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아네트는 잠자코 자크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허락을 구하듯 셀레스틴을 흘끗 본 자크가 용기를 얻어 입을 열었다. 그의 입에서 곧이어 어마어마한 폭로가 흘러나왔다.
“놀라지 마십시오. 그는, 벤 마치는…… 자신이 폐하의 후원을 받고 있다고 했습니다! 네, 바로 그 국왕 폐하 말씀입지요!!”
지하실에 썰렁한 침묵이 흘렀다. 이미 한 번 들은 셀레스틴은 물론이거니와, 아네트도 딱히 놀란 기색은 아니었다. 속으로 다 짐작하고 있었던 사실을 재확인받은 것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만 한 가지 의아한 점이 있다면, 왕과 벤 마치의 관계였다. 둘은 정말로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다. 왕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자신의 정부였던 여자의 혈육을 조종하는 걸까? 굳이 벤 마치가 아니더라도 왕을 위해 일할 수하들은 널리고 널렸을 텐데.
그러나 자크는 청자들의 이런 반응이 영 불만족스러운 모양이었다. 그의 얼굴에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를 본 아네트가 침묵을 깨고 자크에게 추가로 질문을 던졌다.
“그래서, 그 후 벤 마치는 어떻게 되었지? 마지막으로 그를 본 게 언제인지 기억하나?”
그러자 말을 더 할 수 있게 된 자크가 기꺼이 촐랑대며 입을 열었다.
“잘 모르겠지만 아마 반년 전? 그쯤이었을 겁니다. 그날따라 벤이 무척 이상해 보였습니다. 그는 잔뜩 긴장해 있었고, 흥분과 동시에 두려워하는 것처럼 보였죠. 평소 같았으면 끝까지 했을 도박도 그날따라 좀 일찍 접었습니다. 그리고 카지노를 나선 벤은 골목에서 기다리고 있던 낯선 남자들과 함께 어디론가 가 버렸습니다. 그게 제가 벤을 본 마지막 순간이었죠.”
아네트는 깨달았다. 아마도 그것은 이반이 셀레스틴을 납치하기 전날의 일이었을 것이다. 그는 왕궁의 시종들과 결탁하여 이 납치사건을 계획했다. 그때부터 이 일의 배후가 왕이라는 사실을 짐작했어야 했는데. 셀그라티스 왕이 그깟 왕궁 시종들 몇쯤 동원하는 건 아마 일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자크의 폭로는 이게 다가 아니었다. 히죽 웃은 그가 뜻밖의 새 정보를 폭로했다.
“뭐, 제가 벤을 ‘직접’ 본 건 그게 마지막이었습니다만. 제 동료들은 또 다르지요! 아시다시피 이 업계가 다 거기서 거기고, 딜러들 또한 이 카지노, 저 카지노 전전하는 법이거든요. 덕분에 들려오는 소문들이 제법 있습니다요. 이를테면 그루티 4번지에 출근 도장을 찍기 시작한, 웬 허름한 남자에 대해서 말입니다.”
“소……문이라고? 무슨?”
아네트는 저도 모르게 되물었다. 이미 알 것 같았지만, 그래도 확실하게 묻지 않고선 견딜 수 없었다. 그토록 꼬리를 밟으려 해도 찾을 수 없었던 벤 마치의 행적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다. 이런 아네트의 반응이 기꺼웠던 자크가 가벼운 입을 놀렸다.
“아시려나 모르겠지만, 그루티 구역은 무법 지대나 다름없는 아주 위험한 슬럼가지요. 델티움의 온갖 흉악범들이 그 시궁창에 쥐새끼처럼 모여들어 허송세월을 보냅니다. 자연히 그쪽 카지노 매출이야 뭐, 말할 것도 없지요. 근데 최근, 그쪽의 담당 딜러가 제게 재미있는 소식을 말해주더군요. 이상하게도 자신의 새 고객이 제 오랜 단골 중 누군가를 쏙 빼닮았다나요? 그게 과연 누구겠습니까?”
말을 멈춘 자크가 우쭐거렸다. 그는 이 바닥에서 잔뼈가 굵은 카지노 딜러였고, 벤 마치는 도박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중독자였다. 고로 벤은 자크의 정보망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설령 다른 카지노를 이용한다 해도 말이다.
“……그렇군. 그루티 4번지라. 알겠어.”
