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풍부한 경험으로 단련된 아네트의 위로를 받은 셀레스틴은 금방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었다. 오히려 눈물을 한바탕 뽑은 게 도움이 된 듯, 그녀의 표정은 아까보다 개운해 보였다. 멋쩍은 듯 머리칼을 쓸어 올린 셀레스틴이 입을 열었다.
“추한 모습을 보였네요. 미안해요.”
“괜찮아요. 하나도 추하지 않았으니까.”
윽. 다정한 아네트의 말에 또다시 심장 공격을 당한 셀레스틴이 눈가를 찌푸렸다. 그녀는 이 알 수 없는 감동을 떨쳐내기 위해 본론부터 꺼내기로 했다. 애써 포커페이스로 돌아온 셀레스틴이 딱딱하게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왕세자비가 되고 싶긴 해요. 몰락해 가는 우리 가문을 위해, 그리고 기뻐해 준 부모님을 위해서라도요. 바이에른에겐 별로 대단한 자리가 아니겠지만, 지금 제 입장에선 정말 기적 같은 일이거든요.”
셀레스틴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었던 아네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바이에른이 보기에도 왕세자비는 꽤 매력적인 자리였다. 그러니 부친인 알라만드가 어릴 적부터 아네트를 그토록 혹독하게 교육한 것이리라. 아네트의 이해 어린 눈빛을 받은 셀레스틴이 입술을 질끈 깨물고 결연하게 말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는 아니에요. 어리석은 말일진 모르겠지만, 내 미래는 내가 결정하고 싶다고요. 제아무리 대단한 사람이라 한들 내 인생을 멋대로 휘두를 권리는 없다고 생각해요. 하물며 누군가를 끌어내리고, 그 자리에 대신 세워둘 꼭두각시가 되라니! 그런 건 딱 질색이에요!!”
말을 마친 셀레스틴이 턱을 바짝 치켜들었다. 얼핏 보기엔 고집스러운 표정이었지만, 아네트는 그 뒤에 숨은 셀레스틴의 긍지를 느낄 수 있었다. 한때나마 그녀를 납치사건의 배후로 의심했던 게 미안해질 만큼 근사한 발언이었다. 내심 탄복한 아네트가 살짝 고개를 숙이며 동의했다.
“맞아요. 당신에게 꼭두각시 같은 건 어울리지 않아요. 레이디 셀레스틴, 당신은 그 이상의 자격이 있는 사람이죠.”
“흐흠! 나, 낯부끄러운 소리는 그만둬요. 어차피 오늘 당신을 부른 것도 이렇듯 허심탄회하게 얘기하기 위해서였어요. 그리고…… 당신에게 보여주고 싶은 것도 있고요.”
보여주고 싶은 것? 아네트는 의아한 눈으로 갑자기 진지해진 셀레스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오늘 셀레스틴이 남몰래 아네트를 별채로 들인 까닭은 따로 있었다. 물론 가족의 눈을 피하기 위함도 있었지만, 그보단 아네트에게 보여줄 게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셀레스틴이 발로 카펫을 밀었다. 한때 키어스 가의 것이었던 곡창 지대를 수놓은 카펫이 반으로 밀려 구겨졌다. 그리고 그 밑에서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의 비밀 문이 모습을 드러냈다.
“따라와요. 발 조심하고요.”
새침하게 고갯짓을 한 셀레스틴이 휙 돌아서서 먼저 계단을 내려갔다. 뒤에 남겨진 아네트는 눈을 깜박이며 문을 바라보았다. 저 밑에 무엇이 있을진 모르겠지만, 반드시 봐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장갑을 낀 손을 꼭 말아쥔 아네트는 천천히 걸음을 떼었다.
어두운 계단을 내려가자, 제법 두꺼운 문이 보였다. 대체로 방음을 위해 만들어진 문이었다. 제법 역사가 긴 귀족 가문에는 반드시 있는 문이기도 했다. 표정을 굳힌 셀레스틴이 문을 밀자, 그 안에 묶여있는 한 남자가 보였다. 어쩐지 예상대로의 풍경에 아네트는 눈을 가늘게 뜨며 남자의 얼굴을 살폈다.
‘이반……? 아니야. 그럼 누구지?’
