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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화





















그루티 4번지의 거리와 건물들은 무척 초라한 편이었다. 곳곳에 금이 간 벽들과 말라죽은 넝쿨로 뒤덮인 담벼락은 보기만 해도 스산했다. 그나마 며칠 전 비가 와서 그런지, 거리가 그리 지저분하지만은 않아서 다행이었다. 그래 봐야 부츠를 버리는 건 이미 확정된 사실이었지만 말이다.



아네트는 골목 담벼락의 그늘에 모여앉은 험상궂은 남자들을 흘끗 바라보았다. 그들은 저 멀리서 싸구려 연초를 피우는 창녀들을 보며 낄낄대고 있었다. 그 눈에 서린 음탕한 빛에 아네트는 저도 모르게 후드를 더 깊이 눌러썼다. 칙칙한 건초색 로브로 온몸을 가리다시피 했지만, 그래도 자신이 이방인이란 티가 날까 봐 두려웠다.



괜히 앞섶을 더 꼼꼼히 여민 아네트가 앞에 가는 라일린을 작게 불렀다.



“라일린 씨.”



“네, 고객님.”



“혹시 이 주위에 호위를 숨겨 두셨나요? 아니면 따라오는 다른 동행이라도?”



“아뇨, 그런 것 없는데요? 제가 사람이 많으면 불편해하는 타입이라서.”



돌아오는 라일린의 천연덕스러운 대답에 아네트는 이마를 짚었다. 이러다 질 나쁜 범죄자 무리에게 시비라도 걸리면 어쩌려고 이러는 건지. 대책이 없어도 너무 없어서 현기증이 날 지경이었다. 정보를 다루는 그가 설마 그루티 4번지의 악명을 모를 리는 없을 텐데.



아네트가 가늘어진 눈으로 그를 바라보자, 라일린이 능글맞게 농을 걸었다.



“낯선 곳이라 긴장하셨나 보군요? 그럴 땐 당분이 최고지요. 자, 하나 드세요.”



라일린이 건네준 건 초콜릿 곽이었다. 델티움에선 초콜릿 원료가 나지 않았으므로, 모든 초콜릿은 수입에 의존해야 했다. 이건 그중에서도 입에 넣으면 사르르 녹아내리는 최고급 생초콜릿이었다.



“아. 네. 고맙네요.”



아네트는 떨떠름하게 그것을 받아들었다. 초콜릿 곽을 내미는 라일린의 소매에서 번쩍 빛나는 금단추가 유독 눈에 띄었다. 그나마 아네트 자신은 후드라도 썼지, 라일린은 여봐란듯이 반짝이는 외모와 화려한 옷차림을 드러내놓고 과시 중이었다. 누가 봐도 그는 진흙에 잘못 떨어트린 보석처럼 눈에 확 띄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상하리만치 라일린을 주목하는 자들은 없었다. 사람들의 주의를 흐리게 하는 마법을 두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남들이 보기에 라일린은 마치 화려한 융단에 떨어진 와인 한 방울 같았다. 뭔가 거슬려서 자세히 보려고 해도, 현란한 무늬 때문에 눈이 어지러워 집중할 수 없는 느낌이랄까?



설마하니 라일린이 몇 안 되는 마법사라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는 아네트는 이를 신기하게 여겼다. 아무래도 그가 이 구역의 그…… 담당 무뢰한인지 뭔지 하는 존재인가 보다, 생각하면서.



‘아마도 따로 준비해 둔 안전망이 있는 거겠지.’



아네트는 어쨌든 라일린을 신뢰하는 편이었다. 물론 사람 자체는 의뭉스럽기 짝이 없었지만, 일 처리 하나만큼은 완벽해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아마 라일린이 호위를 따로 동반하지 않은 데에는 다 이유가 있으리라. 설마하니 이런 뒷골목에서 자신과 같이 비명횡사하고 싶은 게 아닌 이상에야.



아네트는 비딱한 눈으로 라일린의 뒤통수를 바라보았다. 길던 머리칼을 짧게 쳐내서 그런지 새하얀 목줄기가 곧게 뻗어있는 게 유독 눈에 띄었다. 남자의 것이라 딱히 가늘지도 않은 목이거늘, 묘하게 요염한 라인이었다. 그녀의 시선을 느낀 라일린이 가늘게 웃는 눈으로 돌아보며 재촉했다.



