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허리를 굽힌 셀레스틴의 손끝이 가만히 카펫 가장자리를 훑었다. 한때 가장 번창했었던 키어스 영지의 곡창 지대 위를 맴돌던 그 손이 힘없이 허공을 움켜쥐었다. 마치 그 옛날의 영광을 그리워하는 사람처럼.
“덕분에 그 해, 키어스 영지는 유례없는 흉작에 시달렸지요. 지진 때문에 그 어마어마한 양의 작물이 전부 못쓰게 되어버렸거든요. 하지만 왕가는 우릴 외면했고, 영지민의 70%가 굶어 죽었어요. 부채는 눈 깜박할 새 천문학적으로 늘어났고, 이자도 제때 갚지 못해 많은 땅들을 헐값에 처분해야만 했죠. 그 금싸라기 같았던 가문의 땅들을.”
셀레스틴은 허심탄회한 어조로 가문의 치부를 마저 털어놓았다. 당시 기록은 실로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굶어 죽은 영지민의 시체로 우물이 메워지고, 마을은 온통 파리 떼로 뒤덮였었다. 말 그대로 생지옥이 따로 없었던 비참한 키어스 가의 역사였다.
아네트는 아무 말 없이 그녀의 말을 경청했다. 한때 경쟁자였던 자신의 앞에서 털어놓기엔 퍽 자존심 상하는 이야기일 터였다. 하지만 셀레스틴도 아무 생각 없이 이 얘길 꺼낸 건 아니었다. 뭔가를 결심한 듯, 약간 겁에 질린 눈을 한 셀레스틴이 고개를 들었다.
“레이디 아네트. 난 늘 궁금했어요.”
아네트는 어쩐지 셀레스틴의 입에서 나올 다음 말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입술을 깨문 셀레스틴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혹 누군가가 들을까 봐 불안한 눈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면서.
“우리 가문조차도 이토록 왕가의 견제를 당했는데, 하물며 바이에른 가는…… 어떻게 아직까지 살아남은 거죠? 당신들은 늘 델티움에서 ‘두 번째로 고귀한’ 피였잖아요. 분명 왕가는 당신들을 유심히 주목하고 있었을 테죠.”
델티움에서 첫 번째로 고귀한 건 왕가의 보랏빛 피였다. 그리고 두 번째가 바이에른의 푸른 피. 애초에 바이에른의 초대 가주가 델티움의 왕족이었으니, 사실상 뿌리를 따지면 왕가와 바이에른은 한 가족인 셈이었다. 물론 아주 옛날 옛적의 이야기지만 말이다.
한때 왕가의 가족이었던 바이에른도 벌써 세워진 지 몇백 년이란 세월이 흘러갔다. 짙었던 왕가의 피 또한 많이 희석되어, 이제는 남남이나 다를 바 없었다. 그들의 별칭이 ‘푸른 피의 바이에른’이 된 것도 이런 유래에서였다. 왕가에서 받은 보랏빛 피가 변질되었음을 은유적으로 뜻하는 것이다.
왕가와 남이 되는 게 꼭 나쁘지만은 않았다. 과거에 그들은 가까운 친척 같은 개념이라 왕가와 혼사를 맺지 않았다. 하지만 몇백 년이 지난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덕분에 후대의 바이에른에선 종종 왕비를 배출해 왔었고, 간혹 델티움의 공주를 부인으로 맞아들이기도 했었다.
서로 남이 된 덕에 왕가와 혼사를 맺을 수 있다는 건 좋은 일이었다. 그러나 다시 말하자면, 이제 바이에른이 왕가의 우방 대신 적이 될 수도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것도 무척이나 강력한.
“좋은 질문이에요, 레이디 셀레스틴.”
아네트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그녀는 쓴웃음을 지으며 신중하게 속으로 가늠해 보았다.
‘과연 셀레스틴에게 어디까지 얘기해도 괜찮은 걸까?’
이미 현재는 과거와 너무 많이 달라져 있었다. 그래서 아네트는 자신에게 회귀의 메리트가 얼마만큼 남아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위험하다고 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순 없었다. 수동적인 선택은 결국 전생과 똑같은 결과밖에 낳을 수 없을 테니까.
