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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화





















“세상에! 네 고용주가 누구니? 어떤 미친놈이 여자를 약팔이로 써?”



아네트의 고민과 달리, 여자는 그녀의 정체 자체에는 별 관심 없었다. 그루티 4번지는 무법 지대였고, 마약을 판매하는 약제상과 그 심부름꾼 격인 약팔이들이 사방에 널려있었다. 대부분의 약팔이들은 허름한 로브를 눌러쓰고 얼굴을 가린 채 싸구려 마약들을 팔았다. 일종의 직업 유니폼인 셈이었다.



맨 처음 그녀가 아네트를 약팔이로 착각한 것도 낡은 로브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네트가 여자란 걸 안 이상, 그녀가 분노할 이유는 딱 하나였다. 위험한 걸 알면서도 여자를 약팔이로 쓴 약제상에 대한 반발감!



“무슨 그런 상도덕도 없는 놈이 다 있담?! 아무리 쓰고 버리는 약팔이라지만 이건 너무한 거 아냐? 위험한 걸 뻔히 알면서!!”



여자는 손에 든 연초를 파삭 움켜쥐며 애꿎은 약제상을 욕했다. 거친 포장지로 허술하게 말린 연초에서 말린 가루가 후드득 떨어졌다. 그제야 아네트도 상황을 대충 파악했다.



제아무리 무법 지대라도 일종의 암묵적인 룰들은 존재했다. 그중 하나가 약팔이는 무조건 남자여야 한다는 것. 안 그래도 마약 중독자들은 약에 취하면 남자에게조차 제 물건을 비벼대는 역겨운 것들이었다. 이 때문에 물건이 댕강 잘려나가도 아픔조차 느끼지 못하는 게 중독자들의 무서운 점이었다.



근데 하물며 여자에게 약팔이를 시키다니! 아마 채 이틀도 가지 않아 그루티 4번지에서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질 게 틀림없었다. 여자는 혀를 차며 눈앞의 가엾고 왜소한 약팔이를 훑어보았다.



‘가엾기도 하지. 약제상 하나 잘못 만나서 원.’



평소 같았으면 약팔이의 얼굴 따윈 관심도 없었겠지만, 아무래도 이번만큼은 봐 놓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그래야 조만간 변사체로 발견되더라도 시체라도 수습해 주지. 물론 이 ‘수습’이란 건 대개 시체에 남은 돈 되는 것들을 팔아치운다는 의미가 더 강했지만, 어쨌든.



매춘부는 아네트의 커다란 후드 밑으로 고개를 불쑥 들이밀었다. 짙게 화장한 여자의 눈은 갈색 반점이 섞인 푸른색이었다. 그 눈이 후드 틈새로 자신의 얼굴을 훔쳐보기 직전, 아네트가 황급히 그녀의 어깨를 잡아 저지했다. 그러자 성격 급한 여자가 바락 짜증을 부렸다.



“아, 얼굴 좀 보자! 뭐 그리 비싼 얼굴이라고 그렇게 꽁꽁 가려? 괜찮아! 여기 너 말고도 널린 게 약팔이들이야!! 새삼 부끄러워할 거 없어!!”



그녀의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주위 시선들이 슬슬 이쪽을 향했다. 누군가가 ‘에렌은 또 저러고 있네. 약 기운 떨어졌나 봐.’라고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무래도 꽤 상당한 중독자인 모양이었다. 몸속에 쌓인 약 기운 때문에 저리도 감정 기복이 심한 것이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네트는 여전히 필사적으로 후드를 눌러쓴 채 얼굴을 사수했다. 다행히 아네트가 상대 여자보다 키가 작았기 때문에, 그녀가 얼굴을 훔쳐볼 만한 각도가 잘 나오지 않았다. 결국 포기한 여자가 칫 소리를 내며 조금 떨어졌다.



“됐어! 나도 네 얼굴 같은 거 안 궁금해!! 그래 봐야 네가 나보다 예쁘기라도 하겠니? 더는 시간 낭비하기 싫으니까 약이나 줘 봐!!”



연초의 그을음이 약간 남은 새하얀 손바닥이 아네트를 향했다. 아네트는 그 손가락들이 약간 떨리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정말로 약 기운이 떨어져서 이러는 모양이었다. 대체 왕가에선 빈민가가 이토록 마약 소굴이 될 때까지 뭘 한 건지, 원.



어쨌든 사람들의 이목을 끈 이상, 약팔이가 아니어도 그런 척을 할 필요는 있었다. 안 그래도 생각해 둔 바가 있었던 아네트는 소매를 뒤졌다. 최대한 약팔이답게 수상쩍어 보이는 몸짓을 취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러자 아니나 다를까, 여자가 기대 어린 눈빛을 했다.



“여기, 새로 나온 물건이에요. 공짜로 드릴 테니 한번 맛보세요.”



아네트는 시치미를 뚝 떼고 천연덕스럽게 그녀의 손바닥 위에 무언가를 올려놓았다. 이를 본 여자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녀는 연기로 들이마시는 마약에 익숙한지라, 이런 형태의 마약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이게 뭐지?’



얇은 은박 포장지에 쌓인 그것은 도통 태우는 것처럼 생기진 않았다. 어쩐지 포장지가 유독 반짝이는 게 비싸 보이긴 했지만, 그럴 리 없었다. 이곳은 빈민가였으니까. 아마도 자신이 잘못 본 것이리라.



“이거 어떻게 태우는 거야?”



“태우는 게 아니고 먹는 거예요. 이렇게 포장지를 까서, 아 하고 입에 넣어보세요.”



