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촤악―!!
“어푸, 푸후웃!!”
사람은 얼굴에 물이 끼얹어지면 자다가도 소스라치기 마련이었다. 고작 얼굴을 적실 수준의 양이었지만, 이상하게도 익사할 것 같은 아득한 공포감이 밀려오는 것이다. 벤 마치는 너무 놀란 나머지 숨을 헐떡이며 머리를 마구 털었다. 그래 봐야 머리칼 한 올 남아 있지 않은 민대머리였지만 말이다.
“일어나셨군.”
벤을 앉힌 의자에 한쪽 부츠를 올린 라일린이 꼭 악마처럼 웃었다. 그는 즐거운 기색을 감추지 않으며 눈앞의 벤 마치를 바라보았다. 세크리트 길드의 주인인 그가 이렇듯 ‘현장’을 직접 뛰는 건 오랜만이었다. 그래서인지 귀찮지 않고 오히려 흥이 났다. 그는 새로 물들인 푸른 머리칼을 쓸어넘기며 부드럽게 읊조렸다.
“벤 마치. 48세. 가명은 이반 스미스. 신분을 위조하고 바이에른 가의 마부 중 하나로 잠입, 근 10년 8개월을 근무했었지. 그리고 비번이던 날을 이용해 왕궁에서 돌아오던 셀레스틴 키어스를 납치, 그 죄를 바이에른 공녀에게 뒤집어씌웠지. 내 말이 틀렸나?”
벤 마치는 그제야 제가 함정에 빠진 걸 깨달았다. 그것도 아주 단단히 작정한 함정임이 틀림없었다. 그는 반항적인 눈으로 라일린을 노려보며 입을 꾹 다물었다. 하지만 얼굴에 필사적인 기색이 스쳐 지나가는 것으로 보아, 위기감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그야 그럴 수밖에 없었다. 라일린의 뒤에서 이쪽을 바라보는 금발 미인은 다름 아닌 자신의 옛 주인이었다. 그것도 아주 요란하게 뒤통수를 친 전적이 있는. 그녀는 본디 온화한 주인 아가씨였지만, 지금은 아주 차가운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빛을 본 벤은 몸을 부르르 떨며 어떻게든 밧줄을 풀어 보려고 애썼다. 왕세자비가 코앞이었는데, 자신 때문에 미끄러졌으니 그 원한이 얼마나 크겠는가? 당장이라도 그녀가 자신을 죽이라고 명할 것 같았다. 하지만 다 부질없는 몸부림일 뿐이었다.
“한눈팔 여유도 있는 모양이군. 너무 긴장하진 마, 알고 싶은 걸 다 알면 풀어줄 수도 있으니까.”
그 말을 하는 라일린의 눈은 희열로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그는 예쁜 얼굴과 달리, 다소 가학적인 기질이 있었다. 대체 어디서 꺼냈는지 손에 고기 다지는 망치를 든 라일린이 한 걸음 바짝 다가섰다. 당장이라도 벤을 다진 미트볼로 만들어 버릴 기세였다. 그러자 새파랗게 질린 벤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대, 대체 왜 이러십니까?! 전 그저 시키는 대로 했을 뿐입니다! 제 뒤에 계신 분이 누군지 나으리들께선 아마 상상도 못 하실 테지요!! 그분께서 아시면 이곳의 그 누구도 무사하지 못할 겁니다!! 그러니 어서 이걸 풀고, 저를 놓아…… 커헉!!”
“이런, 미안하군. 너무 시끄러워서 그만.”
벤의 정강이를 아프게 걷어찬 라일린이 정말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래서 더 악마처럼 보였다. 라일린은 심지어 ‘다음번엔 망치란다.’하고 암시하는 듯, 손에 쥔 망치를 빙글 돌려 보이기까지 했다. 위기감을 느낀 벤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효과적인 기선 제압에 성공한 라일린이 그를 내려다보며 씩 웃었다.