아무것도 모른 체 시름시름 앓다 죽는 것. 그리고 모든 걸 안 상태에서 최선을 다해 발버둥 쳐 보는 것. 과연 어느 게 비교적 ‘나은’ 삶일까? 전생의 자신이었다면 아마 전자를 택했을 것이다. 하지만 두 번째 삶까지 그렇게 날려 먹을 순 없었다. 비록 추하게 버둥거리더라도 그게 뭐 어쨌단 말인가? 삶이란 게 다 그런 거 아니었던가?
아네트는 잘못된 선택을 하는 게 두려워서 마냥 겁쟁이처럼 숨어있을 마음은 없었다. 고로 그녀가 이번 생에 선택한 건 과감한 베팅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레이디 셀레스틴.”
또렷한 어조로 말문을 연 아네트가 생긋이 웃었다. 그 고아한 자태에 셀레스틴은 저도 모르게 홀린 듯 아네트의 말에 집중했다.
“바이에른 또한 키어스 가와 비슷한 역사를 걸어왔답니다. 저희 가문은 늘 왕가와 아슬아슬한 줄다리기를 해 왔어요. 다행히 아직까진 그 줄을 놓친 사람이 아무도 없었지요. 저를 제외하면 말이에요.”
아네트의 여상한 어조는 마치 물 흐르듯 유려했다. 덕분에 셀레스틴은 하마터면 그녀의 마지막 말을 흘려들을 뻔했다. 뒤늦게 그 말을 이해한 셀레스틴의 눈이 커졌다. 이를 본 아네트가 입술 위에 손가락을 세우며 가만히 웃었다.
“잘 아시다시피 전 누명을 썼고, 왕세자비 후보에서 제명되었죠. 하지만 당신도, 나도 범인이 아니에요. 그렇다면 과연 누가 진범일까요? 저를, 그리고 바이에른을 실각시켜 누가 이득을 보려 한 걸까요? 이 점에 대해 생각해 본 적 있겠지요?”
셀레스틴은 말이 없었다. 그녀는 저번에 ‘진범’이 누군지에 대한 추측을 아네트에게 공유하려고 했었다. 때마침 라펠이 들어오는 바람에 결국엔 뒤로 미뤘지만 말이다. 하지만 셀레스틴에게 짐작 가는 배후가 있는 건 확실했다. 이는 아네트 또한 마찬가지였다.
“당신, 설마 지금 하려는 말이…….”
“맞아요. 불경한 말이 되겠지만, 저는 델티움에서 가장 고귀한 피를 의심하고 있답니다.”
아네트가 눈을 내리깔며 작게 속삭였다. 부드러운 목소리와 달리, 아네트의 주장만큼은 단호했다. 너무도 엄청난 말에 셀레스틴의 녹색 눈동자가 잘게 떨려왔다. 그러자 아네트가 차분한 눈으로 그녀에게 되물었다.
“당신도 이미 짐작하고 있었던 것 아닌가요? 레이디 셀레스틴, 미래의 왕세자비 전하.”
셀레스틴이 망연한 얼굴로 아네트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산호색 입술이 약간 벌어지는가 싶더니, 힘없이 도로 다물렸다. 차마 자신의 입으로 시인하려니 용기가 안 나는 모양이었다. 왕가를 의심한다는 건 그만큼 엄청난 일이었으니 당연했다. 하물며 셀레스틴에겐 곧 시댁이 될 곳이니 더욱 조심스러우리라.
아네트는 얼마든지 셀레스틴의 입장을 이해했다. 그녀는 당장이라도 정색을 하며 자신은 모르는 일이라고, 이곳을 나가 달라고 요청할 수 있었다. 아네트는 설령 그녀가 그런 식으로 나오더라도 놀라지 않을 작정이었다. 가진 화살을 모두 쏜 그녀는 침착하게 셀레스틴의 다음 반응을 기다렸다.
잠시 몸을 부들부들 떨던 셀레스틴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아네트의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아네트는 눈을 들어 셀레스틴의 얼굴을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두 눈이 마주친 순간, 몸을 숙인 셀레스틴이 갑자기 그녀를 와락 끌어안아 왔다.