그랬다. 아네트가 그녀에게 건넨 건, 아까 라일린에게서 받은 최고급 생초콜릿이었다. 애초에 델티움에선 초콜릿의 원료가 나지 않았다. 따라서 모든 초콜릿은 해외에서 수입해 와야 했고, 도중에 녹거나 변질되기 쉬워서 귀족이 아니면 입도 댈 수 없을 만큼 비쌌다.



당연히 그루티 4번가에서 몸을 파는 창부가 초콜릿을 먹어본 적 있을 리 없었다. 그녀는 얼떨결에 아네트가 입에 넣어준 생초콜릿을 먹더니, 눈을 크게 떴다. 뭔가 쌉싸름하면서도 달콤하고, 진하면서 부드러운 맛이 깊은 여운을 남겼다. 혀끝에 휘감기다 사르르 녹아 사라지는 감촉이 안타까울 지경이었다. 자신의 입을 틀어막은 그녀가 놀라서 아네트를 쳐다보았다.



“이, 이게 신종 마약이라고? 이름이 뭐야?”



“닙스(Nibs).”



아네트는 ‘카카오닙스’라는 이름 대신, 끝부분만 간략히 알려주었다. 다행히 여자는 이게 마약이 아니란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아마 초콜릿이 본연의 씁쓸한 맛을 간직하고 있었기에 그런 게 틀림없었다. 그녀는 아직 초콜릿의 뒷맛이 남은 입안을 우물우물하더니, 아쉬운 눈으로 아네트를 흘끗거렸다.



“그, 저기. 새로 나온 거라 그런지 약효가 좀 약한 것 같은데? 화악 퍼지는 느낌이 없잖아. 좀 부족해.”



그러니 하나 더 줘 보란 소리였다. 어쨌든 이게 마약이 아니란 걸 들키지 않은 게 어디인지. 아네트는 약 파는 사람답게 나긋나긋한 태도로 그녀의 손바닥 위에 초콜릿을 두세 개 더 올려주었다. 마음 같아선 한 곽을 통째로 주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의심을 살 수도 있었다.



“이건 효과가 천천히 올라오는 물건이니까 너무 조급해하지 마세요. 아마 30분 후면 약 기운이 돌 거에요. 샘플 더 드셔 보시고, 마음에 들면 또 찾아주세요.”



“……겉보기와 달리 장사 좀 할 줄 아는데? 좋아! 먹어보고 말해주지. 고마워!”



도도한 태도와 달리, 여자는 소중하게 초콜릿을 감싸 쥐고 뒤돌아섰다. 좀 있으면 장사를 시작할 시간이었다. 아네트는 그런 여자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몸을 돌렸다. 그리고 자신의 코앞에 서 있는 남자를 발견하고 흠칫 놀랐다.



“저런. 미아가 된 아가씨를 찾으러 왔는데, 뜻밖의 선행을 목격하고 말았군요.”



이젠 짙푸른 머리칼이 된 라일린이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붉은 입술이 보기 좋은 호선을 그렸다. 말로는 지금 막 찾으러 온 것처럼 굴었지만, 처음부터 계속 지켜본 게 틀림없었다.



아네트는 굳이 그에게 ‘어딜 갔었냐, 왜 날 두고 갔었냐’ 따위의 뻔한 질문을 하진 않았다. 애초에 자신이 당황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 부러 두고 간 남자인데 무슨. 라일린이 원하는 질문을 해서 즐거움을 안겨줄 마음은 없었다. 그녀는 부러 무심한 어조로 용건만 딱 집어 물었다.



“그래서 카지노는 찾았나요? 이제 시간이 얼마 없어요.”



“물론이지요. 가실까요?”



아네트는 에스코트하듯 내민 그의 팔을 붙잡고 발걸음을 옮겼다. 이제 정말로 벤 마치를 잡을 시간이었다.









그루티 4번가에 위치한 카지노는 겉보기엔 꼭 커다란 서커스장 같았다. 건물이 아닌, 크고 튼튼한 천막으로 된 외벽은 알록달록한 흰색과 빨간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그 안에서 대낮처럼 환히 밝혀진 등불들이 눈을 아프게 할 지경이었다.



안으로 들어선 아네트는 자욱한 연초 냄새에 눈살을 찌푸렸다. 가뜩이나 환기도 잘 안 되는 곳이라, 연기가 뿌옇다 못해 지독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 안에 바글바글 들어차 있는 사람들은 아무도 이를 신경 쓰는 것 같지 않았다. 카드패를 들여다보는 그들의 핏발 선 눈이, 주사위를 향해 돌아가는 고갯짓들이 꼭 넋 나간 사람처럼 섬뜩했다.



아네트는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벤 마치를 찾을 순 없었다. 연기도 자욱했고, 사람도 너무 많았다. 사방팔방에 게임판이며 온갖 물건들이 잔뜩 쌓여 있어 시야를 방해했다. 한숨을 내쉰 아네트가 라일린을 올려다보았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죠?”



“잠시만 기다려 보십시오. 제가 찾아보죠.”



다행히 라일린도 이곳에서 빨리 나가고 싶은 모양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글쎄요, 어떻게 할까요?’ 식으로 뜸을 들였을 라일린이었다. 하지만 그는 지금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오가는 사람들과 몸이 닿지 않게끔 주의하고 있었다.



라일린에게 걸린 마법은 사람들의 이목을 분산시키는 역할을 했다. 하지만 이처럼 협소하고 사람 많은 곳에선 독이나 다름없었다. 라일린의 존재를 인지하지 못한 사람들은 그에게 마구 부딪히고, 발을 밟으려 들었다. 이를 질색한 라일린이 얼른 품속에서 금으로 된 나침반 하나를 꺼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