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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화





















“아니, 소인인들 어찌 폐하의 깊은 뜻을 알겠습니까? 저도 알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습니다! 폐하께서 지시한 것만 아니었다면 저 또한 아가씨께 감히 그런 짓을 저지르진 않았을 겁니다요. 정말입니다!!”



아네트는 비굴하게 자신의 눈치를 보는 벤을 내려다보았다.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사실을 다 말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눈을 희번덕거리며 자신의 빈틈을 찾는 그의 표정이 역겨웠다. 저토록 비열한 자가 라펠과 같은 피를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뭔가 이상해. 도무지 왕의 의중을 짚어낼 수가 없어.’



애초에 왕은 왜 벤 마치를 선택했을까? 아네트는 미간을 찌푸렸다. 만약 왕이 마음만 먹었다면, 보다 ‘전문적인’ 사람을 고용해 아네트를 밀어낼 수도 있었다. 그리고 그런 자들은 아주 깨끗하게 뒷청소를 해서, 아네트에게 그 어떤 실마리도 주지 않았을 게 틀림없었다.



하지만 왕은 구태여 벤 마치를 자신의 도구로 선택했다. 한때나마 그가 안았던 정부의 혈육을, 그리고 라펠의 외삼촌을. 이 허술한 도박꾼은 끝내 제 버릇을 개 주지 못해서 불법 카지노를 돌아다니다 이렇듯 붙잡혔다. 왕의 선택치곤 지나치게 나쁜 패였다.



‘분명히 벤 마치를 선택한 이유가 따로 있을 텐데.’



지금 벤 마치가 살아 있는 것만 봐도 이상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설령 왕이 잠깐 미쳐서 벤 마치를 이용했다 치자. 그렇다면 그 후 어떻게든 ‘뒷정리’를 했었어야 했다. 벤 마치를 바다에 던져버리든, 도박장 테이블 밑에 묻어버리든 했었어야 했단 말이다.



하지만 왕은 구태여 벤 마치를 꾸역꾸역 살려서 숨겨 놓았다. 위험할 걸 뻔히 알면서도.



아네트는 눈가를 찡그리며 벤 마치를 내려다보았다. 그에게서 좀 더 많은 진실을 뜯어내고 싶은데, 지금이 적기일까? 고문을 책으로 배운 아네트는 뭐부터 시작해봐야 할지 고민했다. 하지만 라일린이 한발 빨랐다. 그는 자신의 즐거움을 놓칠 마음이 없었으니까.



“아직도 잔머리를 굴리는 걸 보니 살아 나가긴 싫은 모양이지? 그럼 맛보기를 좀 보여주지.”



상냥한 미소를 띤 라일린이 거침없이 망치를 휘둘렀다. 경험상 이럴 땐 상대가 뱃속까지 다 토해낼 만큼 겁을 주는 편이 좋았다. 그리고 인간에게 공포심을 심어주는 덴 역시 육체적인 고통만한 게 없는 법이었다.



이를 잘 아는 라일린은 정확히 벤의 어깨를 노렸다. 죽을 위험이 없으면서, 가장 고통이 극심한 부위 중 하나였다.



“크아악!!”



망치를 별로 세게 휘두른 것 같지도 않은데, 벤의 어깨에서 ‘우둑!’ 하는 소리가 났다. 어찌나 고통스러웠던지 벤이 눈을 까뒤집으며 몸을 덜덜 떨었다. 단번에 어깨 관절이 박살나고, 부서진 뼈가 살갗을 파고들었다. 그 고통은 말 그대로 끔찍한 수준이었다.



“저런, 아직 한 대 더 남았어. 벌써 엄살 피우면 곤란하다고.”



거짓말이었다. 여기서 부서진 어깨 관절을 한 번 더 때리면 쇼크사가 올 수도 있었다. 하지만 라일린은 또 때릴 것처럼 망치를 고쳐 쥐고, 경련하는 벤의 몸을 붙들었다. 그의 손이 높이 올라가는 순간, 벤이 눈물 콧물로 범벅이 된 채 흐느끼며 빌었다.



