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아까까지 기세등등하던 라펠의 입이 콱 틀어막혔다. 감정 교류도, 사랑도 처음 해 보는 라펠이 ‘하늘만큼 땅만큼 사랑해!’ 따위의 멘트를 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아네트의 말은 그에게 너무 어려운 수수께끼와도 같았다. 라펠은 그녀가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질문을 하는지 알 수가 없어 혼란스러웠다.
아네트는 흔들리는 그의 짙푸른 눈동자를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한 마리 야수처럼 날카롭고 아름다운 눈매. 비록 타인과 교류를 하지 않아 제멋대로에 고집불통이지만, 그만큼 약아빠지게 굴지도 못하는 사람. 전생의 아네트가 멀쩡했을 땐 그토록 화를 내고 짜증을 부렸으면서, 막상 앓아누우면 그 앞에서 큰소리 한번 못 치고 병수발을 들던 남자. 그리고 죽을 때까지 옆을 지켜 준, 유일한 사람.
비록 아네트를 사랑하진 않았어도, 라펠의 인생에서 여자란 오직 그녀 하나뿐이었다. 그 외엔 다른 누구도 없었다. 이를 누구보다 잘 아는 아네트의 눈빛이 물끄러미 그의 얼굴을 훑었다. 언제 봐도 참 아름답고 외로운 얼굴이었다.
‘이런 남자를 어떻게 싫어할 수 있겠어.’
라펠이 자신을 좋아한다고 말한 순간, 아네트는 가슴이 뭉클했다. 설령 그게 이성적인 감정이 아닌, 그저 가까운 지인으로서의 호감이라 해도 그랬다. 회귀 후 홀로 상처받고, 마음고생 한 과거를 보상받는 듯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당신을 좋아한다.’ 정도의 애매한 고백으론 부족했다. 자신이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랬다.
‘우리가 이런 상황만 아니었다면 참 좋았을 텐데.’
아네트의 입가에 쓴웃음이 걸렸다. 그녀는 어제 밤새도록 벤 마치를 심문했다. 그리고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많은 걸 알게 되었다.
그녀가 판단하기에, 만약 라펠의 감정이 어중간한 것이라면 차라리 이쯤에서 접는 게 나았다. 자신의 앞길에 말려들지 않게. 그리고 이 모든 일을 끝마친 후 홀가분하게 그를 떠날 수 있게끔 말이다.
마음을 다잡은 아네트가 손을 뻗어 그의 조각처럼 매끈한 뺨을 쓸어내렸다. 그러자 라펠이 긴 속눈썹 밑으로 혼란스러운 눈빛을 한 채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효과적으로 그의 시선을 끌어온 아네트가 나긋하게 말했다.
“미안해요, 이런 대답밖에 할 수 없어서. 하지만 난…… 당신이 과연 날 얼마나 좋아할지 의문이에요. 봄날의 바람처럼 잠시 스쳐 지나가는 감정에는 응할 수 없어요. 지금 내 상황이 좀 복잡하거든요. 그러니 부디 신중하게 생각해 줘요.”
“신중하게 생각하라니, 그게 무슨 소리지?”
다급하게 아네트의 손목을 붙잡은 라펠이 재차 물었다. 그의 얼굴은 화가 난 것처럼 매서웠지만, 짙푸른 눈동자는 묘하게 울 것처럼 떨리고 있었다. 이를 본 아네트가 가만히 되물었다.
“라펠. 당신은 과연 당신의 우선순위에…… 나를 첫 번째로 올려줄 수 있나요?”
“우선순위?”
“네. 당신의 가족보다 더, 명예보다도 더요. 당신은 저를 그 정도로 좋아하고 있나요?”
의미심장한 말을 마친 아네트가 물끄러미 라펠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라펠은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어쩐지 그녀가 멀게만 느껴지는 것 같아, 라펠은 저도 모르게 아네트의 허리를 끌어안으려 했다. 하지만 이를 살짝 피한 아네트가 서글픈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만약 그럴 수 없다면 우리, 그냥 지금까지처럼 살아요. 그편이 서로에겐 더 나을 거예요. 정말 미안해요, 라펠.”
