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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화





















‘저 여자인가?’



어두운 자색 후드를 깊이 눌러쓴 여자는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겼다. 어른거리는 등불에 비친 턱과 입술이 유독 아름다웠다. 아마 후드를 걷으면 상당한 미인일 것 같았다. 괜스레 긴장한 벤이 마른 침을 삼켰다. 그러고 보니 묘하게 여자의 하관이나, 체형이 눈에 익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어디서 많이 본 여자 같기도 한데…….



“앉으십시오.”



아무래도 착각인 모양이었다. 여자의 목소리는 꼭 양철판 위에 쏟아지는 유리구슬처럼 날카롭고 묵직했다. 저렇게 특이한 목소리를 가진 여자를 알 리 없었다. 이게 다 라일린이 준 ‘음성 변조 캔디’ 덕분이었지만, 벤이 이를 알 리 없었다. 그는 아네트를 알아보지 못하고 순순히 맞은편 자리에 가 앉았다.



점을 보는 게 처음인지라 벤의 자세는 대단히 어정쩡했다. 하지만 그의 도박꾼다운 의심은 어딜 가지 않았다. 벤은 과연 이 여자가 사기꾼일지 아닐지 고민하며, 그녀의 후드 아래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러자 여자가 단아한 입술을 휘며 웃었다. 그녀의 손끝이 오묘한 색의 수정구슬을 어루만지자, 놀랍게도 그 표면 안쪽에서 은은한 빛이 흘러나왔다.



‘이건 또 무슨 눈속임이지?’



벤은 흠칫 놀랐다. 수정구슬에서 흘러나온 빛 때문에 분위기는 더욱 그럴싸해졌다. 그녀는 꼭 전설 속에서 걸어 나온 신비로운 존재 같았다. 이때, 수정구슬을 내려다보던 그녀가 입을 열었다.



“당신은 두 개의 이름을 가지고 있군요.”



이건 뭔 개소리지? 미간을 찌푸리며 부정하려던 벤이 문득 딱딱하게 굳어졌다. 확실히 그는 몇 달 전까지만 해도 가짜 이름으로 살고 있었다. 그걸 이 여자가 어떻게 아는 거지? 혹 넘겨짚기라도 한 걸까? 하지만 벤이 더 생각할 겨를도 없이, 여자가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누군가 아주 강력한 권세가가 당신을 후원하고 있네요. 가장 고귀한 피가 흐르는, 어쩌면 이 델티움에서도 첫 손에 꼽힐 만한 분이로군요. 제 말이 틀렸나요?”



“그, 그걸 당신이 어떻게?!”



벤은 전율했다. 등골을 타고 소름이 내달렸다. 눈앞의 이 점술가는 진짜였다! 정말로 모든 걸 꿰뚫어 보고 이런 말을 하는 게 틀림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말은 아직 다 끝난 게 아니었다. 잠시 침묵하던 점술가가 다소 비난 어린 어조로 내뱉었다.



“보아하니 고객님께선…… 몹쓸 짓을 참 많이 하셨군요. 안 그런가요? 혹시 누군가를 배신하거나, 마음에 큰 상처를 남길 만큼 심한 짓을 한 적이 있나요? 특히 여자들에게 말이에요.”



벤은 어떤 귀족가의 영애를 납치했었던 지난 과거를 떠올렸다. 그리고 자신의 죄를 뒤집어씌웠던 주인 아가씨의 얼굴도 떠올렸다. 찔리는 구석이 너무 많아 오히려 하나만 딱 특정할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이때 만약 아네트가 고개를 들었다면, 벤은 그녀의 하관에서 낯익은 얼굴을 발견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아네트는 고개를 푹 숙이고 수정구슬만 바라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이 때문에 벤은 미처 그녀의 정체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녀의 점괘 내용은 식은땀이 절로 배어 나올 만큼 날카롭기 짝이 없었다.



