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벤은 고심했다. 그가 지금 하는 블랙잭이란 게임은 극히 단순했다. 게임에 참여한 사람 중, 카드의 총합이 21에 가장 가까운 사람이 이기는 게임이었다. 20이나 21까진 더없이 좋았지만, 만약 21을 초과하게 되면 ‘버스트’라고 해서 무조건 패배한다. 그리고 벤의 지금 카드 합은 딱 19였다.
벤은 안전하게 여기서 멈추고 결과를 기다려야 할지, 아니면 카드를 한 장 더 받아서 21에 최대한 맞춰봐야 할지 고민했다. 만약 숫자가 큰 카드를 받으면 21을 초과해서 버스트로 패배할 게 뻔했다. 얻는 것보단 잃는 게 더 많은, 위험한 선택이었다.
하지만 도박꾼들이란 대개 안전과 거리가 먼 위인들이었다. 애초에 안전한 선택을 할 줄 알았다면, 이딴 날파리 같은 도박 인생에 빠져들지도 않았을 테니까.
“힛(Hit).”
벤은 결국 카드를 한 장 더 뽑아보기로 마음먹었다. 그가 검지로 테이블을 툭 내려치자, 눈치 빠른 딜러가 카드 한 장을 더 건네주었다. 떨리는 손으로 이를 뒤집어 본 벤은 눈을 감았다. 하필 6짜리를 뽑아 버렸다. 이로써 카드 합은 25, 명백한 버스트였다.
“수고하셨습니다.”
딜러가 빙글빙글 웃으며 그의 피 같은 배팅액들을 긁어 갔다. 이로써 그가 최근 지급받은 ‘생활비’가 모조리 빨려 나갔다. 벤은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주먹으로 테이블을 쾅! 소리가 나게 내려쳤다. 그러자 다른 플레이어들이 미간을 찌푸리며 경멸하듯 그를 노려보았다.
벤은 그 벌겋게 충혈된 시선들을 피해 비틀비틀 일어났다. 이제 이 시궁창 속에서도 가장 깊고 은밀한 자신의 은신처로 되돌아갈 시간이었다.
이곳, 그루티 구역은 벤이 나고 자랐던 고향과 별반 다를 게 없는 빈민촌이었다. 하지만 그새 귀족가의 마부니, 뭐니 하는 경험을 해서 그런지 눈이 높아진 모양이었다. 벤은 이 더럽고 지저분한 시궁창에 머무는 게 지긋지긋해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그래서 최근에 바람도 쐴 겸, 일꾼들 사이에 섞여 슬쩍 구역을 이탈했다가 ‘경고’까지 받았다. 그것 때문에 생활비도 삭감되어 도박 횟수가 줄어들었다.
‘오늘은 영 재수가 없군, 젠장.’
벤은 짜증스러운 기분에 고개를 숙이고 땅을 툭툭 걷어찼다. 뭘 해도 잘 안 풀리는 느낌에 초조해졌다. 바로 그때, 벤의 구두코 앞을 스쳐 지나가는 무언가가 있었다.
“꿀꿀!”
“뭐야! 돼지잖아?”
처음엔 개인 줄 알았다. 하마터면 그걸 걷어찰 뻔한 벤이 눈살을 찌푸리며 자신의 발치를 뛰어다니는 새끼 돼지를 내려다보았다. 그 순간, 그의 눈이 갑자기 커졌다. 이건 그냥 돼지가 아니라, 황금 돼지였다!
도박꾼들 사이에서 금빛은 속칭 행운의 색이었다. 벤이 금발 여자가 있는 게임을 ‘그날의 게임’으로 정하는 것도 그 이유 때문이었다. 근데 자신의 발치에서 강아지만한 크기의 황금 돼지가 꿀꿀거리며 뛰어다니고 있었다. 어쩐지 저걸 잡으면, 한 번이라도 품에 안는다면…… 전에 없던 어마어마한 도박 운이 생길 것 같았다.
벤은 저도 모르게 손의 땀을 바지에 슬쩍 닦고, 돼지를 향해 허리를 굽혔다. 마치 맨손으로 송어 낚시를 하듯 한 번에 낚아챌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 새끼돼지는 보기보다 민첩했다.
“꾸이잉!!”
벤의 헛손질에 놀란 돼지가 황급히 어디론가 도망쳤다. 사람들 발 사이를 요리조리 헤집으며 뛰는 몸놀림이 꼭 다람쥐처럼 날랬다. 벤은 마음이 급해져서 재빨리 그 돼지의 뒤를 따랐다. 그가 밀치고, 부딪히는 사람들이 저마다 벤을 향해 욕설을 퍼부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드디어 돼지를 구석에 몰아넣은 벤이 숨을 헐떡이며 다가섰다. 그의 벌려진 입술에 다소 탐욕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그 순간, 어디선가 나타난 새하얀 손 한 쌍이 그를 가로막았다. 그리고 여봐란듯이 얄밉게 돼지를 안아 올렸다.
