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왕이 ‘잘 지켜봐 달라.’라고 말하지만 않았어도 이런 번거로운 짓은 하지 않았을 텐데. 해밀튼은 속으로 혀를 차며 자신의 셔츠를 찢어 라펠의 어깨를 지혈해 주었다. 그리고 성의 없는 동작으로 쓰러진 벨라의 상태를 살폈다.
안 그래도 벨라는 마약에 찌들대로 찌들어 여생이 얼마 남지 않은 몸이었다. 그 와중에 칼까지 맞았으니, 살아남을 수 있을 리 없었다. 한때 세 끼를 다 챙겨 먹는 게 목표였던, 소박하고 씩씩했던 여자는 그렇게 마약중독자로 생을 끝마쳤다. 그녀의 죽음을 확인한 해밀튼이 무심하게 라펠을 향해 물었다.
“네 어미를 죽인 날 원망하느냐?”
설령 그렇다 해도 상관없었다. 라펠이 복수에 대한 의지로 더 열심히 노력할 수만 있다면, 해밀튼은 얼마든지 원망을 살 각오가 되어있었다. 벨라를 죽인 것도 딱히 후회하지 않았다. 해밀튼은 그녀가 네 살짜리 라펠에게 주먹을 휘두르다 한쪽 눈을 실명시킬뻔한 날 이후로, 줄곧 그녀를 죽이고 싶었으니까.
“아…….”
벨라가 죽었다는 말에 라펠은 충격을 받은 듯했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죽은 벨라의 시체와, 해밀튼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해밀튼은 가만히 라펠의 다음 반응을 기다렸다. 자식의 눈앞에서 어미를 죽였으니, 미움받는다 해도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라펠은 그의 예상과 다르게 행동했다. 비틀거리며 다가온 그가 떨리는 손으로 해밀튼의 팔을 잡았다. 그 상태로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손을 몇 번 쥐었다 뗀 라펠이 이윽고 꽉 잠긴 목소리로 속삭였다.
“…고맙습니다.”
이를 들은 해밀튼은 말없이 눈을 감았다. 가슴이 꽉 죄어드는 것처럼 먹먹했다. 이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이 가엾은 왕의 사생아에게 생각보다 정이 들어버리고 말았다.
해밀튼은 라펠이 갓난아이일 때부터 그를 지켜봐 왔었다. 그리고 라펠이 그 어린 나이에 얼마나 힘겨운 삶을 버텨내고 있는지도 봐 왔다. 그는 제대로 밥도 먹지 못해 휘청거리면서도, 매번 최선을 다해 검술 훈련을 받았다. 왕을 닮은 라펠의 눈에선 굽히지 않는 고집과, 삶에 대한 열망이 엿보였다. 해밀튼처럼 닳고 닳은 인사조차 매료시킬 만큼 지독한 눈빛이었다.
이쯤 되면 아무리 일에 불과하다 한들 정이 갈 수밖에 없었다. 해밀튼은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라펠을 자신의 저택에 들여놓고 싶었다. 하다못해 왕궁에 들여보내기 전까지만이라도 말이다.
하지만 왕의 허락을 받기 전까진 그럴 수 없었다. 불행히도 왕은 라펠을 계속 모친의 손에 맡겨두길 바랐다. 순전히 자신의 편의를 위하여.
“그냥 놔둬. 좀 더 최악의 상황에서 구해줘야 극적인 효과가 나오지 않겠어? 이 상황에서 그대가 먼저 손을 내밀어버리면, 나중에 왕궁에 거둬지더라도 감사하는 마음이 덜할 거 아냐. 그건 좀 곤란하지.”
변해버린 건 비단 벨라 뿐만은 아니었다. 이는 셀그라티스 왕 또한 마찬가지였다. 자신의 첫 아이인 라펠을 신경 써 달라며 당부하던 순수한 청년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남은 건 검에 재능을 보이는 자신의 사생아를 어찌 써먹을지 고민하는 비정한 남자뿐.
해밀튼은 입술을 깨물며 아직 어린 소년을 꽉 끌어안았다. 그나마 자신이 제때 와서 다행이었다. 라펠이 죽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이제 막 성장을 시작한 골격이, 품 안의 미숙한 몸이 안쓰러웠다. 어른들의 지독한 사정 속에서 고통만 받은 라펠이 가엾어서 마음이 쓰렸다.