그녀의 말에 라펠은 숨이 멎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아네트가 한 말이 마디마다 굴러다니며 명치를 때리는 것 같았다. 그의 머릿속은 지금 지나친 혼란으로 인해 과부하가 걸려 있었다.
아네트는 미안한 듯 그를 바라보다, 이윽고 침실 문을 닫아 버렸다. 문틈 사이로 얼핏 보인 그녀의 옆얼굴은 완전한 단절을 선언하고 있었다. 지금 그들에게 필요한 건 신중히 생각해 볼 시간이었다.
어젯밤, 벤 마치를 붙잡은 아네트는 곧장 셀레스틴의 저택으로 직진했다. 물론 편한 곳을 따지자면 자신의 집만한 곳이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카네시스 가의 저택으로 갈 순 없었다. 제아무리 상도덕이 없는 사회가 되어간다지만, 외삼촌을 조카의 저택에서 고문할 순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최근에 ‘거짓말하는 범인을 자백시키는 취조법’이란 교양서적을 읽은 아네트는 마음을 굳게 다졌다. 여차하면 자신이 나서서 직접 손을 쓸 각오도 되어있었다.
‘괜찮아. 쉽고 효과적인 고문법 부록까지 다 읽었어.’
억울한 누명을 벗는 건 아네트가 전생에도 그토록 바랐던 오랜 염원이었다. 한 번 죽고 난 지금에서야 드디어 그 목표에 가까워졌다. 아무것도 모른 채 깨끗하고 허무하게 끝난 삶은 전생으로 족했다. 아네트는 설령 자신의 새하얀 손에 피를 묻히는 한이 있더라도, 기필코 이 모든 진실을 규명해 낼 작정이었다.
전에 와 본 키어스 가의 별채로 들어서자, 이미 기다리고 있던 셀레스틴이 반색했다. 아네트의 무사함을 확인한 그녀의 얼굴에 안도감이 떠올랐다. 이쪽으로 다가오던 셀레스틴의 표정이 별안간 딱딱하게 굳어졌다. 뒤에서 라일린의 손에 끌려오던 벤 마치를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그때 그 납치범……!!’
순식간에 셀레스틴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사라졌다. 납치당한 그 날부터 셀레스틴은 단 하루도 편히 자 본 적이 없었다. 지독한 정신적 트라우마와 공포가 매일같이 그녀를 야금야금 좀먹어 들어갔다. 자신의 정신이, 영혼이 갉아 먹히는 소리가 고통스러워서 눈을 감을 수 없었다. 그 원흉이 지금 눈앞에 있었다.
이때, 패닉에 빠져 떨리는 셀레스틴의 어깨를 누군가가 끌어안아 주었다. 다정하고 따뜻한 손길이었다. 뺨에 와 닿는 금발이, 그 품에서 나는 부드러운 꽃향기가 마음까지 안아주는 듯했다. 셀레스틴을 꼭 안아준 아네트가 가만히 속삭였다.
“당신은 이제 괜찮을 거예요, 셀레스틴. 그대를 괴롭히던 악몽을 내가 드디어 붙잡았거든요.”
아네트의 말을 듣는 순간, 셀레스틴은 자신의 가슴 속에서 뭔가가 탁 풀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와 동시에 현기증이 날 만큼 강한 안도감과 해방감이 밀려왔다. 셀레스틴은 그녀의 부드러운 팔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이제 이 기나긴 악몽이 끝을 내릴 때도 되었다.
모처럼 행방이 묘연했던 벤 마치를 잡았으니, 그에게서 들어야 할 얘기가 많았다. 아네트의 어깨에 이마를 기댔던 셀레스틴이 마지못해 고개를 들었다. 벤 마치 쪽을 바라보던 그녀가 흠칫 놀랐다. 처음엔 트라우마 때문에 미처 몰랐었는데, 웬 어마어마하게 예쁜 남자가 그의 목덜미를 붙잡고 있었다.
“저, 저분은 누구시죠?”