“이런, 실례. 제 애완동물이 폐를 끼친 것 같군요.”
정체를 알 수 없는 남자의 붉은 입술이 눈앞에서 돼지를 놓친 벤을 비웃었다.
벤은 뜻밖의 상황에 겸연쩍어졌다. 엄연히 주인이 있는 애완동물을 뒤쫓다 들킨 셈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도박꾼들은 대개 거짓말을 잘하는 사기꾼들이었다. 여기에 염치없는 구걸 근성까지 보유하고 있는 게 대부분이었다. 그는 남자의 옷차림이 무척 부유해 보인다는 사실을 눈치챘고, 그에게서 약간의 ‘위로’나 받기로 마음먹었다.
‘그러게 애완동물 관리를 잘 했어야지. 왜 사람 눈앞에 풀어놔서 혹하게 해?’
본인의 탐욕을 뻔뻔스레 남자의 탓으로 돌린 벤이 인상을 팍 썼다. 그리고 한쪽 종아리가 아픈 것처럼 문지르며 엄살을 부렸다.
“아이구, 아쿠! 그놈의 돼지가 내 다리를 콱 깨물고 갔다오!! 내일도 일을 나가야 하는데, 다리가 이래서야 원.”
때마침 엊그제, 도박장에서 딴 놈과 치고받고 싸우다 종아리를 걷어 채였다. 당시엔 기분 더러웠었는데 지금 보니 오히려 행운이었다. 입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을 한 벤이 바짓자락을 걷어 은근슬쩍 멍을 내보였다. 그리고 남자의 반응을 살피기 위해 고개를 들다 흠칫 놀랐다.
‘뭐 저리 잘생겼어?’
키가 꽤 훤칠한 남자는 꼭 요정처럼 수려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웬만한 계집보다 더 하얀 얼굴이 짙푸른 머리칼과 잘 어울려 중성적인 미모를 뽐냈다. 그런 주제에 눈동자는 또 루비처럼 붉은색이라, 묘하게 야살스러운 느낌이 있었다. 그 눈이 기묘한 빛을 띠고 벤의 종아리를 가만히 살폈다.
“……그것참 이상하군요. 이 아이는 사람을 물지 않는데 말이죠.”
마법으로 만든 환각이 어찌 사람을 문단 말인가. 라일린의 입가에 약간 경멸하는 미소가 걸렸다. 이를 본 벤이 발끈하여 진상을 부렸다.
“아니, 지금 내가 거짓말을 한다는 거요?! 당연히 짐승 새끼도 제 주인은 안 물 테지! 하지만 난 물렸단 말이오, 이 종아리의 멍을 보쇼!! 엉? 이를 어떻게 보상할 거요?!”
라일린은 잠시 침묵했다. 어쩐지 그의 눈초리가 심상치 않아, 벤은 저도 모르게 찔끔했다. 혹시 사람을 잘못 건드린 걸까? 애당초 이 위험한 불법 도박장을 저렇게 부유한 차림으로 드나들 수 있는 것 자체가 꽤 거물일지도 몰랐다.
벤이 지금이라도 자신의 수작을 철회할까 고민하던 중이었다. 라일린이 천천히 입을 열어 새로운 대안을 제시했다.
“이것 참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아직 영업을 시작하기 전이라, 제게 현찰이 없군요. 사죄의 의미라곤 뭣하지만…… 제 아내가 무척 용한 점술가랍니다. 그녀에게 무료로 점을 보게 해 드리지요. 어떠십니까? 제 고객 중에선 그녀의 조언을 듣고 일확천금을 딴 사람도 있답니다.”
뭔 놈의 점을 보란 말인가? 대뜸 거절하려던 벤의 입이 ‘일확천금’이란 내용에서 꽉 틀어막혔다. 도박꾼들은 그 누구보다 미신을 신뢰했지만, 정작 점 같은 건 잘 보지 않았다. 복채를 줄 돈으로 한 판이라도 더 도박을 하기 위해서였다.
평소 같았으면 개수작 부리지 말라고 했을 벤이었다. 하지만 눈앞의 남자는 어쩐지 신비로운 구석이 있었다. 저 부유한 옷차림도 그렇고, 품에 안은 황금 돼지도 그렇고. 다 제 아내가 가져다준 부가 아닐까? 그렇다면, 어쩌면…… 그녀에게 점을 보는 건 꽤 가치가 있는 일일지도 몰랐다.
때마침 갈등하는 벤에게 남자가 마지막 미끼를 던졌다.
“소문은 들어보셨겠지요? 크랩스(주사위 두 개로 하는 도박)에 전 재산을 걸고 이긴, 어떤 용감한 고객에 대한 얘기 말입니다. 덕분에 멀쩡했던 카지노 하나가 하루아침에 망해 버렸다죠.”