“그리고 애당초 왜 이쪽에서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하는지 의문이군. 설마 시시한 복수나 하려고 네놈을 붙잡아 왔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뭐, 그것도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지만.”
의미심장한 라일린의 말에 벤이 입을 크게 벌렸다. 정말로 그들이 뭔가 알고 있는지, 아니면 자신을 떠보는 건지 의심하는 듯한 얼굴이었다. 이를 본 라일린이 허리를 굽혀 벤의 귓가에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못 믿는 얼굴이네? 그렇다면 어디 보자… 힌트를 하나 줘 볼까? 네놈의 후원자는 아마 이 델티움에서 가장 고귀한 피의 소유자겠지. 안 그래?”
놀란 벤의 눈이 찢어질 듯 크게 떠졌다. 이놈들은 정말 모든 걸 다 알고서 저를 심문하는 게 틀림없었다.
라일린이 어깨를 으쓱하며 유려하기까지 한 어조로 벤을 몰아붙였다.
“말했듯이 시시한 복수나 하려고 네놈을 붙잡아 온 게 아니라니까. 이쪽도 알 건 다 알고 있어. 다만 그 자세한 내용을 네놈의 입으로 좀 더 듣고 싶을 뿐이지. 그러니 협조 좀 해 주실까?”
벤의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려오기 시작했다. 자신이 왕을 배신하고도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까? 그는 정치인답게 비정한 사내였다. 나중에 자신을 유용하게 쓸 곳이 있어 살려두었다곤 하지만, 마음이 언제 바뀌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만약 여기서 자신이 입을 연다면 왕은 분명 이를 용서치 않을 것이다.
벤은 어떻게든 이 위기를 빠져나가기 위해 머리를 굴리려고 해 보았다. 하지만 이를 눈치챈 라일린이 나긋한 어조로 그를 겁박했다.
“잘 판단하는 게 좋을 거야. 이곳은 보다시피 숨겨진 공간이라 네놈이 죽더라도 아무도 몰라. 신의 따위를 지키겠답시고 죽어봐야 그 누가 알아줄까? 어떤 선택이 네 명줄을 부지할 수 있을지 고민해 보라고.”
떨리는 벤의 눈동자가 매달리듯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라일린의 말이 옳았다. 이곳은 완벽히 숨겨진 비밀 공간이었고, 자신은 이곳에서 아무도 모르게 죽어갈 것이다. 하지만 시체조차도 발견되지 않겠지. 몸이 썩어들어가서 백골만 남고, 그 위로 먼지가 뿌옇게 덮여 결국은 풍화될 때까지도.
겁에 질린 벤이 숨을 헐떡이기 시작했다. 어두컴컴한 지하의 벽들이 사방에서 자신을 조여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는 애원하듯 아네트를 바라보았지만, 그녀의 차가운 눈빛에 이윽고 희망을 잃었다. 애초에 분장까지 해 가며 철저한 계획하에 자신을 잡으려고 했던 이들이었다. 근데 이제 와 동정만으로 놓아줄 리 없었다.
사냥감의 의지가 수그러드는 것을 감지한 라일린이 보란 듯 망치를 휘둘렀다. 그리고 강도라도 테스트해 보듯 벽 옆면을 두들겼다. 그러자 딱 소리와 함께 벽의 표면이 패이고, 흙먼지가 우수수 쏟아져 내렸다.
라일린의 시선이 이번엔 벤의 무릎에 가 닿았다. 그 순간, 벤은 곧 자신의 무릎에서도 같은 현상이 벌어질 것임을 깨달아 버렸다. 부서진 벽을 바라보는 벤의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왔다.
“자, 생각할 시간은 충분히 줬겠지? 그럼 이제 본격적으로 놀아 보자고.”
라일린이 작게 콧노래까지 부르면서 다가왔다. 묶여있는 의자 위로 그의 그림자가 불길하게 드리워졌다. 그 순간, 벤은 말 그대로 오금이 저렸다. 어차피 신의와는 거리가 먼 도박꾼 출신이었던 그는 눈을 질끈 감으며 외쳤다.