“다, 다 말하겠습니다!! 다!! 제발, 하지 마세요!! 뭐든 다 할 테니까!!!”



라일린이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망치를 내렸다. 어차피 때릴 생각은 없었지만, 벤 마치는 포기가 빨라도 너무 빨랐다. 그래서 구석에 몰아붙이고 괴롭히는 재미가 덜했다. 만약 벤이 이런 라일린의 속내를 알았다면 거품을 물고 발광했을 터였다. 다행히 남의 생각을 읽는 재주가 없었던 벤은 고통으로 흐느끼며 줄줄 불었다.



“제가, 제 쪽에서 폐하를 찾아갔었습니다!! 원래는 돈을 조르러 찾아간 거였지만, 그때 폐하께서 제 도박 빚을 갚아주는 조건으로 이 일을 제안하셨습니다. 그래서 옳지 않은 일임은 알지만, 도무지 방법이 없어서… 그래서……!!”



고작 도박 빚과 제 미래를 교환 당한 아네트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팔짱을 낀 그녀가 문득 벤의 진술에서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눈썹을 찌푸린 그녀가 벤에게 되물었다.



“감히 폐하께 돈을 조르러 찾아갔다고? 그대가 무슨 자격으로? 애초에 폐하께선 그대를 만나 주지도 않았을 텐데.”



아네트의 의문은 합당했다. 제아무리 도박에 눈이 뒤집혔다 한들, 고작 평민 따위가 노름 대금을 달라고 왕을 찾아갈 수 있을 리 없었다. 뭔가 믿는 구석이 있는 게 아니라면 말이다.



과연, 아네트의 질문은 제대로 된 곳을 찌른 모양이었다. 벤이 고통으로 신음하면서도 우물쭈물 입을 다물었다. 이 상황에도 말하기 싫어하는 기색이 역력한 눈치였다. 그러자 연골 부수는 맛을 알아버린 라일린이 생긋이 웃으며 망치를 들어 올렸다. 이를 본 벤이 발작하듯 외쳤다.



“여, 여동생의 목숨 빚 때문입니다요!! 그것 때문에 폐하께 작은 위로금을 받으려 했던 것뿐입니다!! 이 몸이 아무리 미천한 평민이라지만, 친혈육이 죽었는데 그냥 넘어갈 순 없잖습니까?!”



“그게 무슨 소리지? 위로금이라니? 폐하께서 그대의 동생을 죽이기라도 했단 얘기인가?”



아네트는 냉정하게 대꾸했지만, 속으론 가슴이 쿵쿵 뛰었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벤의 여동생이 라펠의 친모임을 눈치챘다. 이럴 줄 알고 셀레스틴을 위쪽에 남겨놓고 온 게 천만다행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벤은 두려움에 끅끅거렸다. 지금부터 고백할 과거의 추악함이, 죄악들이 부끄러워 적당히 숨기려 해도 도무지 불가능했다. 그때마다 라일린이 귀신 같은 눈치로 그를 윽박지르며 적당한 ‘손질’을 가했기 때문이었다.



벤의 입에서 아네트가 전생엔 미처 몰랐던 사실들이 하나둘 흘러나왔다. 물론 그 안엔 라펠의 과거도 함께 포함되어 있었다.









라펠의 친모 이름은 벨라였다. 벨라 마치. 그녀는 델티움 수도 출신은 아니었다. 오히려 변두리 지역 출신에 가까웠다. 본래라면 평생을 가도 수도에 머무는 왕과 만날 일이 없는 입장이었다.