물론 사기였다. 지금 라일린이 말한 건 도박장마다 대개 하나씩은 있는, 흔히 돌아다니는 뜬소문이었다. 하지만 모든 도박꾼이 한 번쯤은 관심 있게 들어둔 소문이기도 했다. 혈혈단신으로 나타나 도박장 하나를 탈탈 털어버린 전설의 도박꾼이라니!
당연히 벤 또한 그 소문을 들어본 적 있었고, 눈앞의 사내는 이를 증명할 만큼 부유해 보였다. 벤은 이 미끼를 물지 말지 치열하게 고민했다. 딜러에게 하도 속아 본 그는 의심이 많았다.
이때, 벤의 머릿속을 번쩍 스쳐 지나가는 의문 하나가 있었다. 그는 팔짱을 끼며 짐짓 거들먹거리는 자세로 남자에게 따졌다.
“그렇게 대단한 점술가가 왜 이런 불법 도박장에 와 있단 말이오? 얼마든지 더 좋은 카지노에서 일할 수 있을 텐데! 당신, 이거 나에게 사기 치는 거 아니요? 엉?!”
라일린의 눈동자가 조금 움직였다. 도박으로 썩어 문드러진 저 머릿속에 그래도 한 줄기 이성은 남아 있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에겐 모든 난관을 타개할 수 있는 비장의 수단이 하나 있었다. 다름 아닌 마법이었다.
“제 아내는 앞날을 내다볼 줄 아는 여자죠. 그녀는 오늘, 이곳에서 귀빈을 만날 운명이라고 했습니다. 아직은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지 못했지만, 곧 도박계를 좌지우지하게 될 그런 큰 손이라고 했지요. 어쩌면 손님께서 그…….”
눈을 가늘게 뜬 라일린이 반신반의하는 눈빛으로 벤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보았다. 벤은 어쩐지 그 시선에 긴장하여 침을 꿀꺽 삼켰다. 라일린은 한술 더 떠서 품에 안고 있던 황금 돼지를 내려다보며 능청스레 연기에 들어갔다.
“처음부터 이상하다곤 생각했었지요. 이 아이가 손님의 다리를 깨물었다니…… 낯가림이 심하고 겁이 많아, 그럴 녀석이 아니거든요. 어쩌면 이 녀석이 먼저 귀빈을 알아본 걸지도 모르겠군요.”
“꾸잉!”
라일린의 말에 대답이라도 하듯, 품 안의 황금 돼지가 울었다. 당연히 환각 마법으로 조작한 결과였다.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벤은 돼지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새끼 돼지의 초롱초롱한 눈동자가 눈부신 금빛으로 반짝였다.
‘뭐지?’
벤은 눈썹을 찌푸리며 좀 더 자세히 돼지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러자 까맣고 반질반질하던 돼지의 눈동자 안쪽에서 선명한 금은보화의 형상이 떠올랐다. 마치 벤이 곧 손에 넣게 될 어마어마한 재산을 암시하기라도 하듯이.
벤은 자신의 눈을 의심하며 몇 번이고 눈꺼풀을 비볐다. 하지만 보고 또 봐도, 돼지의 눈동자 속에 떠오른 형상은 그대로였다. 찬란한 보물들이 그 안에서 벤을 유혹하듯 반짝였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이 미스테리한 상황에 벤은 혼란을 느꼈다.
“대체 이 무슨……?”
“어쩌시겠습니까? 점을 보시겠습니까?”
때마침 라일린이 목소리를 낮춰 은근하게 부추겼다. 이토록 솔깃한 제안을 거절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벤은 돼지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이 모든 것이 갑자기 운명처럼 느껴졌다.
남의 꼭두각시가 되어 구차하게 일하는 것도, 생활비만 찔끔찔끔 받으며 숨어 사는 것도 이제 지긋지긋했다. 자신의 구질구질했던 인생도 드디어 필 때가 온 것이었다. 벤은 꼭 불에 뛰어드는 불나방처럼 라일린의 뒤를 졸졸 따라갔다.
“자, 이 안으로 들어가십시오. 미리 경고하지만 점술가에게 거짓말을 하거나, 손을 대선 안 됩니다. 그랬다간 천벌을 받을 수도 있으니까요.”
천막 입구의 휘장을 친히 걷어 올려 준 라일린이 눈웃음을 지었다. 남자인데도 어쩐지 꽃이 피어날 것처럼 화사한 미소였다. 벤은 꼭 눈먼 장님이라도 된 것처럼 더듬더듬 천막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자 이국적인 향기가 코를 찌르며 후각부터 마비시켜 왔다.
벤은 알싸한 코밑을 쓱 문지르며 작은 천막 안쪽을 두리번거렸다. 안은 꼭 별세계처럼 어두웠으나, 테이블 위에 켜진 등불만큼은 유독 밝은 황금빛이었다. 덕분에 벤은 테이블 맞은편에 앉아 있는 점술사를 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