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꼬박 반나절 만에 얼굴이 핼쑥해진 아네트는 침대 위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끙끙거렸다. 그러나 제 욕심을 채운 라펠은 아침보다 한결 부드러워진 얼굴이었다. 그는 자상하게도 아네트에게 몸소 저녁 식사를 날라주었다.
라펠은 침대 트레이 너머로 그녀를 흘끗흘끗 쳐다보며 고기를 잘랐다. 새하얀 이불 때문일까? 아네트의 얼굴이 오늘따라 유독 뽀얗게 보여서 더 예뻤다. 어쩌면 자신이 실컷 그녀를 안고, 빨고, 굴려대서 그런 건지도 몰랐지만. 어쨌든 자신의 아내가 세상에서 제일 예쁜 여자인 건 사실이었다.
‘내가 결혼 하나는 참 잘 했지.’
라펠은 저도 모르게 고기를 자르던 손까지 멈추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너무 집요하게 쳐다보았기 때문일까? 시선을 느낀 아네트가 한 떨기 코스모스처럼 가련하게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치자, 도둑이 제 발 저린 라펠은 흠칫 놀랐다. 이를 본 아네트가 힘없이 물었다.
“고기 먹고 싶으면 줄까요? 전 어차피 속이 부대껴서…….”
그랬다. 아네트는 라펠이 고기가 더 먹고 싶어서 자신을 쳐다본다고 생각했다. 라펠은 엉뚱한 말에 픽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제가 썰어놓은 고기 한 점을 집어 그녀의 입가에 갖다 대 주었다. 무심코 그것을 받아먹던 아네트가 오늘따라 유독 그답지 않은 태도에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고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그에게 물었다.
“당신, 혹시 무슨 일 있었어요? 오늘 좀 이상한 것 같네요.”
아네트는 혹 라펠이 자신의 간밤 행적을 눈치챈 건 아닐지 걱정스러웠다. 그는 비틀린 데가 있어서, 뭔가를 알아내면 솔직히 묻는 법이 없었다. 그 대신 괜스레 아네트에게 못되게 굴거나, 혹은 찰싹 달라붙는 경향이 있었다. 마치 지금처럼 말이다.
‘그런 게 아니면 라펠이 나에게 잘할 리 없어.’
불행히도 라펠에 대한 아네트의 신뢰도는 그 정도로 바닥을 치고 있었다. 그러나 이를 모르는 라펠은 귀가 번뜩 뜨였다.
‘혹시 지금이 기회일까?’
라펠은 당장이라도 그녀에게 이 마음을 사실대로 고백하고 싶었다. 생소하면서도 두려운, 그러면서도 어찌할 수 없는 이 지독한 감정을.
하지만 아네트에게 섣불리 고백하는 것도 두려웠다. 그러기엔 라펠과 그녀 사이에 엮인 문제들이 너무 많았다. 특히나 그의 밝혀지지 않은 출신 문제가 그랬다.
‘고백하면 그녀에게 사실대로 다 말해야 할 텐데.’
예전의 라펠 같았으면 혹여 그녀가 눈치라도 챌까 봐 자신의 출신 문제를 꼭꼭 숨겼을 것이다. 설령 아네트 쪽에서 먼저 물어봤어도, 질색을 하며 차갑게 잘라냈을 게 뻔했다. 라펠은 그만큼 자신의 모계 쪽 혈통에 크나큰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다.
‘차라리 그냥 평민이기라도 했으면…… 이렇게까지 숨길 필요는 없었을 텐데.’
제 어미라는 여자가 어땠는지 떠올린 라펠은 머리를 감싸 쥐었다. 아네트는 혈통 우월주의인 바이에른 출신인 게 믿기지 않을 만큼 그에게 관대했다. 하지만 자신의 모친에 대해 알아버린 후에도 그럴 수 있을까?
라펠은 그녀가 어제 제 외삼촌을 심문했단 사실을 미처 몰랐다. 그 때문에 아네트가 모든 걸 이미 알아버렸다는 사실도 말이다.
‘어쩌지?’
혼자 쓸데없는 고민을 하는 라펠의 턱에 자연히 힘이 들어갔다. 할 수만 있다면 영원히 숨기고 싶은 마음은 지금도 굴뚝같았다. 하지만 라펠은 이제 이 문제의 심각성을 알아버렸다. 만약 자신이 열등감을 극복하지 못하고 숨기기만 한다면, 영영 아네트를 가질 수 없으리라.
그는 이제 해밀튼의 말마따나, 아네트를 놓치느니 차라리 제 자존심을 죽일 준비가 되어있었다. 하지만 대체 어디서 어떻게 운을 떼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냥 불쑥 말해버리기엔 지나치게 무거운 이야기였으니까.
‘뭐부터 시작해야 하지?’
검술이라면 몰라도, 대화 기술은 형편없는 라펠은 진지하게 고민했다. 심도 있는 고민 끝에 그는 우선 아네트의 생각부터 좀 떠보기로 마음먹었다. 대뜸 고백부터 하기엔 라펠은 그닥 솔직하지 못한 성격이었다. 자신이 행여 상처받을까 봐 겁도 많은 편이었다. 진지한 표정을 한 라펠이 방어적인 태도로 입을 열었다.
“아네트. 당신은 혈통이 얼마만큼 중요하다고 생각해?”
“아, 저런.”
어딘지 모르게 불안해 보이는 라펠의 얼굴을 본 아네트가 탄식했다. 그녀는 어디서 라펠이 또 사생아라는 이유로 안 좋은 소리를 들었을 것이라고 착각했다. 그러니 괜스레 맘이 불안해서 아침 일찍부터 일어나 자신을 마중 나오고, 그 뒤로 줄곧 찰싹 달라붙어 있던 거겠지.
