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라펠의 뜬금없는 질문에 아네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전에 얘기했을 땐 알았다고 하더니, 왜 갑자기 지금 이러는지. 그러나 아네트의 화장대 옆 벽에 등을 기댄 라펠은 심통이 잔뜩 난 얼굴이었다. 이를 본 아네트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왜요? 제가 셀레스틴의 저택에 방문하는 게 싫은가요?”
“……아니, 뭐. 그쪽 가문은 보안과는 거리가 멀어. 당신이 안전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별로 믿음이 안 가.”
라펠이 차마 그렇다곤 하지 못하고 불퉁하게 대꾸했다.
자신의 촉촉한 흑발을 쓸어올린 그가 가만히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 아네트의 새하얀 이마에 입을 맞췄다. 위에서 그녀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그의 짙푸른 눈동자가 보석처럼 빛났다. 그 눈으로 아네트를 사로잡을 듯 응시한 그가 낮게 속삭였다.
“그러니 가지 마, 아네트. 여기에 있어.”
차마 나랑만 있어 달라는 얘긴 할 수 없었다. 말할 수 없는 집착을 담은 라펠의 손이 아네트의 손등 위를 덮고, 손가락 사이사이를 끈끈하게 얽었다. 마치 사냥감을 옭아매는 거미처럼 집요한 모습이었다. 눈을 깜박이며 그런 라펠을 물끄러미 올려다보던 아네트가 이윽고 웃었다.
“밤에 잠이 안 올까 봐 그래요? 안 그래도 당신에게 줄 게 있어요.”
화장대의 서랍에서 작은 선물을 하나 꺼낸 아네트가 이를 내밀었다. 그러자 라펠은 마지못해 아네트의 손을 놓고 그것을 받아들었다. 바스락대는 은빛 포장지를 풀자, 그 안에서 모습을 드러낸 건 작은 오르골이었다.
“이게 뭐지?”
라펠이 떨떠름한 얼굴로 그것을 내려다보았다. 검은 실크에 금장을 박아 장식한 오르골은 아주 아름답고 화려했다. 하지만 다 큰 성인 남자에게 선물로 줄 만한 물건은 아니었다. 라펠은 제 손바닥의 절반도 안 되는 자그마한 상자를 내려다보며 눈썹을 찡그렸다. 이 모습을 본 아네트가 재밌다는 듯 웃으며 권했다.
“한번 열어봐요. 어서요.”
저렇게 웃으며 권하면 안 들어줄 수가 없었다. 이미 심장을 붙잡힌 라펠은 한숨을 쉬며 손끝으로 오르골 뚜껑을 열었다. 그러자 그 안에서 어딘지 익숙한, 그리운 멜로디가 흘러나왔다. 라펠은 미간을 모으며 심각한 표정으로 이 멜로디가 뭔지 고민했다. 그러자 문득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다.
“이건…… 당신이 가끔 흥얼거리던 노래군. 그렇지?”
“맞아요. 자장가에요.”
아네트가 속눈썹을 내리깔며 복잡한 눈빛을 숨겼다. 만약 자신이 오스란드로 떠나게 되면, 라펠은 혼자 남겠지. 그리고 밤마다 또 수면장애에 시달리게 될지도 몰랐다. 그때는 능력을 써서 재워 줄 자신이 없으니, 그 대신 오르골이라도 주고 갈 작정이었다. 물론 오르골에 능력을 담을 순 없으니 별 효과는 없겠지만…… 그래도 이렇게라도 해 주고 싶었다.
‘가엾은 사람.’
속눈썹 그늘에 가려진 아네트의 눈동자가 울 것처럼 흐려졌다. 그를 두고 간다는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저몄다. 이런 아네트의 속마음을 알 리 없는 라펠은 무표정한 눈으로 오르골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 들어온 건 호숫가처럼 채색된 짙푸른 색유리 위를 빙글빙글 도는 인형이었다. 도자기로 만들어진 작고 정교한 인형은 꼭 요정 같았다. 섬세한 금발에 연한 분홍색 스커트를 입고, 웃는 얼굴로 춤추는 모습이 묘하게 아네트를 닮았다. 일부러 그렇게 의도하고 만든 건지 궁금할 지경이었다.