고맙다며 고개를 끄덕인 아네트가 몸을 돌렸다. 이로써 자크에게 얻을 수 있는 정보는 모두 다 얻어낸 셈이었다. 아네트의 뒤를 따라 셀레스틴 또한 지하실을 나서자, 등 뒤에서 자크의 안절부절못하는 고함이 들려왔다.
“저는, 저는요? 아가씨들, 소인이 아는 정보는 모두 다 알려드렸습니다요!! 그러니 이제 그만 절 좀 놓아 주십쇼!!!”
그러나 셀레스틴은 가차 없이 지하실 문을 쾅 닫은 후, 그 위에 카펫을 도로 덮어버렸다. 적어도 당장은 자크를 풀어 줄 마음이 없는 모양이었다.
다행히 지하실 문은 방음이 무척 잘 되는 소재인 모양이었다. 자크에게 딱히 재갈을 물리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문을 닫자마자 사방이 고요해졌다. 그 누구도 이 밑에 사람이 갇혀 있다곤 아마 생각지 못할 것이다. 완벽히 뒷마무리를 한 셀레스틴이 고개를 돌려 물었다.
“어땠어요, 레이디 아네트? 제가 보여드린 게 도움이 좀 되었나요?”
“되고말고요. 정말 고마워요, 셀레스틴. 당신이 이런 걸 보여주기 위해 얼마만큼의 위험을 각오해야 하는지 잘 알아요. 그에 대한 보답으로 난, 반드시 당신에 대한 신의를 지키겠어요.”
아네트가 진지한 얼굴로 셀레스틴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자신에게 누명을 씌운 상대는 무려 이 델티움의 국왕이었다. 생각만 해도 손이 떨리고, 핏기가 가실 만큼 대단한 존재였다. 만약 아네트가 한 발만 삐끗해도 재앙에 가까운 결과가 초래될 수 있었다.
이는 셀레스틴 또한 마찬가지였다. 아니, 그녀의 상황은 심지어 더 나빴다. 그녀의 가문은 바이에른만큼 힘이 있는 곳도 아니었다. 셀그라티스 왕은 손가락 하나로도 키어스 후작가를 풍비박산 낼 수 있었다.
만약 셀레스틴이 조금만 더 교활했다면 이 일을 모른 척했을 것이 틀림없었다. 입만 다물고 있으면 왕세자비가 될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그녀는 두려움에 눈물을 보이면서까지도 자신이 옳다고 믿는 대로 행동했다. 셀레스틴은 남을 절벽 아래로 떠밀고서 태연히 잘 살 수 있는 그런 인간은 못 되었으니까.
“……천만에요. 내가 해 줄 수 있는 건 일단 여기까지만이에요. 자, 그럼 이제 진범도 알아냈는데 어쩔 생각인가요? 레이디 아네트.”
“솔직히 잘 모르겠어요. 제가 어떻게 해야 할지, 그리고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지금은 좀 충격이 커서 생각을 정리하기가 어렵네요.”
눈을 내리깐 아네트가 심각한 얼굴로 대꾸했다. 진범이 설마 셀그라티스 왕일 줄이야. 때론 모르는 게 약이라더니, 이쯤 되면 아무것도 모르고 병사했던 전생이 그리울 지경이었다.
아네트는 여덟 살부터 왕세자비로 내정이 되어있었다. 그때부터 왕궁을 오락가락하며 루드비히와 정기적인 만남을 가졌고, 그 과정에서 종종 셀그라티스와 마주쳤었다. 그는 그때마다 인자하게 웃으며 아네트를 ‘미래의 며늘아기’라고 불렀다.
아네트는 아직도 제 머리를 쓰다듬거나 손등을 토닥이던 왕의 손끝이 주는 메마른 감촉을 기억했다. 부친과 관계가 소원한 편이었던 그녀는 때론 셀그라티스의 자상함에서 큰 위안을 받았었다. 하지만 이 모든 게 결국은 기만이었다.
왕은 결코 바이에른 가의 여식을 며느리로 삼을 마음이 없었다. 아마 알라만드가 제 딸을 이용해 루드비히를 휘두를 것이 우려되었겠지. 왕의 입장을 이해하긴 했으나, 납득이 되는 건 아니었다. 아네트는 입술을 질끈 깨물며 속으로 생각했다.
‘그렇다면 그냥 날 파혼시켰으면 됐잖아?’