셀레스틴은 저도 모르게 그 남자에게 존칭을 붙였다. 벤 마치를 끌고 온 것으로 보아 아네트의 하수인에 가까운 것 같은데, 이상하게 반말이 안 나갔다. 미모가 너무 존엄해서 그런가.
셀레스틴이 그쪽을 바라본 순간, 남자가 해사하게 눈꼬리를 접으며 웃었다. 전체적으로 푸른 머리칼에 흰 얼굴이라 청초해 보이는 미남인데, 속눈썹 밑에서 빛나는 새빨간 눈동자는 꼭 장미처럼 요염했다. 그 미소를 정면으로 봐 버린 셀레스틴은 혹 자신의 눈이 멀진 않을까 손으로 더듬어보았다.
“아, 그는 제 정보원이에요. 아주 유능한 사람이죠.”
옆에서 아네트가 하는 말이 꼭 메아리처럼 아득하게 들렸다. 요즘 델티움의 정보원들은 얼굴로 뽑는 게 확실했다. 라일린의 충격적인 미모에 반쯤 넋이 나간 셀레스틴은 하마터면 아네트의 다음 질문을 못 들을 뻔했다.
“……네? 뭐라고요?”
멍한 얼굴을 한 셀레스틴이 가까스로 라일린에게서 시선을 떼었다. 그러자 이를 본 아네트가 귀엽다는 듯 웃더니, 반복해서 물었다.
“당신 지하실에 자리 더 있냐구요.”
……누가 보면 와인 더 있냐고 묻는 것처럼 우아한 자태였다. 사람을 조져버리기 위해 지하실로 끌고 가려는 사람처럼은 절대 안 보였다. 아네트는 가만 보면 겉모습과 달리, 좀 무서운 구석이 있었다.
셀레스틴은 두말없이 카펫을 걷고 지하실 계단 문을 열었다. 아주 특별한 손님이 왔으니, 없던 자리도 만들어 주는 게 인지상정이었다. 지난번처럼 계단 밑으로 내려가려던 셀레스틴이 망설였다. 지금부터 벌어질 심문을 생각하니, 이상하게 발걸음이 떨어지질 않았다. 자신을 납치했던 남자와 지하실에 함께 머무르는 것 또한 꺼려졌다.
‘내가 이렇게 나약했을 줄이야.’
자신을 책망한 셀레스틴은 입술을 깨물고 애써 발을 옮기려 했다. 그때, 셀레스틴의 어깨를 잡은 아네트가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셀레스틴. 당신은 이곳에 있어요. 심문이 끝나는 대로 당신에게 얘기해 줄게요.”
“……미안해요. 그리고 고마워요, 아네트.”
눈시울을 붉힌 셀레스틴이 계단 입구에서 물러났다. 사실 아네트의 입장에서도 그녀가 위에 머물러 있는 편이 더 나았다. 벤에게 이런저런 사실을 듣다 보면, 혹 라펠의 과거가 흘러나오게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라펠의 친모가 누구였는지, 그의 유년 시절이 어땠었는지 등에 대한 것들 말이다.
이런 건 아직 아네트조차도 모르는 그의 과거였다. 언제 라펠의 개인사가 까발려질지 모르는 위험을 무릅쓰느니, 차라리 셀레스틴이 빠져 주는 편이 나았다.
“그럼 다녀올게요. 걱정하지 말고, 이곳에서 좀 쉬고 있어요.”
다정하게 셀레스틴의 뺨에 키스한 아네트가 먼저 앞장서 내려갔다. 이미 한 번 와본 곳이라 그런지 지하실의 공기가 포근하기까지 했다. 다행히 예전 세입자(?)였던 자크는 풀어준 모양이었다. 심문용 의자가 비었으니 잘된 일이었다.
아네트의 뒤를 따라 벤 마치의 목덜미를 틀어쥔 라일린이 내려왔다. 그러자 셀레스틴이 위쪽에서 계단 입구를 닫아주었다. 마지막으로 기절한 벤을 심문용 의자 위에 묶어놓자, 모든 준비가 완료되었다. 이로써 비밀스러운 심문을 시작할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