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저게 뭐지?’
아네트의 속마음을 읽기라도 하듯, 라일린이 한쪽 눈을 지그시 감았다 떴다. 그리고 입술 위에 손가락을 세우며 쓸데없이 요염하게 웃어 보였다.
“마법 아티팩트랍니다. 사람 찾는 덴 이만한 게 없죠.”
말을 마친 라일린이 눈을 내리감고 뭔가를 중얼거렸다. 그러자 그의 손바닥 위에 얹혀 있던 나침판이 미약한 푸른 빛을 발했다. 지금껏 평범하게 한쪽을 가리키던 바늘이 별안간 빙글빙글 도는가 싶더니, 이윽고 어딘가를 향했다.
“저기인가 보군요.”
라일린이 자연스레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네트는 말없이 그 손을 빤히 바라보았다. 평소엔 그토록 제멋대로 닿았다 떨어졌다 하더니, 오늘은 꼭 아네트의 의사를 묻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가늘게 눈웃음을 지은 라일린이 그녀를 설득하듯 속삭였다.
“잡으세요. 사람이 많고 혼잡해서 잃어버릴 수도 있으니까요.”
아네트는 잠시 갈등했지만, 천천히 그 손을 잡았다. 이번만큼은 라일린의 말이 맞았다. 안 그래도 후드를 눌러쓰고 있어서 아네트의 시야는 몹시 좁았다. 방금도 미처 겜블 테이블을 발견하지 못해, 모서리에 찍힌 허벅지가 아려왔다. 이 시장판 같은 곳에서 라일린을 잃어버리기라도 한다면 찾기 어려울 것 같았다. 기껏 목표를 코앞에 두고 그럴 순 없는 노릇이었다.
입술을 깨문 아네트가 나침반의 바늘이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았다.
‘그가 이곳에 있어.’
벤 마치가, 자신의 마부였던 이반이 이곳에 있었다. 대체 어디로 간 건지 감옥에서 빼돌려져 그 행적을 알 길 없었던 그가 자신과 같은 공간에 있다니. 도무지 현실감이 들지 않았다.
왕세자비가 되기로 했던 자신의 미래를 빼앗고, 누명을 씌워 추락시킨 장본인. 그리고 라펠의 지나치게 비밀스러운 과거사를 알고 있는 유일한 외가 쪽 혈육. 전생엔 그토록 찾아도 끝내 찾아내지 못했던 자였다.
아네트는 벤 마치를 만나기 위해 떨리는 발걸음을 옮겼다. 라일린은 이 사람 많고 번잡한 장소에서도 용케 나침반을 잘 따라갔다. 아네트는 그의 손에 의지해 비틀거리며 걸었다. 너무 긴장한 나머지 심장이 쿵쿵 뛰고, 입안이 바짝 말랐다. 드디어 발걸음을 멈춘 라일린이 저 멀리 어딘가를 가리키며 아네트에게 속삭였다.
“아마 저 자인가 보군요. 맞습니까? 확인해 보십시오.”
아네트는 후드 그림자 밑으로 눈을 크게 뜬 채 그쪽을 바라보았다. 허름한 블랙잭 테이블에 앉아 있는 남자들이 몇 보였다. 처음엔 그들 중 누가 벤 마치인지 선뜻 알아보지 못했다. 사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회귀한 세월까지 합치면, 아네트는 거의 5년간 그를 보지 못했으니까.
여기에 벤 마치는 지독하리만큼 평범한 남자였다. 특색이 없는 그의 얼굴은 이런 인파들 속에 파묻혀 있을 때 더더욱 눈에 띄지 않았다. 그나마 몇 초간 집중한 끝에, 아네트는 드디어 테이블 중앙에 앉은 벤 마치를 찾아내었다. 놀란 그녀의 동공이 잠시간 지진을 일으켰다.
‘……대머리가 되었잖아?’
그랬다. 아네트가 쉽게 벤 마치를 찾아내지 못한 건 이 때문이었다. 머리칼이 비록 적게나마 붙어 있는 것과, 아예 문어가 되어 번쩍이는 데에는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었다. 아네트는 지나치게 훤해져 버린 벤의 머리통을 보면서 저도 모르게 한 손으로 입을 막았다.
