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흐으, 내가 왜 이러지… 아, 머리가 아파…….”
벨라가 손을 덜덜 떨며 바닥을 엉금엉금 기었다. 저 멀리서 어린 라펠이 목놓아 우는 소리가 고막을 찢어놓는 듯했다. 지독한 두통이 머리를 쾅쾅 내리쳐서 그녀는 벽을 붙잡고 고통스러워했다. 그러다 끝내 메슥거림을 참지 못하고 속을 게워냈다. 약 기운이 떨어졌을 때 오는 전형적인 쇼크 증세였다.
“우욱!! 우웨엑!! 욱!!!”
벨라가 한 차례 구토를 하는 동안, 벤은 옆에서 얼른 물컵에 마약을 타 넣었다. 그리고 이를 벨라의 입가에 대 주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이를 받아 마신 벨라의 눈이 곧 혼곤하게 풀렸다. 약 기운이 퍼지면서 그녀의 손발이 힘없이 늘어지고, 입가에 타액이 흘렀다. 벤이 그런 벨라를 내려다보며 속삭였다.
“저런, 가엾은 벨라. 넌 지금 아픈 거란다. 여기서 좀 쉬고 있으면 이 오라비가 약을 구해다 주마.”
벤은 짐짓 자상한 체 굴었지만, 자신의 말이 그녀의 귀에 들리지 않을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무기력하게 드러누운 벨라의 곁을 지나 유유히 안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손쉽게 그 안에서 양육비가 든 주머니를 찾아 도박장으로 향했다.
이미 벨라를 중독시킨 이상, 그 이후는 모두 벤의 계획대로 척척 흘러갔다. 그는 벨라의 양육비를 대놓고 착복했다. 그리고 딱 벨라가 쇼크사하지 않을 정도로만 마약을 구해다 주었다. 이미 약의 노예가 된 벨라는 더는 벤을 막을 수 없었다. 그랬다간 본인 또한 마약을 공급받지 못할 테니까.
“약, 약 좀… 고통스러워…….”
그런 생활이 몇 년쯤 지속되다 보니, 벨라도 인간 자체가 달라졌다. 예전의 소박하고 당차던, 그리고 자신의 첫 아이를 아끼던 여자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그녀는 하루의 반을 마약에 취해 무기력하게 늘어져 있었다. 그리고 나머지 반은 미친 여자처럼 굴었다.
어느 날은 환각에 취해 빙빙 돌며 노래를 부르고, 라펠에게 키스를 퍼부으며 예쁜 아이라고 칭찬했다. 그리고 어느 날은 흐느끼며 너 때문에 내 삶이 엉망이 됐다고, 어린 라펠을 ‘나의 작은 불행’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여러 중독 증세 중, 가장 최악이었던 건 약 기운이 떨어진 직후였다.
“약 가져오라고, 씨발! 쓸모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애새끼 같으니라고!! 밥만 축내는 버러지 같은 자식!! 네가 대체 할 줄 아는 게 뭐야? 죽어, 죽어버리라고!!”
악을 쓴 벨라가 닥치는 대로 물건을 집어 던졌다. 불행히도 개중 하나가 라펠의 관자놀이에 제대로 적중했다. 겁먹은 라펠의 작은 얼굴에 붉은 피가 주룩 흘러내렸다. 이를 본 벨라가 흥분한 상태에서도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녀는 라펠의 목이 꺾일 정도로 비틀어 쥔 채, 그의 이마에 난 상처를 살폈다. 물론 라펠을 걱정해서 그런 건 아니었다.
“안 돼, 보이는 데에 상처가 생기면……!! 그 남자가 알아버릴 거야!!”
벨라는 주기적으로 찾아와 라펠을 꼬박꼬박 살피고 가는 왕의 심복을 떠올렸다. 해밀튼이란 이름을 가진 그는 최근 방문할 때마다 벨라를 철렁하게 했다. 그는 꼭 모든 걸 다 아는 사람처럼 굴었다. 저번에 해밀튼이 라펠의 턱에 든 멍을 발견했을 땐 정말로 아슬아슬했었다. 아이가 뛰어놀다 잘못 부딪힌 거라고 둘러댔지만, 해밀튼은 영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
라펠은 정신없이 자신의 얼굴을 살피는 벨라를 올려다보았다. 오늘은 이쯤에서 그만하려나? 라펠의 앳된 얼굴에 희망의 빛이 어렸다. 하지만 아이의 작은 소망은 어른의 잔혹함 앞에서 가차 없이 짓밟혔다.
