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직업을 막 바꾼 그녀는 아직 남자를 모르는 몸이었다. 자연히 성병 걱정도 없었다. 이를 철저하게 확인한 왕의 심복, 해밀튼이 그녀를 직접 왕에게 안내했다. 그땐 해밀튼도 아직 현역으로 일하던 시절이었다.
왕은 생각보다 벨라를 마음에 들어 했다. 늘 모호한 미소를 머금고, 은유적으로 돌려 말하는 상류층에 비해 그녀는 더없이 솔직했다. 비록 무식하고 교양 없긴 했지만 나름대로 귀여운 맛이 있었다. 한 마디로 무척 신선한 타입이었다. 여기에 잘 먹어 살까지 찌우니 외모도 그럭저럭 볼 만 했다.
벨라와 초야를 보낸 왕은 그녀를 아예 자신의 천막에 들여놓고 계속 안았다. 이 근방의 저항 세력을 전부 뿌리 뽑을 때까지 말이다. 어차피 꽤 긴 장기전이 되었기 때문에, 차라리 안심하고 안을 수 있는 여자를 들여놓기로 한 것이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곧 벨라의 임신 사실이 발견되었다. 그녀는 여전히 왕의 천막에 머무르고 있었으므로 의심할 여지도 없이 왕의 아이였다. 왕은 벨라를 더욱 잘 먹이기 시작했고, 매일 밤마다 그녀를 조심스럽게 안았다. 저항 세력과의 지긋지긋한 전투가 얼추 막을 내릴 때까지 말이다.
“그녀를 어찌하시겠습니까, 폐하?”
해밀튼이 떠날 준비를 하는 왕의 뒷모습에 대고 물었다. 셀그라티스가 이곳에 온 지도 벌써 8개월이나 흘렀다. 르탄의 저항 세력들은 거의 다 도륙되었고, 더는 수도를 비워 둘 수 없었다. 그렇다면 이제 벨라 마치의 처우를 결정할 때도 되었다.
해밀튼의 질문에 흘끗 뒤를 돌아본 왕이 대꾸했다.
“아이는 낳게 해. 그리고 매월 넉넉한 양육비를 지급해 줘. 평민을 궁으로 데려갈 순 없으니, 이쯤에서 헤어지는 게 낫겠지. 어차피 난 정혼자도 있는 몸이니까.”
지극히 왕 다운 결정이었다. 셀그라티스는 지금껏 여자를 안긴 했지만, 여러 코르티잔들을 돌려 가며 안은 게 전부였다. 이처럼 한 여자를 천막 안에 들여놓고 계속 살을 맞댄 건 처음이었다. 한 마디로 벨라는 왕의 첫 정부나 다름없었다.
따라서 해밀튼은 혹 왕이 벨라에게 정이 든 나머지, 현명하지 못한 선택을 할까 봐 걱정스러웠다. 그는 아직 취임 초기였고, 왕권이 많이 불안정한 시기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왕은 자신의 의무를 잊지 않았다. 이에 안심한 해밀튼이 막 돌아서려던 찰나였다.
“아, 그리고 간혹 그대가 아이의 상태를 봐 준다면 고맙겠군. 사생아지만 그래도 명색이 내 첫 자식이니까 말이야. 잘 지내는지 정도는 알고 싶군.”
만약 왕의 그 발언이 아니었다면, 지금의 라펠은 존재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당시엔 해밀튼도 아직 젊었을 시기였으므로 자신의 업무에 꽤 의욕적이었다. 그는 주기적으로 성실하게 벨라 마치를 찾아갔고, 그녀에게 양육비를 전달하며 라펠의 상태를 살폈다. 맨 처음 라펠의 성별을 확인하고 그의 이름을 지어 준 것도 해밀튼이었다.
만약 그가 아니었다면, 라펠의 재능은 채 발휘되기도 전에 빈민촌의 먼지 속에서 썩어버렸을 것이다. 아니면 모친의 손에 의해 살해당했거나.