아무래도 세상에 신이 있긴 한 모양이었다. 나쁜 짓을 한 놈에게 머리칼을 빼앗아 가다니. 물론 전생의 원통함을 지우기엔 많이 부족했지만, 조금 위로받는 기분이 든 건 사실이었다.
어쨌든 벤 마치를 발견한 이상, 그를 붙잡아야 했다. 전생에 그토록 찾고 또 찾아도 기어코 못 찾아냈던 남자였다. 그의 배후가 무려 왕이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아네트는 당장이라도 그를 잡지 못하면 또 눈앞에서 사라져 버릴까 봐 초조해졌다. 하지만 발걸음을 옮기려는 그녀를 옆에서 붙든 건 라일린이었다.
“지금 어딜 가십니까?”
“몰라서 묻는 건가요?”
아네트가 당장이라도 저걸 안 잡고 뭐 하냐며 눈으로 물었다. 이를 본 라일린이 작게 웃으며 그녀를 만류했다. 슬그머니 아네트의 어깨에 팔을 두른 그가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그 끝엔 벤 마치가 앉아 있는 블랙잭 테이블의 딜러가 있었다. 딱 봐도 험상궂게 생긴 얼굴에 안대까지 차고 있는 것이, 범상치 않은 인물이었다.
“이런 불법 카지노에선 고객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생각하죠. 일단 살려만 둔다면, 제 발로 찾아와 끝없이 돈을 꼬라박을 테니까요. 만약 우리가 이 자리에서 저 남자를 잡으려고 든다면? 과연 어떤 소란이 벌어질지 짐작할 수 있겠습니까?”
라일린의 말을 알아들은 아네트가 섬세한 눈썹을 찡그렸다. 하지만 그는 그것만으론 만족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카지노 딜러를 가리킨 그가 조곤조곤한 어조로 설명을 마저 이어갔다.
“저희가 달려드는 그 즉시, 저 딜러는 주위 등불을 다 꺼버릴 겁니다. 그리고 어둠을 틈타 테이블 밑의 비밀 통로로 고객을 내보낸 후, 문을 잠가 버리겠죠. 때마침 주위를 어슬렁거리던 저 가드들도 얼른 연막을 피울 겁니다. 그리고 감히 카지노를 위협하려 드는 외부 세력을 제거하려 들겠죠.”
바로 귓가에서 들려오는 라일린의 목소리에 아네트가 흠칫 놀라 좀 떨어졌다. 아무리 주위가 시끄러워도 그렇지, 그의 입술이 금방이라도 귓바퀴에 와 닿을 것 같아서 조금 민망했다. 그러자 라일린이 자신을 의식하는 듯한 그녀의 모습을 보고 야릇하게 웃었다.
“어쨌든 그렇게 되면 말입니다. 행여 벤 마치를 잡더라도 저희 입장이 아주, 대단히 난감해질 겁니다. 그러니 일을 조용히 처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제 말 이해하시겠습니까?”
이런 불법 카지노에 와볼 일이 없었던 아네트는 아무것도 몰랐다. 하지만 자신 대신 이곳을 잘 아는 타인의 조언을 수용할 마음가짐은 되어있었다. 그녀는 초조함에 연신 입술을 깨물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인내심에 라일린이 새삼 기특하다는 눈빛을 보내왔다.
“좋아요.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요?”
아네트는 그의 칭찬엔 별 관심이 없었다. 그저 최대한 안전하고 신속하게 벤 마치를 잡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녀의 질문을 받은 라일린이 생글생글 웃으며 바로 옆에 있던 천막의 휘장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이 안으로 들어가라는 듯 아네트를 바라보았다.
“여긴……?”
천막 안으로 들어선 아네트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세 평이나 될까 싶은 천막 안은 좁고 어두웠다. 그 안에서 풍기는, 어딘지 모르게 이국적인 몰약의 냄새가 코를 찔렀다. 아무래도 라일린이 이곳에 뭔가를 준비해 놓은 모양이었다. 이를테면 쥐새끼를 잡을 덫 같은 것 말이다.