“가자꾸나. 더는 이곳에 있을 필요가 없단다.”
라펠에게 망토를 둘러 준 해밀튼이 그의 손을 잡아끌었다. 물론 왕이 이 소식을 들으면 기꺼워하진 않을 터였다. 하지만 이건 불운한 사고였고, 해밀튼이 개입하지 않았다면 라펠은 죽었을 것이다. 이는 왕 또한 바라는 바가 아니었으니, 라펠을 조금 일찍 거두더라도 벌을 내리진 않으리라.
그렇게 라펠은 자신의 지옥에서 탈출했다.
전혀 몰랐었던 라펠의 과거에 아네트는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모친에게 거의 죽을 만큼 학대당했던 과거가 있었다. 지금의 크고 강인한 모습만 봐선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과거 얘기만 나오면 입을 꾹 다물었구나.’
언제나 날이 서 있던 라펠의 모습을 떠올린 아네트는 문득 울고 싶어졌다. 그의 벗은 상반신에 남아있던 아픈 흉터들이 떠올랐다. 아네트는 아마도 그가 전쟁에 출전했을 때 얻었던 영광의 상처들일 거라 짐작했다. 하지만 어쩌면, 그 흉터 중 몇몇은…….
라펠이란 남자는 바보같이 융통성이 없어서, 자신의 아픈 과거를 치유할 줄을 몰랐다. 그는 상처가 곪다 못해 썩어들어갈 때까지 홀로 다 끌어안는 타입이었다. 제아무리 고통스러워도, 아파도 남들에게 약한 모습을 들킬까 봐 입을 꾹 다무는 것이다. 자신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고개를 꼿꼿하게 치켜들고서 고고한 야생짐승처럼 혼자 죽어가겠지. 그래서 아무도 그가 얼마나 아픈지,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눈치채지 못할 것이다.
아네트는 그의 그런 미련함이 너무 가슴 아팠다. 차라리 마냥 못되기만 한 그런 남자였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아네트는 이미 라펠의 다른 모습들을 알아버렸다.
아닌 체하면서도 자신의 눈치를 살필 때의 얼굴, 과거를 말하기 싫어 질색하면서도 혹 아네트가 마음 상했을까 신경 쓰던 표정, 멋쩍을 때 일부러 표정을 굳히면서 붉어진 얼굴을 가리던 모습. 차라리 이 모든 걸 몰랐다면, 씁쓸하게 웃으면서 그를 떠날 수 있었을 텐데.
‘하여튼 바보 같은 남자.’
한편, 모든 사실을 자백한 벤은 뉘우치는 체하며 흐느꼈다. 하지만 라일린에게 맞은 곳이 아파서 눈물이 날 뿐, 정말로 죄책감을 느끼는 건 아니었다.
‘벨라 그년이 애만 때리지 않았어도 양육비를 계속 받았을 텐데. 멍청한 년 같으니라고!’
벤은 이미 죽은 자신의 누이동생을 속으로 욕했다. 맨 처음 그녀에게 약을 쥐여준 게 자신임을 애써 외면하면서.
그가 이번 달 양육비를 채가기 위해 집으로 돌아왔을 땐 이미 모든 상황이 끝난 후였다. 여동생도, 조카도 없는 빈집에는 공문 한 장이 놓여있을 따름이었다. 요약하자면 벨라는 모친의 자격이 없고, 감히 왕의 핏줄을 살해하려 했기에 즉결처형되었다는 통보였다. 그리고 라펠은 왕궁에 거둬질 테니, 양육비는 이걸로 종결이라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도 함께였다.
‘이럴 순 없어!!’
벤은 매월 따박따박 나오는 양육비, 아니 도박 자금에 길들여진 몸이었다. 그는 진심으로 이 상황이 억울하다고 생각했다. 왕가에서 돈을 더 주지 않을 거라면 하다못해 여동생을 죽인 것에 대한 보상이라도 해 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물론 자신의 도박 자금을 위해서.
도박에 미친 벤은 이미 간덩이가 부을 대로 부은 상태였다. 어차피 갈 데까지 간 인생, 도박을 할 수 없다면 더 잃을 것도 없었다. 그래서 그는 공문을 들고 왕궁으로 찾아가 한바탕 행패를 부렸다. 그리고 당연히 왕궁 감옥 503호로 직행했다.