라펠의 모친이었던 벨라 마치는 운이 무척 좋은 축에 속했다. 처음으로 몸을 팔게 된 상대가 무려 왕이었으니, 변두리 빈민촌 출신의 창녀에겐 기적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고작 8개월간 몸을 판 대가로 매월 두둑한 양육비를 받게 되었다. 말이 좋아서 양육비지, 이 빈민촌에선 대부호나 다름없는 독보적인 금액이었다. 사생아일지라도 왕의 아이를 낳은 여자에겐 응당 주어져야 할 돈이기도 했다.
그러니 이론상으론 벨라는 행복해야 했다. 아무 일도 하지 않아도, 그저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매월 넉넉한 돈이 들어왔으니까. 이제 남은 과제라곤 그저 아이의 양육에 모든 정성을 기울이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늘 이론과는 다르게 흘러가는 법이었다.
“벨라, 진짜 이번만이야. 딱 한 번이면 돼. 정말로 이번만 도박 대금을 갚아주면 손 털게. 두 번 다신 죽을 때까지 도박을 하지 않을 테니까, 제발…….”
벤은 어릴 땐 벨라가 몹쓸 짓을 당하지 않게 지켜주던 든든한 오라비였다. 하지만 그녀가 알던 그 혈육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지금의 벤은 오히려 벨라의 가장 무거운 짐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친구를 따라 몇 번 도박장에 나가 본 벤은 완전히 푹 빠져버렸다. 그는 매번 도박장에 커다란 빚을 졌고, 이를 갚는 건 자연히 벨라의 몫이 되었다. 왕가에서 나오는 양육비는 매월 들어오기 무섭게 도박장으로 빨려 나갔다. 그리고 믿는 구석이 생긴 벤은 더더욱 도박에 빠져들었다. 그야말로 악순환이었다. 아직 어린 라펠을 안은 벨라가 떨리는 목소리로 벤을 책망했다.
“저번에도 이랬잖아, 벤. 대체 어쩌려고 이래?! 계속 이렇게 살 순 없어. 도박을 끊지 못하면 다 죽는 거야, 알아? 오빠도, 나도, 라펠도 다 죽는다고!!”
“나도 알아, 벨라. 정말 미안해. 진짜 이번만… 설마 날 죽게 내버려 둘 생각은 아니지, 응? 여신께 맹세코 이게 마지막이니까……!!”
벨라는 참담함에 눈을 감았다. 애걸하는 벤의 몰골은 이미 몇 차례 얻어맞은 듯 참담했다. 벨라가 그의 버릇을 어떻게든 고쳐보려고 대금 지급을 거절했었기 때문이었다. 이번이 마지막 빚 독촉이었고, 벤의 뒤에선 도박장에서 나온 가드들이 히죽대며 이쪽을 보고 있었다.
지금 벨라가 도박 빚을 대신 갚아주지 않으면, 저들은 벤을 끌고 갈 터였다. 그리고 죽도록 팬 후 노예로 팔아넘기거나, 배를 갈라 내장을 적출해 팔든지 하겠지. 하나뿐인 혈육을 그렇게 되도록 놔둘 순 없는 노릇이었다. 벤이 어릴 때 자신이 성폭행당하는 걸 막기 위해 몇 번이고 싸워서 지켜줬던 걸 생각하면 더더욱.
안으로 들어간 벨라는 결국 돈주머니를 들고나와 가드들에게 던졌다. 그리고 치를 떨며 으름장을 놓았다.
“가져가, 그리고 두 번 다신 내 오라비를 도박장에 출입시키지 마.”
“어유, 우리도 그러고 싶어. 하지만 제 발로 개처럼 기어들어 오는 걸 어찌 막겠어?”
돈주머니를 받아든 가드들이 낄낄대며 벨라를 조롱했다. 그들은 다음 달에도 그녀에게서 돈을 받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도박중독자들이란 모름지기 손목이 잘려도 발로 대신 주사위를 굴리는 인종이었으니까.
돈을 받았으니 이곳에 볼일은 없었다. 돌아서려던 가드 중 하나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벤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의 주머니에 뭔가를 찔러주며 속삭였다.
“여동생이 점점 까칠해지네. 이러다 정말 돈을 안 주면 피차간에 곤란해지지 않겠어? 그러니 이걸로 잘 꼬드겨 보라고. 내 말 무슨 말인지 알겠지?”