“자, 빨리 가시죠. 찾던 생쥐가 도망가버리기 전에.”



틀린 말이 아닌지라 아네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자신은 평민들의 세계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 그렇다면 남은 선택은 오직 라일린을 믿고 가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그는 지금껏 단 한 번도 아네트를 실망시킨 적이 없었다. 자연히 그의 뒤를 따르는 아네트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라일린은 놀라우리만큼 가벼운 발걸음으로 그루티 4번지를 횡단했다. 산뜻한 걸음으로 내딛는 그의 몸놀림은 꼭 5월의 산들바람처럼 가벼웠다. 누가 보면 오물이 가득한 골목길이 아니라, 꽃길이라도 거니는 사람인 줄 알 터였다.



덕분에 이런 험한 길을 처음 걸어보는 아네트는 그의 뒤를 쫓느라 죽을 지경이었다. 이토록 중요한 일을 앞두고 불평이나 하는 사람이 되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이쯤 되니 벤 마치보단 오히려 사신 쪽과 먼저 재회할 기세였다. 그녀는 결국 헐떡이며 저만치 앞서가는 라일린을 불러세웠다.



“조금만 천천히 가요, 라일린 씨. 이러다 놓칠 것 같아요.”



“저런. 많이 힘드신 모양이로군요. 부축이라도 해 드릴까요?”



몸을 빙글 돌린 라일린이 순진한 표정으로 물었다. 어쩐지 이걸 노렸다는 듯 그의 눈동자가 반짝이는 것 같기도 했다. 당연히 이런 개수작에 넘어갈 아네트가 아니었다. 그녀는 대답하기도 싫다는 듯 작게 손사래를 쳤다. 그러자 라일린이 방글방글 웃으며 다시 휙 앞서가 버렸다.



“하.”



이를 본 아네트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아마도 슬럼가라는 낯선 곳에 온 자신을 놀리고 싶은 모양이었다. 이제 아네트는 뒤틀린 구석이 있는 라일린의 ‘유머 감각’이라는 것을 슬슬 파악하고 있었다. 그래서 라일린의 훤칠한 뒷모습이 저 멀리 사라져 가는데도 오히려 발걸음을 더 늦췄다. 어차피 힘들어서 더 빨리 걷는 건 무리였다.



라일린이 겉으론 자신을 팽개치고 가는 것 같아도, 이것은 엄연히 의뢰였다. 그러니 자신이 위험에 빠진다든지, 엉뚱한 길로 잘못 접어들면 금방 찾으러 올 터였다. 지금껏 늘 그랬듯 어디선가 불쑥 튀어나오겠지. 꼭 마법사처럼 말이다.



아네트는 의뢰에 한해서는 라일린을 굳게 믿었다. 고로 혼자여도 당황할 필욘 없었다. 라일린에게 순순히 놀아나 줄 마음이 없는 그녀는 침착하게 약도를 펼쳤다. 그리고 길을 더듬어 카지노를 찾기 시작했다. 그러다 그만…….



찰박―



오물을 밟아 버렸다. 지도에 집중하며 걷다 보니, 자연히 발밑에 허술해지고 말았다. 확실히 아네트처럼 평생을 호화로운 것들에 둘러싸여 살아온 귀족에겐 이런 환경이 충격적이었다. 그녀는 오물은커녕 먼지 한 톨 없이 반짝이는 대리석 바닥이 더 익숙한 사람이었다.



아네트는 한숨을 내쉬며 최고급 가죽 부츠에 묻은 오물을 흙바닥에 대충 닦아내었다. 그나마 부츠가 제값을 해줘서 안쪽까지 오물이 새어 들어오진 않았다.



그래도 난생처음 오물을 밟아본 경험이 다소 충격적이긴 했다. 이토록 지저분하고 협소한 곳에서 사람들이 거주한다니. 눈으로 직접 보지 않았다면 믿기 어려웠을 것이다. 찝찝하기 그지없는 부츠 밑창을 자꾸만 바닥에 문지르며 아네트는 다짐했다.



‘빨리 이 일을 끝마치고 여기서 나가야겠어.’



