은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만. 쓸쓸하거든요.”
말을 마친 라일린이 짐짓 슬픈 표정을 꾸며내며 눈을 내리깔았다. 염색 때문에 푸른 머리칼이 된 그는 몹시 청초해 보였다. 예전엔 꼭 자줏빛 모란처럼 화려한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이슬을 머금은 수국 같았다. 이 때문에 슬퍼하는 표정이 더더욱 돋보여서, 아네트는 저도 모르게 무심코 사과했다.
“미안해요. 솔직히 지금 좀 혼란스럽거든요. 딴 데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네요.”
“고객님께서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제가 한번 맞춰볼까요?”
“네?”
아네트는 이게 무슨 소린가 싶어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러자 슬픈 표정을 싹 지운 라일린이 경쾌하게 말했다.
“지금 고객님께선 이런 추측을 하시는 게 아닙니까? 폐하는 예전 일과 관련된 시종들을 전부 죽여버렸지요. 하지만 저자만큼은 살려두었습니다. 거기에 꾸준히 생활비까지 대 주며 사람을 붙여 감시했지요. 그래 봐야 본인이 제 발로 도박을 하겠다고 기어 나왔으니 뭐, 부질없는 짓이지만요.”
라일린이 한심하다는 듯 말을 멈추고 벤을 내려다보았다. 손에 들린 피 묻은 고기 망치를 만지작거리는 것으로 보아, 벤을 한 대 더 후려치고 싶은 눈치였다. 하지만 때와 장소를 가릴 줄 아는 그는 용케 사리사욕을 접어두고 말을 계속 이어갔다.
“어쨌든 그 말인즉슨, 폐하는 아마 이자를 어딘가에 ‘또’ 써먹을 작정인 거겠죠. 그러니 살려 둔 거고요. 어쩌면 예전 일의 연장선으로 쓸 수도 있고, 아니면 아예 새로운 일을 꾸밀지도 모르죠. 사실 지금으로선 알 길이 없습니다만. 굳이 제 개인적인 의견을 말씀드리자면… 뭐가 되었든 고객님껜 결코 좋은 방향이 아닐 것 같군요.”
말을 마친 라일린의 붉은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그의 말은 정확히 아네트의 생각과 일치했다. 그럴 린 없겠지만 마치 독심술이라도 쓰는 것 같아서 마음이 선뜩해질 지경이었다. 아네트는 관자놀이를 짚으며 갈등했다. 그녀는 고심에 고심을 거듭한 끝에 결정을 내렸다.
“저희가 신변을 맡아두도록 하죠. 일단 외부엔 행방불명된 것으로 처리해 두고요. 나중에 혹 증인으로 쓸 일이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솔직히 말하자면 벤을 지금 죽이는 편이 더 깔끔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아네트는 그래선 안 된다는 막연한 느낌이 들었다. 벤 마치를 살려두면 언젠가 쓸모가 있을 거란, 알 수 없는 강렬한 예감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예감을 믿고 나가기로 결심했다.
“혹시 이자를 아무도 몰래 계속 가둬놓을 수 있을까요, 라일린 씨? 누구와도 접촉할 수 없게끔 말이에요. 원한다면 우리 쪽에서 언제든 조용히 처리할 수 있길 바라요.”
“물론이지요. 무엇이든 고객님께서 원하는 대로.”
그녀의 손등 위에 입을 맞춘 라일린이 상냥하게 대꾸했다. 아네트는 자신의 양손에 얼굴을 파묻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은 한고비를 넘긴 듯한 기분이었다. 지금이라도 벤의 신변을 구속할 수 있어서 천만다행이었다. 그는 왕이 자신을 찌를 때 사용할 칼이나 다름없는 존재였으니까. 그렇다면 차라리 기회가 있을 때, 지금 그 칼끝을 미리 빼앗아 놓는 편이 좋았다.
‘그리고 라펠을 위해서도 이편이 더 나아.’
왕은 라펠의 미래를 위해 철저히 그의 과거를 지워 주었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라펠을 천한 사생아라고 흉볼지언정, 정작 그의 모친이 누군지는 까맣게 몰랐다. 하지만 벤이 살아있는 한, 또 누구에게 라펠의 과거를 폭로할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지금 자신에게 한 것처럼 말이다.
비밀을 유지하려면 아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적을수록 좋았다. 만약 다음번에 벤이 또 ‘어쩔 수 없이’ 라펠에 대해 누군가에게 주절댄다면? 그리고 그 사람이 이를 재밌게 여겨 델티움 사교계에 퍼뜨리기라도 한다면?