천막 내부는 온통 붉은색의 천으로 장식되어 아늑하고도 몽환적이었다. 그곳에 든 가구라곤 오직 2인용 테이블 하나와 의자 두 개뿐이었다. 라일린은 그녀가 안 보는 새를 틈타, 손가락을 튕겨 테이블 위의 등불에 불을 켰다. 그러자 황금빛의 신비로운 불빛이 좁은 천막 안을 가득 채웠다.
아네트는 밝아진 시야를 통해 테이블 위에 얹혀 있는 웬 수정구슬을 하나 발견할 수 있었다. 이를 본 아네트의 얼굴이 불길한 예감으로 일그러졌다.
“설마, 라일린 씨. 이거…….”
“네, 그 설마가 사실이랍니다.”
라일린에게서 확인 사살을 당한 아네트는 말없이 수정구슬을 내려다보았다. 아무래도 이곳으로 벤 마치를 끌어들여, 남의 눈을 피해 잡자는 것 같은데. 그러려면 자신이 뭔가 우스꽝스러운 역할을 떠맡게 될 것 같았다.
고개를 돌린 아네트가 진심이냐는 듯 라일린을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그가 어깨를 으쓱하며 대꾸했다.
“제가 왜 고객님의 아름다운 머리 위에 이런 후드를 씌워놓았겠습니까?”
“저한테 약팔이를 시키려고요.”
아네트가 즉각 대꾸했다. 자신을 마약 밀매꾼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던 창부의 얼굴이 아직까지 눈에 선했다. 어차피 이 허름한 후드도 다 라일린이 준비해 준 것이었다. 아마 뼛속부터 귀족인 자신을 그루티 4번지에 별 위화감 없이 녹아들게끔 하려던 거겠지.
하지만 이제 보니 다른 목적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는 자신에게 우스꽝스러운 점술가 역할을 시키려고 처음부터 작정한 게 틀림없었다.
“하하하! 고객님께선 역시 재미있으시군요. 아주 좋습니다.”
아네트의 가차 없는 대답을 들은 라일린이 뭐가 그리 즐거운지 웃었다. 그녀는 외모만 보면 지루하고 보수적일 것 같은데, 제법 톡 쏘는 재치가 있었다. 라일린은 그 뜻밖의 매력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웃음기가 남은 아름다운 얼굴을 숙인 그가 아네트에게 속삭였다.
“좋습니다. 그럼 가 볼까요? 본격적인 약을 팔러.”
아네트는 이제 약 그만 팔고 싶었다. 그녀는 끙, 소리를 내며 반박했다.
“하지만 그는 제 마부로 십 년이나 일했었다고요! 제 목소리를 듣는 순간 곧바로 눈치챌걸요?”
“그건 제가 알아서 해 드리죠. 걱정하지 마십시오.”
라일린이 빈틈없이 얄미운 얼굴로 웃었다. 이에 할 말을 잃은 아네트는 말없이 눈을 감고 체념했다. 약팔이에 이어 점술가 노릇이라니. 그녀의 두 번째 인생은 예상보다 훨씬 많이 험난했다.
벤 마치는 충혈된 눈으로 손에 쥔 카드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카지노의 거의 모든 도박을 할 줄 알았지만, 오늘은 특별히 블랙잭을 골랐다.
대개 도박꾼들에겐 그날 베팅할 게임을 고르는 일종의 ‘징크스’가 있기 마련이었다. 벤 마치의 경우는 카지노 안을 한 바퀴 쭉 둘러보았을 때, 처음으로 보이는 금발 여자를 찾는 편이었다. 그녀가 플레이하거나 바라보는 쪽의 게임이 속칭 ‘행운의 게임’이 되는 것이다.
그가 지금 블랙잭을 플레이하고 있는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하지만 오늘 징크스는 아무래도 꽝인 모양이었다. 조명이 밝아서 갈색 머리를 금발로 잘못 본 걸까? 벤은 미간을 찌푸리며 자신의 카드 합을 더해보았다.
‘제길, 애매하잖아! 이걸 어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