지금은 아무도 그녀를 주목하지 않았다. 물론 허름한 후드 탓도 있겠지만, 얼굴을 가린 그녀를 일종의 ‘동류’로 생각했기 때문일 터였다. 워낙에 현상 수배범도 많고, 불법적인 일들도 많이 하는 곳인지라 아네트 같은 모습을 한 자들이 흔했다. 그들은 아마 아네트가 평범한(?) 싸구려 마약 밀매꾼인 줄 알 터였다.



덕분에 아네트는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몸을 옹송그린 채 살금살금 전진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길을 잃어버리고야 말았다. 거주민이 늘어날 때마다 아무렇게나 덧붙여진 그루티 4번가의 거리는 꼭 거미줄처럼 복잡했다. 이 때문에 뻔히 약도도 있고, 그걸 볼 줄 아는 눈도 있는데 결국 길을 잃어버리고야 말았다.



‘이상하다, 분명 이 근처일 텐데.’



아네트는 제자리에 서서 미간을 찌푸리며 고민했다. 이런 곳에 혼자 있어서 그런가, 마음이 초조해졌다. 얼른 카지노를 찾아서 그곳에서 벤 마치를 붙잡아야 하는데. 제아무리 눈에 띄지 않는 차림이라 해도, 이런 데에서 혼자 얼쩡거리다 보면…….



“어이, 거기 너!! 이리 좀 와 봐.”



……시비가 걸리기 마련이었다. 어디서 많이 본 전개에 아네트는 후드 밑으로 눈을 힐끔 들어 올렸다. 보통 이런 시비는 졸렬한 깡패 무리가 걸기 마련이었는데, 역시 현실은 소설과 좀 달랐다. 뜻밖에도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아네트를 부른 건 웬 헐벗은 미녀였다. 손에 싸구려 연초를 든 그녀는 정확히 아네트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래, 너. 잠깐 이쪽으로 와 보라고.”



아네트는 손에 약도를 쥔 채 얼어붙었다. 물론 매춘부를 본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귀족들도 나름대로 코르티잔이라는 고급 매춘부를 끼고 다녔다. 하지만 그녀들은 귀족을 상대하기 위해 적합한 교양이라는 걸 갖추고 있었다. 호화로운 차림새는 언뜻 보면 돈 많은 하급 귀족 부인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하지만 눈앞의 여인은 딱 보기에도 건전한 옷차림에 별 관심이 없어 보였다. 진한 화장에 붉은 입술, 약간 헝클어진 더티 블론드를 한 그녀는 섹시했지만 천박했다. 그리고 유륜이 얼핏 보일 만큼 깊이 파인 드레스를 걸치고 있었다.



아니, 애초에 저걸 드레스라고 부를 수 있는 걸까? 아네트의 눈엔 슬립에 더 가까워 보이는 차림이었다. 그런 엄청난 모습을 한 여자가 이리 오라며 자신을 부르고 있었다.



‘어떡하지?’



아네트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갈등했다. 차라리 소설에 나오는 뻔한 전개대로 덩치 큰 깡패들이 나왔다면 이보다 덜 당황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불행히도 여인은 이런 아네트의 고민에는 관심이 없는 듯했다.



“아, 거 참 굼뜨긴!! 너 신참이니? 장사 안 할 거야?!”



버럭 고함을 친 여인이 가느다란 굽으로 또각또각 소리를 내며 아네트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장사 운운하는 걸 보니, 아무래도 뭔가를 착각하는 듯했다. 아네트에게 바짝 다가온 여자가 움츠러든 그녀의 팔목을 잡으며 고개를 확 들이밀었다. 그녀로부터 짙은 향수 냄새와 싸구려 연초 냄새가 훅 풍겨왔다.



“어디 물건 좀 보여줘. 뭐 팔아? 야바(Yaba) 있어?”



당연히 아네트가 싸구려 마약인 야바가 뭔지 알 턱이 없었다. 하지만 아네트를 마약상으로 착각한 여인은 멋대로 손을 뻗었다. 예쁜 외모와 달리 거친 손이 아네트의 허리춤을 뒤적이다 멈칫했다. 직업이 직업인지라, 그녀는 고작 허리 부근만 만져 보고도 아네트의 성별을 눈치챘다.



“뭐야. 너 여자니?”



여자가 곱게 화장한 눈썹을 찌푸렸다. 이를 본 아네트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혹시 자신의 정체를 들킨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