방구석에서 양동이를 집어 온 벨라가 그것을 라펠의 작은 머리에 씌웠다. 그리고 광기 어린 미소를 지었다.
“좋아, 이러면 얼굴은 안 다치겠지?”
라펠은 자신의 어두워진 시야만큼 깊이 절망했다. 이럴 바엔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양동이 속에서 그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곧 쏟아질 지독한 폭력들을 각오하면서.
최악의 상황에 맞닥뜨리면 사람들은 흔히 이러한 생각을 한다. 여기서 설마 더 나빠지기야 하겠냐고 말이다. 하지만 인생이란 참 불합리한 것인지라, 이미 한계에 도달한 것 같아도 그 이상이 분명 존재했다.
도박, 그리고 마약. 어느 쪽이든 무시무시한 값을 요구하는 것들이었다. 막대한 돈과 인생을 통째로 빨아가는 탐욕스러운 수렁이나 다를 바 없었다. 하물며 두 남매는 이를 병행해서 하고 있었으니, 제아무리 많은 양육비를 받아도 턱없이 부족했다.
“벤, 오빠. 제발 약 좀 더 구해줘. 응? 여기 돈 있으니까.”
이미 중증의 중독자가 된 벨라는 시도 때도 없이 약 기운이 떨어졌다. 자연히 투약 간격은 처음의 네 배 이상 짧아졌고, 필요한 약의 분량은 어마어마한 수준이 되었다.
하지만 벤은 자신의 도박 자금이 훨씬 더 중요했다. 여동생과 어린 조카 따윈 그의 안중에도 없었다. 벤은 약을 구해다 준다며 모든 양육비를 가져갔고, 이를 거의 다 도박에 탕진했다. 그리고 생색내듯 아주 약간의 약만 사다가 벨라에게 전해줬다. 약값이 너무 올라서 어쩔 수 없다는 허무맹랑한 핑계와 함께.
자연히 약이 부족해진 벨라는 늘 지독한 부작용에 시달렸다. 그녀는 ‘약값이 올랐다.’라는 벤의 말을 믿었고, 약을 더 사기 위해 기꺼이 몸을 팔기 시작했다. 한때나마 왕의 사랑을 받았던 그 몸은 이제 뒷골목의 한량들, 그리고 약팔이들에게 아무렇게나 굴려졌다. 그들은 싸구려 마약이나 동전 몇 푼으로도 벨라를 안을 수 있었다.
시간이 갈수록 벨라는 더 심한 마약 부작용에 시달렸다. 환청, 손 떨림, 불안장애, 그리고 지독한 폭력성. 그리고 이를 고스란히 받아내야 하는 건 다름 아닌 라펠이었다. 매일매일이 그에겐 산지옥이나 다름없었다.
“어디서 어미를 그런 눈으로 쳐다봐?! 애초에 너 같은 걸 낳는 게 아니었어!! 지울 수만 있었음 진작에 지웠을 텐데, 빌어먹을 것! 죽어, 죽으라고!!”
라펠은 두 팔로 단단히 방어하며 쏟아지는 발길질에서 몸을 지키려 애썼다. 하지만 그는 아직 소년이었고, 무자비한 폭력 앞에서 무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비명 한 번 지르지 않고 입술을 꽉 깨문 채 독하게 버텼다.
자신이 조금만 더 크면, 조금만 더 검술을 열심히 연마하면…… 언젠가는 벨라에게 맞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것만이 라펠의 유일한 희망이었다.
하지만 이는 너무 안일한 생각이었다.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성장기에 접어든 라펠은 어느 날, 자신을 때리는 벨라의 팔을 잡아 비트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두 번 다신 자신에게 손을 대지 말라며 으름장을 놓았다. 이제 벨라와 지내는 것도 얼마 남지 않았다.
‘해밀튼이 곧 나를 왕궁으로 데려가 준댔어.’