처음엔 자신의 마부이자 납치사건의 주동자, 이반인 줄 알았다. 그의 정체는 사실 라펠의 친외삼촌인 벤 마치였지만 말이다.
아네트는 무릎을 꿇은 채 밧줄에 칭칭 묶인 남자를 뜯어보았다. 하지만 몇 번을 봐도 역시 낯선 얼굴이었다. 그의 앞으로 다가간 셀레스틴이 거침없는 발놀림으로 남자를 걷어차 깨웠다. 그녀의 발길질은 의외로 매서운 구석이 있었다.
“흡!!”
어깨 부근을 걷어차인 남자가 숨 막히는 소리를 내며 정신을 차렸다. 화들짝 놀란 그의 반들반들한 눈이 정신없이 이쪽을 훑었다. 마치 그녀들이 민담에 나오는 악랄한 마녀 자매라도 되는 것처럼 두려워하는 눈빛이었다. 팔짱을 낀 셀레스틴이 도도한 표정으로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아주 편안한 모양이지? 잠도 실컷 자고 말이야.”
“아닙, 아닙니다. 아가씨. 제발 살려만 주십시오.”
남자가 일그러진 얼굴로 비굴하게 머리를 조아렸다. 양팔이 뒤로 묶여있는지라 하마터면 바닥에 고꾸라질 뻔했지만, 다행히 그 꼴은 면했다. 언제 울었냐는 듯 무표정한 얼굴을 한 셀레스틴이 고개를 까딱하며 남자에게 지시했다.
“자, 손님에게 네 소개를 해.”
남자는 대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겠다는 눈으로 아네트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얼굴은 몹시 혼란해 보였다. 이는 아네트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대체 이 남자가 누구인지, 셀레스틴이 왜 그를 자신에게 선보이는지 의아할 따름이었다. 눈을 데굴데굴 굴리던 남자가 셀레스틴의 소리 없는 재촉을 받고서 어색하게 입을 열었다.
“소인은… 자크라고 합니다, 아가씨. 저는 바세티 77번가 럭키 카지노에서 일하는 평범한 딜러입니다.”
“카지노 딜러라고?”
자크의 말을 들은 아네트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델티움의 수도는 귀족들이 사용하는 고급 거리와, 그 외 구역이 꽤 엄격하게 나뉘어 있었다. 그중 바세티 구역은 주로 하급 귀족들과 부르주아들이 이용하는 곳이었다. 그곳에 카지노가 있다는 건 익히 알고 있었지만, 아네트와는 딱히 연이 없는 곳이었다.
하지만 자크의 소개를 듣고 나니, 짚이는 구석이 하나 있었다. 아네트는 카지노 딜러라는 자크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셀레스틴이 새침한 어조로 그를 다그쳤다.
“왜 가장 중요한 걸 빼먹어? 네놈의 특별한 교우 관계에 대해서 손님께 말씀드려야지.”
자크를 갈구는 셀레스틴의 폼은 상당히 능란해 보였다. 이를 본 아네트는 내심 그녀가 꽤 괜찮은 왕세자비가 될 것 같다고 생각했다. 아랫사람을 잘 다루는 것도 지배층의 주요 자질 중 하나였으니 말이다. 셀레스틴의 위세에 눌린 자크가 풀죽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는 카지노 딜러로 무려 25년간 근무했습니다. 아시다시피 도박이라는 게 중독성이 강해서, 한번 빠진 자들은 모든 걸 쏟아부어도 멈추질 못하죠. 따라서 고정 손님들이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 단순한 단골 수준이 아니라 근 10년, 20년씩 보는 중독자들이 많습죠. 그들 중…… 벤 마치라는 손님도 있었습니다.”
역시나 예상했던 대로였다. 라펠도 이전에 벤 마치에 대해 언급했을 때, 그가 노름장에서 나자빠져 죽을 위인이라고 얘기한 바 있었다. 아네트는 혹여 셀레스틴이 ‘그’ 이반의 정체가 라펠의 외삼촌이란 걸 알까 봐 걱정스러웠다.