상상만 해도 끔찍한 일이었다. 아네트는 자존심 강한 라펠이 얼마나 큰 상처를 입게 될지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러니 벤 마치는 쥐를 벗 삼아 어두운 지하에 계속 갇혀있어야 했다. 언젠가 아네트가 그를 필요로 할 때까지.
명색이 자신의 시외숙부인데,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역시 내 핏줄에도 새파란 피가 흐르는 모양이야.’
마치 부친인 알라만드처럼 말이다. 아네트는 씁쓸한 기분으로 몸을 돌려 지하실에서 빠져나왔다. 등 뒤에서 ‘어딜 가십니까, 아가씨! 제발 용서해 주십시오!!’ 같은 외침이 들려오는 듯도 했다. 하지만 앞날의 일로 머릿속이 꽉 찬 아네트의 귀엔 와 닿지 않았다.
아네트는 라펠에 관한 얘기는 쏙 뺀 채, 셀레스틴에게 대강의 결과를 알려주었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천연덕스럽게 집으로 귀가했다.
돌아온 아네트가 라펠의 첫 고백을 듣게 된 건 다음 날의 일이었다.
* * *
라펠을 내쫓다시피 보내고 난 뒤, 홀로 남은 아네트는 침실에 드러누웠다. 벤 마치를 잡아 심문하느라 어젯밤을 꼬박 새우다시피 했다. 하루를 못 잔 상태로 과격한 정사까지 나눴으니, 말 그대로 피곤해서 죽을 것 같았다.
아네트는 눈을 감자마자 깜박 잠들었다. 너무 피로하니 오히려 신경이 과민해져서, 깊게 잠들진 못했다. 그녀는 몇 시간 동안 선잠에 빠져 악몽을 꾸다 깨어나길 반복했다. 그러길 몇 차례, 아네트는 결국 몇 시간 전과 다름없이 피곤한 상태로 눈을 떴다.
‘이게 다 라펠 때문이야.’
아네트는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한숨을 삼켰다. 아까 몸을 섞고 난 뒤, 라펠이 했던 말이 줄곧 머릿속을 맴돌았다. 비록 이성적으로 상황을 잘 정리하긴 했으나 그녀의 마음은 여전히 그 순간에 계속 묶여있었다.
‘난 아네트, 당신을…… 좋아해.’
그렇게 고백하던 라펠의 목소리는 약간 떨리고 있었다. 잔뜩 긴장해서 어색하기 그지없었던 딱딱한 말투. 하지만 그만큼 진실된 고백이기도 했다. 이를 떠올리자 또 아네트의 가슴이 뛰었다.
회귀한 이후, 이번 생에는 꼭 사랑받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게 이왕이면 남편인 라펠이었으면 좋겠다고 내심 바라기도 했었다. 그는 유일하게 자신의 곁에 끝까지 남아 준 남자였으니까. 하지만 회귀 후 다시 마주친 라펠은 여전히 그녀를 싫어했다. 마음을 단단히 걸어 잠그고, 자신에 대한 그 어떤 것도 알려주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네트는 그를 포기했다. 델티움에서의 모든 일이 마무리되고 나면, 모든 걸 뒤로 하고 떠날 예정이었다. 오스란드의 평범한 항구 도시에서 평범한 아네트로 두 번째 삶을 누릴 작정이었다.
그러니 이런 술렁거림은 좋지 않았다. 아네트는 자신의 심장이 원래의 리듬을 되찾을 때까지 가만히 손바닥으로 내리눌렀다. 그리고 가만히 눈을 감았다. 다행히 이번에는 좀 더 깊게 잠들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이번엔 문밖 복도에서 나는 기묘한 소리가 아네트의 잠을 방해했다.
‘이건 또 무슨 소리지?’
아네트는 뻑뻑한 눈꺼풀을 내리감은 채 생각했다. 뭔가가 벽이나 기둥에 쿵쿵 부딪히는 듯한 소리, 그리고 남자의 정신 나간 중얼거림. 만약 간이 약한 사람이라면 밖에 유령이 있다며 기겁했을 만큼 수상한 소음이었다.
하지만 아네트는 피곤한 뇌리로도 그 소리의 출처를 짐작해 낼 수 있었다. 사실 그녀에겐 좀 익숙하기까지 한 소음이었다. 무거운 몸을 일으킨 아네트가 눈을 비비며 침실 문을 열었다. 그리고 어두운 복도를 내다보며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라펠? 당신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