빈민촌에서 태어난 벨라는 어릴 때부터 오라비와 같이 구걸을 했다. 다행히 오라비가 늘 곁에 붙어 있었던 덕에, 여자의 몸으로 구걸을 하면서도 몹쓸 짓을 당한 적은 없었다. 덕분에 무사히 성년이 된 벨라는 한 허름한 음식점에 종업원으로 취업했다. 어차피 이제 구걸로는 먹고 살기 어려웠으니까, 뭐라도 일을 해야 했다.



벨라는 매일 주방과 홀을 오가며 말 그대로 손등이 부르트도록 일했다. 하지만 하루에 열여섯 시간씩 일하면서도 두 끼 먹는 것조차 힘겨웠다. 빈민촌의 일상이란 그런 것이었다. 너무 못 먹은 나머지 생리마저 멈춘 어느 날, 벨라는 진지하게 고민했다.



‘이럴 바엔 차라리 몸을 팔까?’



어릴 때부터 빈민촌에서 살아온 벨라는 도덕관념이 희미했다. 그녀의 세계에선 이게 당연한 취업 진로 중 하나일 뿐이었다. 오히려 외모나 몸매가 너무 떨어져서, 몸을 팔고 싶어도 못 파는 여자들이 더 많았다. 다행히 벨라는 외모 하나만큼은 그럭저럭 봐줄 만한 편이었다.



그래서 벨라는 끼니라도 제때 먹을 수 있도록 직업을 바꾸기로 마음먹었다. 만약 잘 나가는 창녀가 된다면, 하루 세끼에 디저트까지 꼬박꼬박 챙겨 먹을 작정이었다. 참으로 소박하기 그지없는 목표였다. 본래라면 막노동하는 일꾼들을 상대로 몸을 팔았을 벨라가 왕을 만나게 된 건 순전 우연이었다.



그녀가 태어난 지역은 약 200년 전, ‘르탄’이라는 나라의 수도였다. 하지만 델티움에선 오랜 전쟁 끝에 기어이 르탄을 정복, 합병시켰다. 실로 대단한 성과였다. 그러나 한 나라를 완전히 흡수하는 데 200년이란 시간은 너무 짧았다. 옛 르탄의 정체성을 잊지 못하는 자들이 끊임없이 저항군으로 봉기했고, 델티움은 이를 진압하느라 골머리를 앓았다.



그건 이번에 새로 취임한 셀그라티스 왕 또한 마찬가지였다.



“빌어먹을 르탄 놈들, 하여간 포기를 모르는군!”



당시 셀그라티스는 아직 청년이라 혈기왕성했던 시기였다. 그는 이를 득득 갈며 르탄의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해 외곽으로 직접 출정했다. 라펠의 친부인 만큼, 셀그라티스 또한 검에 출중한 편이었다. 다만 검에 모든 재능을 투자하기엔 왕관의 무게가 너무 무거웠을 뿐.



왕은 훈련도 제대로 받지 못한 르탄의 저항 세력들을 전부 도륙하다시피 했다. 하지만 지형이 너무 불리했다. 이 주위 산악지대를 잘 아는 저항군들은 약 올리듯 치고 빠지길 반복했다. 덕분에 왕의 출정은 생각보다 긴 장기전이 되고 말았다.



전투와 살육은 잘 교육받은 인간도 짐승으로 되돌려 놓는 경향이 있었다. 폭력은 때론 성적인 충동과 닮은 구석이 있어서, 젊은 피를 끓어오르게 했다. 어차피 왕이라 누구든 취할 수 있었던 셀그라티스는 자연히 여자를 원했다.



하지만 이곳은 델티움의 수도가 아니었고, 그가 마음껏 안을 수 있는 고급 코르티잔들이 없었다. 어차피 이런 전장의 외곽에서 안을 수 있는 여자란 한정적이기 마련이었다. 혀를 찬 셀그라티스는 수하에게 명했다.



“어쩔 수 없지. 아쉬운 대로 창녀라도 데려와. 성병이 없는, 깨끗한 여자여야 해.”



누구나 예상했듯이, 이때 수하가 데려온 여자가 다름 아닌 벨라 마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