현재 사교계에선 라펠의 외가 쪽에 대해 아는 자들이 아무도 없었다. 왕가에서 어린 라펠을 데려올 때, 모계 쪽과 관련된 모든 과거를 철저히 말소했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라펠의 친모가 누구인지에 대한 갖은 뜬소문들이 사교계를 떠돌아다녔다. 하지만 그들 중 누구도 확실한 정보를 알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다행히 셀레스틴은 벤 마치와 라펠의 혈연관계까진 모르는 듯했다. 그녀가 지금 하는 말만 들어봐도 알 수 있었다.
“아참, 레이디 아네트. 참고로 저자가 얘기하는 ‘벤 마치’는 당신의 마부였던 이반이에요. 아마 가명을 쓰고 당신의 마부로 취직했던 모양이에요. 교활한 시궁쥐 같은 놈이죠.”
이미 잘 아는 사실을 셀레스틴의 입으로 재차 들은 아네트가 어색하게 웃었다. 그녀가 지금 욕하는 벤 마치가 자신의 시외삼촌이란 사실을 말하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아마도 소스라치게 놀랄 터였다.
어쨌든 셀레스틴이 벤 마치를 그저 일개 마부로만 생각하는 건 천만다행이었다. 라펠의 입장을 고려하면 더더욱 그랬다. 이에 안도한 아네트는 자크가 하는 말에 다시 집중했다. 그는 열심히 기억을 더듬으며 제가 아는 벤 마치에 대해 설명했다.
“벤 마치는 초창기부터 도박장에 꾸준히 얼굴을 내비치는 편이긴 했지만, 그리 거물은 아니었지요. 굳이 급을 나누자면 인색한 부르주아들과 비슷한 수준이었달까요? 아, 물론 도박장에 꼬라박는 금액을 기준으로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렇군. 그래서 뭐가 어쨌단 말이지?”
“근데 몇 년 전부터였습니다. 벤이 도박장에서 쓰는 돈의 규모가 확 늘어났더군요. 거의 하급 귀족들을 능가할 수준의 씀씀이였지요. 이 때문에 돈 냄새를 맡은 놈들이 몰려들어 그 출처를 캐내려 했지만, 벤도 만만친 않았습니다. 그놈도 어쨌든 도박장이라면 이골이 난 놈이었으니까요. 교활하게 이리저리 잘 피해 다녔읍죠.”
처음엔 셀레스틴의 압박 때문에 시작했지만, 자크는 본디 말이 많은 편 같았다. 눈썹을 꿈틀거리며 제법 능청스럽게 웃은 그는 어느새 신이 나서 자발적으로 말을 이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벤도 결국 자신의 담당 딜러였던 저에겐 입이 가벼워졌습니다. 귀하신 아가씨들은 잘 모르실 테지만, 도박 중독자들은 대개 딜러와 말 한마디라도 더 하고 싶어 하는 법이거든요. 아마 친해지면 딜러가 소위 ‘게임 조작의 비밀’들을 풀어줄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겠죠. 하지만 어림도 없는 일입니다. 도박장의 비밀 유지 조항은 무척 까다로워서, 이를 어겼다간 딜러도 얄짤 없습니다. 아마 뒷골목에서 장기가 삐져나온 변사체로 발견될 확률이…….”
“그만, 그만! 쓸데없는 잡소리가 너무 많잖아. 중간에 딴 길로 빠지지 말고 본론만 말하라고!”
결국 인내의 한계를 느낀 셀레스틴이 눈썹을 찡그리며 압력을 가했다. 무릎을 한 대 걷어차인 자크가 몸을 비틀며 엄살을 부렸다. 연기하는 폼이 제법 그럴듯했지만, 이곳에서 그의 사정을 봐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를 깨달은 자크가 풀죽은 목소리로 마저 설명했다.
“어쨌든 벤 마치가 술에 취한 어느 날이었습니다. 그는 그날따라 도박에서 꽤 많은 돈을 딴 지라 기분이 좋았습죠. 저는 그의 옆에서 게임을 보조하며 기분을 맞춰 주었습니다. 팁을 노리고 한 행동이었죠. 하지만 벤은 그날따라 무슨 심경의 변화였는지, 저만 알고 있으라며 한 가지 비밀을 알려주었습니다.”
중요한 부분에서 말을 끊은 자크가 우쭐대는 얼굴로 웃었다. 엄청난 비밀을 폭로할 생각에 기분이 좋아 보이는 눈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