하지만 셀그라티스는 쉬운 길을 택하지 않았다. 아마 아네트를 거절하는 과정에서 알라만드와 알력 싸움을 벌여야 할 게 싫어서였을 것이다. 알라만드 또한 그리 호락호락하게 왕세자비 자리를 포기할 위인은 아니었으니까. 제 딸이 뭐가 부족해서 그러냐며 집요하게 왕을 물고 늘어졌겠지.
그래서 셀그라티스는 굳이 돌아가는 길을 택했다. 앞에선 아네트를 며느리로 받아줄 것처럼 굴었고, 뒤에선 그녀에게 누명을 씌워 실각시킬 기회만을 엿봤다. 이반이 자신의 마부로 일한 게 무려 10년 가까이 되는 세월임을 감안해 보면, 얼마나 오랫동안 이 일이 계획되었는지 알 수 있었다.
왕은 거의 아네트가 왕세자비 후보로 확정되자마자 이 일을 꾸몄던 것이다. 그 사실이, 그 오랜 기만이 아네트를 큰 충격에 빠트렸다.
“레이디 아네트, 괜찮아요? 얼굴이 창백한데.”
아네트의 낯빛이 점점 파리해지자, 이를 본 셀레스틴이 걱정스레 물었다. 그녀는 당장이라도 아네트를 부축해 주고 싶은 것처럼 바짝 다가와 있었다. 이 거리감만 봐도 셀레스틴이 제법 마음을 열어주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의 존재가 내심 고마웠던 아네트는 충격을 받은 와중에도 애써 미소했다.
“괜찮아요. 그냥 좀…… 생각해 볼 게 많아서 그래요.”
“하긴. 그건 저도 마찬가지예요. 아아, 머리가 정말 아프네요! 기껏 왕세자비가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이게 다 무슨 난리인지!”
셀레스틴이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세간에선 자신을 가리켜 운 좋은 여자라며 비아냥거렸다. 망해 가는 후작가 출신의 여식이 아네트를 제치고 왕세자비가 되다니! 겉보기엔 셀레스틴이 백마 탄 왕자의 손을 잡고 꽃길만 걸을 것 같은 모양새였다. 하지만 그 실체를 들춰 보면 이토록 추악한 현실들이 바퀴벌레처럼 기어 나왔다. 자신의 이마를 짝 소리가 나도록 짚은 셀레스틴이 한탄했다.
“정말이지 어이가 없네요. 제가 지금 왜 화가 나는지 아시나요, 레이디 아네트?”
“그냥 아네트라고 불러주세요. 무엇이 그리 마음에 걸리나요, 레이디 셀레스틴?”
이름을 허락한 아네트가 힘없이 되물었다. 처음엔 극과 극인 줄 알았던 두 여자의 신세는 알고 보니 비슷했다. 둘 다 왕의 손에서 놀아나는 예쁜 꼭두각시 인형에 불과했던 것이다. 이 점이 못내 분했던 셀레스틴은 손을 꽉 움켜쥐며 토로했다.
“제가 당신 대신 왕세자비로 정해졌을 때, 전 사실 걱정했었어요. 이건 뭐 굴러온 돌이 박힌 돌 빼낸 격 아니겠어요? 본디 왕세자비로 내정된 사람은 당신이었으니까요! 그것도 아주 오래전부터요. 근데 이제 와 갑자기 제가 왕세자비라니? 당연히 루드비히 전하도, 셀그라티스 폐하도 이를 못 받아들이실 거라고 생각했지요.”
그리고 예상대로 루드비히는 대놓고 자신의 존재를 거부했다. 비록 말로 대놓고 표현한 건 아니었지만, 여자는 본능적으로 상대가 저를 어찌 생각하는지 알 수 있는 법이었다. 루드비히는 눈빛으로, 몸짓으로 그녀를 자신의 삶에서 밀어냈다. 그리고 다른 누군가의 그림자를 애달프게 좇았다. 그게 누군지는 뭐, 굳이 말 안 해도 모두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말이에요. 제가 왕세자비로 확정된 후, 처음으로 폐하를 뵈러 갔을 때요. 그때 폐하께서 제게 뭐라고 하셨는지 아시나요?”
“아뇨.”
아네트가 눈을 깜박이며 셀레스틴의 말에 집중했다. 과연 자신을 제명시킨 후, 셀레스틴을 며느리 삼게 된 셀그라티스는 뭐라고 말했을까? 궁금하기 그지없었다. 특히 과거를 회상하는 셀레스틴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서 더더욱 알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