라펠은 이미 벨라를 가족으로도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주기적으로 찾아와 그를 보살피고, 세심하게 신경을 써 주는 해밀튼 쪽이 훨씬 가족 같았다. 라펠은 오직 이 지옥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일념 하나로 죽도록 검을 연습했다. 타고난 재능에 노력까지 더해졌으니, 라펠의 재능은 이제 숨길래야 숨길 수 없을 만큼 명백해져 있었다.
이를 본 해밀튼은 몇 년 전부터 왕에게 라펠을 거둘 것을 청했다. 벨라의 학대와 양육비의 쓰임에 대해서도 넌지시 귀띔했다. 왕 또한 이를 듣고 라펠을 거두는 데 흔쾌히 동의했다. 다만 지금 당장은 라펠을 거두는 게 불가능했다.
‘아직은 때가 아니야, 해밀튼. 그대도 알잖나? 좀 더 기다려야 해.’
셀그라티스가 정략결혼을 한 왕비는 좋은 여자였다. 왕의 불안정한 입지를 가문의 후광으로 굳혀 주었고, 여기에 루드비히라는 왕세자까지 낳아 주었다. 하지만 그녀는 최근 불치병에 걸려 오늘, 내일 하는 중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이 밖에서 낳아 온 사생아를 들일 순 없는 노릇이었다. 그랬다간 당장에 무수한 비난들이 쏟아질 터였다.
그래서 라펠은 왕비가 죽기 전까진 입궁할 수 없는 상황에 처했다. 말이 좋아서 불치병이지, 그녀는 몇 년을 더 살았다. 그리고 라펠의 지옥도 그만큼 더 길어졌다.
하지만 괜찮았다. 이젠 라펠도 모친의 폭력을 힘으로 저지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으니까.
“다음번에 또 이러면 저도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
으름장을 놓은 라펠이 잡고 있던 모친의 팔목을 놓아주었다. 그러자 힘에 떠밀린 벨라가 두어 걸음 밀려나 비틀거렸다. 자신이 항상 만만하게 두들겨 패던 아들에게 역으로 당하자, 벨라의 눈이 휙 뒤집혔다. 중증 중독자인 그녀에겐 이제 그 어떤 이성도, 인내도 없었다. 잔뜩 흥분한 벨라가 떨리는 손으로 철 가위를 집어 들고 라펠의 등으로 달려들었다.
“죽어버려, 이 배은망덕한 자식!!!”
라펠은 뒤에서 들리는 모친의 악 받친 고함에 흠칫 놀라 돌아보았다. 하지만 피하기엔 이미 늦은 후였다. 그나마 몸을 휙 틀었기 때문에, 가위 날이 빗나가서 어깨 위쪽을 베였다. 만약 조금만 늦었더라면 정통으로 목줄기를 찔릴 뻔했다.
어깨를 부여잡은 라펠이 휘청했다. 분노로 눈이 뒤집힌 벨라는 그걸로 만족하지 않고, 가위를 고쳐잡았다. 그리고 다시 한번 라펠을 향해 달려들었다. 마약에 찌든 그녀의 뇌는 단단히 고장나서 정상적인 사고가 불가능했다. 이대로 라펠이 죽으면 영영 양육비가 끊긴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할 만큼.
“죽어!!”
찢어지는 고함이 귓가를 관통하고, 미처 피할 새도 없이 가위가 다시 날아들었다. 라펠은 반사적으로 팔을 들어 막으려 했다. 하지만 깊이 베인 어깨 때문에 반응이 느렸다. 코앞으로 날아든 가위를 보며 라펠은 눈을 질끈 감았다. 이게 자신의 마지막이라니, 믿을 수가 없었다.
“아악!!!”
하지만 비명을 지르며 쓰러진 쪽은 벨라였다. 뜻밖의 상황에 라펠이 놀라 고개를 들었다. 날뛰던 벨라의 가슴께에서 웬 길쭉한 검날이 빠져나와 있었다. 꼼짝없이 죽는 줄 알았던 라펠은 공포로 커진 눈동자를 들어 올렸다. 이게 무슨 상황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벨라의 등 뒤에 서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해밀튼이었다. 라펠의 상태를 살피러 방문했던 그는 뜻밖의 상황에 검을 뽑아 벨라를 저지했다. 이대로 라펠이 죽게 방관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얼굴에 튄 피를 닦으며 혀를 찬 해밀튼이 무심하게 중얼거렸다.
“나 원 참. 이래서 애 보는 건 힘들다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