“셀…레스틴……?”
이런 반응은 예상하지 못했는데. 흠칫 놀란 아네트가 얼떨결에 팔을 들어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러자 어깨 부근이 뜨거워지는가 싶더니, 귓가에 작게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뜻밖에도 그녀는 아네트를 끌어안은 채 울고 있었다.
“흐윽, 흑… 난, 훌쩍. 무서워요. 아네트. 대체 왜 이런… 으흑! 왜, 왜 일이 이렇게 되어야만 했던 걸까요. 대체, 왜!! 흐어어엉!!”
“쉬이, 울지 말아요. 이런 얘길 꺼내서 많이 놀랐나요? 폐가 되었다면 미안해요.”
아네트는 저도 모르게 몸에 익은 대로 셀레스틴을 토닥이며 달랬다. 제멋대로에 속 좁은 남편을 둔 그녀는 어느새 남을 어르는 데 능숙해졌다.
아네트의 묘하게 전문적인 다독임과 상냥한 목소리는 효과가 대단했다. 왈칵 눈물을 터트렸던 셀레스틴은 점차 진정되어 가는 듯싶더니, 엉망이 된 얼굴을 가리며 아네트에게서 떨어졌다. 귀족 영애답지 못하게 자신의 감정을 터트린 걸 민망해하는 눈치였다. 그녀는 본디 자긍심이 높은 편이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여기, 제 손수건이라도 괜찮다면 써 줘요.”
아네트가 얼른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내밀었다. 셀레스틴은 한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린 채 어색하게 그것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등을 돌려 자신의 젖은 얼굴을 열심히 닦아내었다. 쓸데없이 반짝이는 아네트의 앞에서 추한 몰골을 보이는 게 부끄러웠다.
물론 그럴 린 없겠지만, 아네트는 태어날 때부터 단정하고 완벽했을 것 같았다. 그녀의 앞에서 잘나 보이진 못하더라도 최소한 추해 보이고 싶진 않았다. 얼굴을 대강 수습한 셀레스틴은 손수건을 쥔 채 머뭇거렸다. 자신의 눈물 콧물로 엉망이 된 그것을 돌려줄 순 없는 노릇인지라 망설여졌다.
불행히도 아네트는 그런 셀레스틴의 섬세한 마음을 알지 못했다. 멀뚱히 눈을 깜박인 아네트가 그녀의 손에서 거리낌 없이 더러워진 손수건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인형처럼 예쁜 얼굴을 바싹 들이댄 채 셀레스틴의 얼굴을 살폈다.
“여기, 아직 자국 남아있어요. 고개 좀 돌려 볼래요? 닦아줄게요.”
젖은 손수건에서 깨끗한 부분을 찾아보려던 아네트가 이윽고 포기한 듯 그것을 집어넣었다. 이를 본 셀레스틴이 민망해서 아네트의 손을 막 뿌리치려던 찰나였다. 어마어마하게 비쌀 게 틀림없는, 최고급 옷감으로 된 옷소매를 든 아네트가 그걸로 셀레스틴의 얼굴을 닦아주었다.
긴 금빛 속눈썹 밑으로 보석처럼 투명한 분홍색 눈동자가 셀레스틴을 빤히 응시했다. 뺨 위를 닦아주는 하늘색 옷소매에선 약간 파우더리한 꽃향기가 났다. 하지만 셀레스틴을 가장 부끄럽게 만든 건, 아주 진지한 얼굴로 자신의 얼굴을 조심조심 닦는 아네트의 섬세한 손놀림이었다. 어쩐지 소중하게 대해지는 듯한 기분이라 뺨이 저절로 달아올랐다.
“아, 이제 됐어요. 다시 깨끗해졌네요.”
코앞에서 자신을 빤히 바라보던 아네트의 눈꼬리가 해사하게 휘어졌다. 그 웃음이 꼭 여름 햇살처럼 눈부시게 반짝이는 것 같아 셀레스틴은 망연해졌다. 정말로 세상에 뭐 저런 여자가 다 있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