“말, 말하겠습니다!! 묻는 대로 다 대답할 테니, 제발 살려주십시오!!!”
원하던 말이 나왔건만, 라일린의 얼굴엔 실망한 기색이 어렸다. 그는 작게 ‘칫.’ 하고 중얼거리기까지 했다. 이 재미있는 여흥이 벌써부터 끝난 게 아쉬운 눈치였다. 어쨌든 본인의 협조를 받게 되었으니 지금부턴 그가 아는 모든 걸 탈탈 털어낼 시간이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벤 마치에게 이 일을 사주한 배후는 역시 셀그라티스 왕이었다. 왕궁의 시종들이 벤을 도와 셀레스틴을 납치한 것도, 아네트에게 불리한 증언을 한 것도 그것 때문이었다. 태양 같은 왕의 명인데 어찌 이를 거부할 수 있겠는가?
‘왜 전생엔 미처 폐하를 의심하지 못했을까.’
아네트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럴 만도 한 것이, 왕은 말 그대로 비정하리만큼 완벽한 일 처리를 선보였다. 납치사건에 연루된 시종들은 이 사건이 종결된 후, 왕궁 지하감옥에 수감되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시종들의 이후 소식에 대해 들은 자가 없었다. 심지어 함께 일을 도모했던 벤 마치조차도 그들의 소식을 몰랐다.
그러나 아네트는 이제 그들이 어찌 되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녀에겐 아주 유능한 정보원이 있었으니까. 라일린은 넌지시 일러주었다. 지금 왕궁의 지하감옥에 갇힌 수감자는 아무도 없노라고 말이다.
‘다만 몇 달 전 새벽, 간수들이 비밀리에 시체 몇 구를 들고나와 마구간 밑에 파묻는 걸 본 사람이 있댔지.’
그 시체들이 누굴지는 굳이 안 봐도 알 것 같았다. 아네트는 차라리 그편이 더 왕 다운 처사라고 생각했다. 사냥이 끝나면 사냥개를 삶아 먹는 경우가 이 정치계에선 흔했으니까. 오히려 그렇게 하지 않는 쪽이 굶주린 사냥개에게 목덜미를 물리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왕은 대체 왜 벤 마치를 살려둔 걸까? 아네트는 그 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미간을 찌푸린 그녀가 벤에게 직접 하문했다.
“좋아. 시종들은 왕을 위해 일하는 자들이니, 명을 따르는 게 당연해. 하지만 그대는? 대체 왜 그런 위험한 짓을 했지? 내 마부가 되기 전엔 그루티 구역에서 잡일꾼으로 일했었다던데.”
“존엄하신 폐하께서 지시하시는데, 제가 어찌 이를 거부하겠습니까?! 저야 그저 시키는 대로 할 뿐입지요, 암요.”
아네트가 자신의 조카며느리란 사실을 꿈에도 모르는 벤이 머리를 꾸벅꾸벅 조아렸다. 그는 단순하고 천박한 도구일 뿐이었고, 아무도 그에게 자세한 내막 따윈 일러주지 않았다. 벤이 아는 건 자신의 조카가 출세해서 귀족이 되었다, 딱 거기까지였다.
벤은 자신이 누명을 씌워 왕세자비가 되지 못한 아네트가 그 후 어떻게 되었는지 까맣게 몰랐다. 설마하니 그녀가 자신의 조카인 라펠과 결혼해 그 아내가 되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때 그는 왕궁에서 탈옥하여 잠적 중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네트는 벤이 자신의 시외숙부란 사실을 알면서도 개의치 않았다. 애초에 먼저 해를 입혀온 쪽은 그였다. 어차피 라펠 또한 벤을 친인척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으니, 자신도 손속에 사정을 둘 이유는 없었다. 그녀는 다시 벤에게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다.
“그러니까 왜 하필 폐하께서 그대에게 그런 일을 시켰냐는 말일세. 내가 궁금한 건 그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