아네트는 주위 사람들의 아픔에 잘 공감하는 편이었다. 특히나 그게 라펠의 문제라면 더더욱 그랬다. 아네트에게 있어서 라펠은 깨물면 가장 아픈 손가락이나 다름없었다. 그는 누구보다 강해 보였지만, 그 내면은 정작 불안정하고 연약했다. 그 커다란 격차 때문에 라펠은 더욱 위태로워 보였다.
‘또 누구지? 그에게 쓸데없는 소리를 한 사람이.’
아네트는 얼굴 모르는 타인에게 화가 잔뜩 났다. 그녀는 기꺼이 식사를 중단하고 침대에서 일어나, 라펠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다정하게 그의 어깨를 쓸어내리며 위로했다.
“남들의 말에 신경 쓰지 말아요, 라펠. 솔직히 말하자면…… 아직까지 델티움에서 혈통과 출신은 중요한 문제 같아요. 하지만 그것들이 중요한 까닭은, 한 명의 인간을 구성하는 토양 역할을 하기 때문이에요. 아무것도 없는 척박한 땅에서 큰 나무가 자라나긴 힘든 법이니까요.”
말을 멈춘 아네트가 신중하게 생각을 골랐다. 어젯밤 벤에게 그의 과거에 대해 들어서 그런지 유독 더 마음이 아팠다. 여기서 대체 무슨 말을 해야 라펠이 위로받을 수 있을지 고민이었다. 여러 말들을 거르고 또 거르자, 결국 남는 건 진심 어린 조언뿐이었다.
“라펠, 당신은 척박한 땅에서도 그 누구보다 크게 자란 나무에요. 그러니 누군가는 당신을 시기하고, 헐뜯으려 하겠죠. 하지만 난 그런 당신이 자랑스러워요. 진심으로요. 당신은 가문만 잘 타고 태어난 운 좋은 이들보다 훨씬 대단한 남자예요.”
“아네트…….”
라펠은 어느새 자신이 숨도 쉬지 않고 그녀의 답변을 듣고 있었단 사실을 깨달았다. 단순히 그녀의 생각을 알아보려고 던진 질문인데, 아네트답게 성실한 대답이었다. 이를 들은 라펠은 묘하게 자신의 눈시울이 뜨거워진다고 생각했다. 내가 대체 왜 이러지?
라펠은 시큰한 콧잔등을 대충 손등으로 문지른 후,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쩐지 아네트라면 자신의 모계 쪽 혈통이 어떻든지 간에 개의치 않을 것 같았다. 그녀는 주위 사람들을 소중히 대하니까, 자신에게도 상처를 주지 않을 것이다. 난생처음으로 타인을 믿기로 한 라펠이 용기를 내어 입을 열었다.
“아네트, 당신이 저번에 했던 질문 말야. 그, 당신을 조금이라도 좋아하냐고 물었던 거.”
“네? 그건 갑자기 왜…….”
아네트는 혈통에 대한 얘기를 하던 중, 화제가 왜 이쪽으로 튀는 건지 의아해졌다. 그때 라펠은 끝끝내 침묵했었고, 아네트는 상처받았다. 그 비참했던 기억이 새삼 떠오르자 아네트의 표정이 자연히 굳어졌다. 이를 보지 못한 라펠이 눈을 질끈 감고 이번에야말로 자신의 감정을 고백했다.
“그 뒤로 줄곧 생각해 봤는데, 난 아네트, 당신을…… 좋아하고 있어.”
뜻밖의 고백에 아네트의 눈이 커졌다. 그녀는 약간 떨리는 눈동자로 라펠을 바라보았다. 그 눈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본 순간, 라펠은 당장이라도 자리에서 일어나 도망치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꽉 쥔 주먹이 바르르 떨리고, 자신의 심장 뛰는 소리 때문에 고막이 다 먹먹했다. 하지만 저 예쁜 눈동자 앞에서 도망칠 곳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라펠을 바라보던 그녀의 눈동자가 서서히 촉촉해졌다. 입술을 깨문 아네트가 선뜻 말을 꺼내지 못하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라펠은 어쩌면 그녀가 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바로 그 순간, 아네트가 복잡한 눈빛으로 웃었다.
“고마워요, 라펠. 당신이 날 싫어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충분해요.”
대답은 그게 다였다. 아네트는 할 말을 모두 마쳤다는 듯 침대로 돌아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 이를 본 라펠은 자신의 발밑이 조각조각 갈라지는 듯한 불안감을 느꼈다. 이게 아니었다. 뭔가가 잘못되어가고 있었다. 그는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자신에게 등을 돌리는 아네트의 팔을 붙잡았다.
“대답이 왜 그래? 당신을 싫어하지 않는 게 아니라, 오히려 좋아한대도!!”
다급해지자 오히려 더 진심 어린 고백이 흘러나왔다. 아네트는 지나치게 박력 있는 라펠의 태도에 놀란 눈이 되었다. 자신보다 머리 하나는 큰 그가 몰아붙이는 감정은 무척 생생했다. 그럴 린 없겠지만, 꼭 실체가 있어서 자신을 덮쳐오는 듯한 느낌이었다.
눈을 크게 뜨고 라펠을 바라보던 아네트가 이윽고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적당한 선에서 그의 고백을 무마하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몸을 돌린 그녀의 입에서 결국 진지한 물음이 흘러나왔다.
“얼마나요?”
“……뭐?”
“라펠, 당신은 날 얼마나 좋아하고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