라펠은 제 검지의 절반밖에 안 되는 그 작은 인형을 손끝으로 툭, 건드려 보았다. 이를 본 아네트가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마음에 드나요?”
“응. 고맙군.”
라펠이 체구에 맞지 않게 조심스러운 동작으로 오르골을 닫았다. 아네트가 왜 이런 선물을 준 건지 그 또한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분명 자신을 배려해 준 거니 기뻐야 정상인데, 왜 한편으론 겁이 덜컥 나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그녀 자신이 계속 자장가를 불러주면 그만인데, 왜 굳이 오르골을 선물로 준단 말인가? 꼭 어디론가 가 버릴 사람처럼.
라펠은 애써 초조함을 감추며 그것을 화장대 위에 안전하게 내려놓았다. 그리고 이 불안감을 어떻게든 상쇄시키려는 듯 조급하게 아네트의 턱을 잡고 입을 맞췄다. 처음엔 감사 인사처럼 담백했던 그 입맞춤은 곧 집어삼킬 것처럼 끈끈해졌다. 가냘픈 목덜미를 받쳐 드는 손이, 탐욕스레 어깨 뒤를 끌어당겨 밀착시키는 힘이 집요했다.
아네트는 그 휘몰아치듯 격렬한 키스에 반쯤 정신이 나가 숨을 헐떡였다. 부드러운 혀를 휘감는 그의 혀끝이, 몇 번이고 각도를 바꿔 덮쳐오는 입술이 열정적이었다. 꼭 자신에게 어떤 감정이라도 있는 듯 밀어붙여 오는 키스였다.
하마터면 거기에 휩쓸려 모든 걸 잊을 뻔했던 아네트가 급히 그의 어깨를 밀어냈다. 그러자 마지못해 아네트를 놓아 준 라펠이 조급한 얼굴로 입가를 핥았다. 유독 붉어진 그의 입술이 대단히 육욕적이었다. 그 입술을 향해 작별을 고하는 건 참으로 힘든 일이었다.
“미안해요, 라펠. 이제 정말로 가 봐야 해요.”
“이렇게 만들어 놓고 그냥 가겠다고?”
라펠이 그녀의 손을 움켜쥐고 자신의 하반신에 갖다 댔다. 손바닥 밑 얇은 천 너머로 흉흉한 크기를 자랑하는 것이 느껴졌다. 거기서 느껴지는 열기는 지나치게 뜨거워 손이 데일까 두려울 지경이었다. 은근슬쩍 그녀의 손바닥 밑에 자신의 성기를 문질러 오는 라펠의 움직임이 음란했다. 이에 뺨을 붉힌 아네트가 손을 잡아빼며 그를 달랬다.
“돌아와서 마저 해요, 라펠. 네? 그땐 당신이 원하는 건 뭐든 다 해 줄게요.”
“……뭐든지 다?”
그 말에 라펠이 노골적으로 솔깃해하는 기색을 보였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한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린 라펠의 귓바퀴가 눈에 띄게 붉어졌다. 이를 본 아네트는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내가 엉뚱한 소릴 한 건 아니겠지?’
하지만 여기서 붙잡혔다간 하룻밤을 꼬박 지새우게 될 게 뻔했다. 라펠은 지나치게 정력이 좋은 남자였고, 지치는 법을 몰랐다. 안 그래도 오늘 할 일이 많은 아네트는 서둘러 이 자리를 무마할 필요성을 느꼈다. 설령 나중에 몸 고생(?)을 좀 하게 되는 한이 있어도 말이다.
“그럼 라펠, 오늘 밤만 기다려 줘요. 정 잠이 안 오면 제가 준 오르골이라도 틀어 놓고요. 내일 아침 최대한 빨리 돌아올게요.”
자리에서 일어난 아네트가 상냥하게 그의 뺨에 키스했다. 그러자 라펠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숙여 그녀의 키스를 받았다. 그러고도 놓아주기가 아쉬워, 그의 팔이 아네트를 휘어 감고 한동안 지분거렸다. 뒤늦게 자각한 첫사랑의 감정은 말 그대로 지독했다. 그런 라펠의 품 안에서 아네트가 빠져나온 건 한참 후의 일이었다.