“당신을 원망하는 사람이 아주 많아요. 때론, 원망처럼 강렬한 감정은 상대에게 직접적으로 안 좋은 영향을 미치곤 하죠. 혹시 최근에 운이 좀 나쁘지 않았었나요? 뭘 해도 잘 안 풀리고,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없었을 텐데요. 원망을 많이 산 자들의 흔한 업보죠.”



“맞소. 그 말대로요! 그럼 그 원망이란 걸 풀려면 대체 어떡해야 하는 거요?”



어느새 아네트의 말에 홀딱 넘어간 벤이 상반신을 기울였다. 사실 대부분의 도박꾼은 자신이 운이 나빠 못 따는 것이라고 착각하기 마련이었다. 그게 어제오늘 일이 아닌데도, 유독 최근에 더 재수가 없었던 것처럼 느끼는 것이다.



벤은 한시라도 빨리 제 업보인지 뭔지를 털고 싶어 안달이 났다. 그가 완전히 낚인 듯하자, 수정구슬 위를 더듬던 우아한 손가락이 우뚝 멈춰섰다.



“어떡하긴요. 원망을 산 대상에게 직접 사죄해야지요.”



수정구슬에서 은은하게 흘러나오던 빛이 별안간 밝아졌다. 마치 벽난로에 기름을 붓기라도 한 것처럼. 어둑한 실내에 익숙해져 있던 벤이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리며 얼굴을 가렸다.



바로 그 순간, 여자가 깊이 눌러쓰고 있던 후드를 벗었다.



“너, 넌……!!”



드러난 아네트의 얼굴을 확인한 벤의 눈이 충격으로 홉떠졌다. 가짜 신분으로나마 십 년 가까이 모셨던 주인이었다. 그녀를 못 알아볼 리 없었다.



‘대체 어떻게 이곳에? 내가 여기 있는 걸 어찌 알고?!’



그녀를 앞에 두고, 벤 마치는 순식간에 마부 이반으로 되돌아갔다. 혼란에 빠진 그의 머릿속이 엉망으로 헝클어졌다.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벤이 뒷걸음질을 쳤다. 흡사 과거의 망령이라도 본 사람처럼.



퍼억―



이때, 기척도 없이 뒤에서 나타난 라일린이 주먹을 휘둘러 벤을 기절시켰다. 깔끔하기 그지없는 주먹질이었다. 폭력과는 거리가 멀 것 같은 이 화사한 미인은 뜻밖에도 놀라운 몸놀림을 선보였다. 덕분에 아네트는 모처럼 재회한 벤에게 한 마디 쏘아붙이기도 전에 기회를 잃었다.



약간 뻐근한 주먹을 두어 번 흔든 라일린이 한 떨기 꽃처럼 청초하게 웃었다. 느슨한 후드 너머로 드러난 아네트의 얼굴을 본 그가 부드럽게 칭찬했다.



“고객님께서 약을 잘 쳐주신 덕에 손쉽게 쥐를 잡았군요. 역시 약 파는 데 소질이 있으세요.”



칭찬을 받은 아네트는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귀부인이 약 파는 데 소질이 있어서 뭐 어쩌란 말인가?



아네트는 복잡한 눈빛으로 발치에 쓰러져 있는 벤 마치의 뒤통수를 쳐다보았다. 그를 잡은 건 기뻤지만, 갈 길은 아직도 많이 남아 있었다. 한숨을 삼킨 아네트가 고갯짓을 했다.



“수고 많았어요, 라일린 씨. 이제 그를 옮기게 도와주세요.”









* * *









밤새 벤 마치의 심문을 끝낸 아네트는 자신의 저택으로 향했다. 산 너머로 떠오르는 이른 아침 햇살이 유독 눈부셨다. 모든 걸 다 알아버려서 그런지, 감회가 새로웠다. 인생이란 알면 알수록 참 재미있는 것이었다.



아네트는 어제 명목상 셀레스틴의 저택에서 하룻밤 머문 것으로 되어있었다. 라펠은 이 기묘한 우정에 대해 불만스럽게 여기는 눈치였지만, 어쩔 수 없었다. 배우자의 우정 관계에 대해 이래라저래라 할 순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덕분에 아네트는 완벽한 알리바이를 안고 태연하게 귀가할 수 있었다.