뒤늦게 감옥에 갇힌 벤은 정신을 차렸다. 이대로 모든 게 끝났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왕은 벤이 제 입장을 깨달을 때까지 그를 감옥에 처박아둔 후, 비공식적인 면담을 가졌다. 한때 벨라에게 키스했던 그의 입술은 이제 벤에게 냉혹한 속삭임을 흘려보냈다.
‘네게 시킬 일이 있다. 내가 지시하는 대로 잘 따라준다면, 모든 일이 끝난 후 카지노의 주인이 되게 해 주마.’
카지노의 주인이라니! 벤의 귀가 번쩍 뜨였다. 자신의 카지노를 가지는 건 모든 도박꾼의 꿈이나 다름없었다. 그는 무조건 하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만족스럽게 웃은 왕은 그의 몸에다 독을 주입해 버렸다.
‘미안하지만 도박꾼을 믿을 순 없는 노릇이지. 이 독은 2주에 한 번씩 해독하지 않으면 죽어. 그때마다 사람을 보내서, 그대가 일을 성실하게 하고 있는지 확인하겠다. 만약 결과가 안 좋을 경우엔…….’
그때부턴 살기 위해 왕의 명을 따랐다. 철저히 위조된 신분으로 바이에른 가의 마부가 되었고, 아네트의 발로서 살았다. 중간중간 도박이 너무 하고 싶을 땐 마부의 급여를 모아 도박장으로 향했다. 마음 같아선 다 때려치우고 전처럼 도박장에서 살고 싶었으나, 몸에 주입된 독 때문에 그럴 순 없었다.
벤은 그렇게 10년을 아등바등하며 쥐죽은 듯 살았다. 그리고 기어이 한탕을 해냈다. 하지만 왕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체내에 주입된 독은 해독시켜 주었지만, 그게 다였다.
‘일이 잠잠해질 때까지 숨어있거라. 보상은 그 후에 해 주마.’
벤은 몹시 불만족스러웠지만, 주제에 왕에게 대들 순 없는 노릇이었다. 오히려 살려놓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할 처지였다. 저지른 짓이 있어서 현상 수배범이 된 입장이라, 어차피 아무 데도 갈 수 없었다.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그는 매월 지급받는 생활비로 남몰래 불법 카지노를 다니기 시작했다. 그러다 끝내 아네트에게 덜미를 잡혔다. 하지만 벤은 아직 어떻게든 빠져나갈 길이 있다고 믿었다. 곁눈질로 확인한 아네트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어서 연약해 보였다. 물론 라펠의 과거를 처음으로 알게 된 충격 때문에 그런 것이었지만, 벤은 이 점까진 몰랐다.
벤은 그녀가 납치극을 주도하면서 내심 겁을 먹었겠거니, 넘겨짚었다. 귀하게 자란 예쁜 아가씨가 언제 이토록 나쁜 짓을 해 보았겠는가? 마부로 근무했을 때도 그녀는 별로 까다롭지 않은, 얌전한 주인이었다. 그래서 벤은 열심히 잔머리를 굴렸다.
‘내가 조금만 뉘우치는 체하고, 울면서 빌면 불쌍해서라도 살려줄 거야.’
비록 10년간 아네트의 개인 마부로 일하긴 했지만, 벤은 그녀를 잘 몰랐다. 애초에 마부 따위가 바이에른 가의 공녀와 사적으로 대화할 일이 있을 리 없었다. 심지어 아네트는 외출을 그리 즐기는 편도 아니었다. 그래서 벤은 우둔하게도 아네트를 얕봤다.
‘일단 불쌍한 체하며 동정심을 산 다음, 이곳에서 빠져나가자.’
원래 귀족 아가씨들이란 다 그런 법 아니겠는가? 날 때부터 모든 게 갖춰진 온실 안에서 화초처럼 곱게만 자란다. 그래서 세상 이치도 잘 모르고, 어리석은 우월감에 빠져 저들이 뒤통수를 맞는 줄도 몰랐다.
실제로 아네트의 뒤통수를 때려본 전적이 있는 벤은 자신만만했다. 그는 물오른 연기력으로 얼른 눈물을 쥐어짜며 통곡했다.
“저도 정말 반성하고 있습니다, 아가씨. 진심으로 사죄드립니다. 할 수만 있다면 아가씨의 구두 밑창이라도 핥고 싶은 심정입니다. 이렇게 빌 테니, 제발 목숨만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