“오셨군요.”
턱을 괴고 앉아 있던 라일린이 그녀를 발견하고 웃었다. 처음엔 그를 알아보지 못했던 아네트의 눈이 이윽고 커졌다. 라일린은 즐거운 눈으로 그녀의 벙긋거리는 분홍색 입술을 바라보았다. 윗입술에 비해 유독 아랫입술의 중앙부가 도톰한 것이 야했다. 라일린의 머릿속 음란마귀를 알 길 없는 아네트가 드디어 첫 소감을 내뱉었다.
“머리 색이…… 바뀌었네요? 염색인가요?”
“그렇답니다. 며칠 전 좋은 염색약이 들어왔길래, 기분전환 삼아 해 봤죠.”
본디 라일린의 머리칼은 모란처럼 화려한 자주색이었다. 그 색채는 라일린의 희고 요요한 얼굴을 감싸며 고혹적인 느낌을 더해주었다. 특히나 모발 자체가 길고 곱슬거리는 컬이 들어가 있어서 더욱 화려했다. 그의 옆자리에 서면 아마 어지간한 미인들도 그 빛을 잃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오늘 본 라일린의 머리는 짙은 푸른색이 되어있었다. 그늘에서 보면 꼭 흑발처럼 보일 만큼 어두운색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전과 분위기가 확 달라졌는데, 심지어 그 아름다운 머리칼마저도 짧게 쳐냈다. 이쯤 되면 정말로 다른 사람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고작 머리 하나가 바뀌었다고 이렇게까지 느낌이 달라지나?’
염색한 사람을 본 건 처음이었다. 아네트는 신기한 나머지, 평소답지 않게 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예전엔 꼭 붉은 나비 같았던 라일린은 지금 한 송이 아이리스처럼 차분하고 아름다워 보였다. 아네트의 시선을 즐기던 라일린이 이윽고 턱을 괸 손을 치우며 관능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잘 어울리냐고 여쭐 작정이었습니다만. 굳이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군요.”
“아, 죄송해요. 제가 너무 빤히 쳐다보았죠? 무례했었네요.”
아네트는 그의 말을 듣고서야 뒤늦게 자신의 실수를 자각했다. 그녀가 순순히 사과하자, 라일린이 전처럼 입꼬리를 매끄럽게 끌어올렸다. 머리칼이 짧아져서 그런지 훨씬 남자다운 느낌의 얼굴이었다. 그러나 그 붉은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말은 전과 다를 바 없이 유들유들했다.
“고객님께서 하도 열렬히 바라보시기에, 제게 반하신 줄 알았습니다.”
“그럴 리가요. 전 이미 결혼한 몸인걸요.”
“하지만 곧 떠나실 예정이죠. 안 그런가요?”
몸을 뒤로 기댄 라일린이 가늘어진 눈으로 아네트를 바라보며 웃었다. 마치 그녀의 결혼생활이 어떤지 잘 안다는 듯이. 꼭 꿰뚫어 보는 듯한 그의 시선에 아네트는 괜히 불편해졌다. 그녀는 사생활에 다소 민감한 편이었다.
“인사는 이쯤 하고, 이제 갈까요?”
더 이상 라일린과 사담을 나누고 싶지 않았던 아네트가 고개를 까딱했다. 그러자 라일린이 우아한 몸놀림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물론이지요, 고객님. 지금부터 할 일이 아주 많으니까요.”
제법 수수하게 분장하고 온 아네트와 달리, 그는 평소처럼 화려하기 그지없는 옷차림이었다. 눈처럼 새하얀 코트 테두리에는 섬세한 금장이 박혀 있었고, 그 안에는 체크무늬 베스트와 새파란 셔츠를 받쳐입고 있었다. 아네트는 한 마리 수컷 공작새처럼 화려한 라일린을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괜찮은 걸까? 저런 옷차림으로 가도.’
그랬다. 그들이 지금부터 향할 곳은 온갖 흉악범들이 판을 친다는, 그 악명 높은 그루티 4번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