“다녀왔어요, 여보.”



“왔군.”



저택에 들어선 아네트가 라펠을 발견하고 인사를 건넸다. 이 시간에 라펠이 깨어있다니, 참으로 보기 드문 일이었다. 그는 그닥 아침형 인간과는 거리가 먼 편이었기 때문이다. 현관에서 어슬렁거리던 그를 발견한 아네트는 다소 의아해졌다.



‘왜 저리 일찍 일어났지? 혹시 어젯밤도 잠을 잘 못 잤나?’



만약 밤을 꼬박 지새운 거라면, 라펠이 지금 깨어있는 이유를 설명할 수 있었다. 아네트는 자신이 선물한 오르골이 효과가 없었나 싶어 슬퍼졌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가까워진 라펠의 얼굴을 살폈지만 딱히 혈색이 나쁘지도, 눈이 충혈되지도 않았다. 그는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상태였다.



아네트는 의아했다. 자신을 바라보는 라펠의 얼굴은 환했고, 알 수 없는 생기가 맴돌고 있었다. 특히나 그의 짙푸른 눈이 오늘따라 밝은 파란색으로 빛났다. 그는 꼭 주인이 돌아오길 줄곧 기다렸던 개처럼 들떠 있었다. 물론 자신이 아는 라펠이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말이다.



“어제는 즐거웠나? 뭘 하고 놀았지?”



아네트의 시선을 슬쩍 피한 라펠이 무뚝뚝하게 물었다. 이에 아네트는 난처한 얼굴로 웃었다. 여기서 ‘당신의 하나뿐인 외삼촌을 납치 후 심문했는데요.’라고 대답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라펠은 어젯밤 그녀가 셀레스틴과 ‘파자마 파티’를 한 줄 알고 있었으니까.



파자마 대신 고문 파티를 하고 온 아네트는 티 안 나게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그의 눈을 피하며 대꾸했다.



“그냥 이런저런 얘기를 했어요. 그녀와 제가 처음 왕궁에서 만났던 얘기라든지, 공통의 지인들, 그리고 서로의 첫인상 같은 잡담이었죠.”



“그렇군.”



라펠은 사교계와 거리가 멀었다. 인간 대 인간으로서의 교류는 특히나 더 멀었다. 따라서 그는 아네트가 그랬다면 그런가 보다, 하고 생각했다. 짧은 대화가 끝나고 나자, 둘 사이에 다소 어색한 침묵이 맴돌았다.



“…….”



라펠이 이 침묵을 어떻게든 깨기 위해 고민하던 찰나였다. 아네트가 긴 속눈썹 밑으로 시선을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아주 뜬금없는 질문 하나를 던져왔다.



“라펠, 당신은 혹시 셀그라티스 폐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



“뭐? 갑자기 무슨 소리야?”



“그냥. 어제 보니까 셀레스틴은 가족끼리 무척 화목한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문득 당신이 생각났어요. 폐하께선 당신의 하나뿐인 친부시잖아요? 그래서 당신이 그분을 어찌 생각하는지 알고 싶어요. 만약 대답해 주기 싫으면, 굳이 말 안 해도 돼요.”



이미 라펠에게 여러 번 거절당한 적 있는 아네트의 태도는 체념에 가까웠다. 반드시 해야 하는 질문인지라 했으나, 라펠이 딱히 대답을 해 줄 거라곤 기대하지 않았다. 그녀는 잠자코 라펠을 마주 보며 그의 반응을 기다렸다. 그러자 라펠의 잘생긴 미간에 못마땅한 주름이 생겼다.



라펠은 자신의 감정을 묻는 이런 식의 대화에 익숙하지 않았다. 전 같았으면 그게 당신과 무슨 상관이냐며 쌀쌀맞게 쳐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 라펠의 사랑은 지금부터 시작이었다. 그는 줄곧 자신의 가슴 속에서 싹트던 그 생소한 감정이 사랑임을 깨달아 버렸다. 이 모든 게 망할 클레어 바이에른 덕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