가드가 찔러 준 주머니 속 물건을 꺼내 본 벤의 눈이 커졌다. 아무렇게나 접힌 종이 안에 든 새하얀 가루는 익숙한 것이었다. 싸구려지만 그만큼 중독성이 강한 마약이었다. 한번 빠져들면 점차 이성을 상실하고, 나중엔 짐승처럼 약만 찾다 쇠약해져 죽는 것이다.
이런 마약을 친동생에게 쓰라니, 정말로 악마 같은 놈들이 아닐 수 없었다. 특히나 벨라가 젖을 뗀 지 얼마 안 된 아이까지 있는 몸임을 감안해 보면 더더욱.
‘이건 좀 아니지.’
아직 미약하게나마 양심이 남은 벤은 그걸 도로 주머니에 넣었다. 적당히 기회를 봐서 어느 중독자에게라도 팔아넘길 작정이었다. 하지만 그 결심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제길, 또 잃었잖아! 대체 왜 나만 이렇게 안 풀리는 거지?”
테이블을 주먹으로 쾅 내리친 벤이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카지노에선 늘 교묘하게 그에게 약간의 돈을 따게 해 주었다. 그리고 거기에 맛을 들인 벤이 배팅액을 올리면, 기다렸다는 듯 이를 탈탈 털어갔다. 물론 돈이 다 떨어진 벤에게 친절하게 돈을 융통해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는 비록 빈털터리였지만, 그 대신 빚을 갚아 줄 돈줄이 따로 있었으니까.
“어이, 벤! 오늘은 여기까지라고. 도박을 더 하고 싶으면 알지? 돈을 들고 와.”
딜러가 벤의 앞에서 카드들을 쓸어가며 이죽거렸다. 카지노에서 정한 융자액의 한계치까지 빚을 졌단 뜻이었다. 잘 감지도 않아서 떡진 머리칼을 벅벅 긁은 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도박을 더 하려면 벨라에게서 돈을 받아와 융자를 갚아야 했다. 그녀의 집으로 향하는 벤의 발걸음이 점차 무거워졌다.
“하, 이번에도 쨍알쨍알 시끄럽겠군.”
벨라는 이번에도 돈을 순순히 주지 않을 터였다. 울고, 고함치고, 그를 때리며 제발 그만두라고 갖은 설교를 해 대겠지. 곧 다가올 뻔한 상황을 떠올린 벤이 짜증스레 침을 퉤 뱉었다. 도박에 더 깊이 빠져들수록 그의 양심은 점차 희박해져만 갔다. 예전에 여동생을 지키기 위해 몸을 던져 싸웠던 그 소년은 이미 겜블 테이블 밑에 묻혀버린 지 오래였다.
벤은 이제 도박을 할 수만 있다면 다른 건 아무래도 좋았다. 혈육인 벨라마저도 그저 도박을 지속할 수 있게 해 주는 수단에 불과할 따름이었다. 그녀의 집 앞에서 발걸음을 멈춘 벤이 속으로 투덜거렸다.
‘이젠 애걸하는 것도 지쳤어, 이기적인 년 같으니라고! 내가 저 어릴 적에 얼마나 잘 해줬는데! 이제 와 나에게 돈을 주는 게 아까운 모양이지?’
사람의 마음이란 게 참 간사했다. 어느새 벨라에 대한 고마움마저 잊은 벤은 적반하장이 되어있었다. 자신이 그녀를 지켜주지 않았다면 감히 제깟 게 어찌 왕에게 몸을 팔았겠는가? 이미 성병 두세 개쯤은 걸려서, 왕이 더럽다고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게 틀림없었다. 그러니 벨라의 양육비엔 엄연히 자신의 지분도 들어있었다. 자신은 그걸 쓸 권리가 있었다!
‘어쩔 수 없지. 나도 이러고 싶진 않았는데, 네가 다 이렇게 만든 거야.’
품속에서 굴러다니던 마약을 꺼낸 벤이 눈을 빛냈다. 그날부터 그는 차근차근 벨라를 중독시켰다. 마약 없인 단 하루도 살지 못할 만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