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뜬금없는 라펠의 말에 아네트가 의아한 눈을 했다. 그러자 라펠이 입술을 꾹 다물며 결의에 찬 표정을 지었다. 몸을 돌린 그가 아네트를 향해 손을 뻗고, 그녀의 뺨을 조심스레 매만졌다. 그리고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여 뭔가를 말하려 했다.
“당신이 싫어서 피하는 건 아냐. 요즘, 당신을 보면 내가 좀… 그러니까…….”
그의 남자다운 입술이 선뜻 뒷말을 내뱉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아네트는 자신의 뺨을 감싼 그 커다란 손의 감촉에 심장이 뛰는 걸 느꼈다. 그녀의 발그레한 분홍색 눈이 물끄러미 올려다보자, 라펠이 크게 심호흡을 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는 연애 고자답게 타이밍을 잘못 골랐다.
“아, 벌써 마중 나와 있었네! 아네트!!”
준비를 모두 마치고 나오던 클레어가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 편안한 여행복을 입은 그녀는 정말로 유쾌한 미청년처럼 보였다. 짙푸른 머리칼이 햇살에 청명한 바다처럼 반짝이고, 날카로운 콧대와 턱선은 유려했다. 그러나 말을 또 방해받은 라펠의 눈엔 그저 원수에 불과할 따름이었다.
“클레어 언니, 이제 먼 길 가야 하는데 힘들겠어요. 주방장에게 말해서 간식을 따로 챙겨 놓았어요. 닭고기 육포 좋아하시죠? 많이 넣어놨으니 가는 길에 드세요.”
아네트가 아쉬운 얼굴로 클레어의 손을 잡았다 놓으며 말했다. 그러자 클레어가 감격한 눈으로 아네트를 와락 끌어안고 뺨을 비볐다. 이 예쁜 걸 두고 가려니 발걸음이 영 안 떨어졌다. 그러나 뒤에서 따라오던 아르옌이 그녀의 어깨를 잡고 부드럽게 아네트에게서 떨어트려 놓았다.
“그러다 귀걸이에 얼굴 긁히겠어, 클레어. 저번에도 그래서 결국 신관을 불러 치료했잖아. 섭섭한 마음은 알겠지만 좀 진정해.”
“아참, 그랬었지. 아쉬워서 나도 모르게 그만…….”
아르옌의 상냥한 타이름에 클레어가 고개를 끄덕이며 물러났다. 아까보다 훨씬 부스스해진 머리칼을 한 아네트가 자신의 오라비를 바라보았다. 긴 백금발을 대강 올려묶은 아르옌은 여전히 피곤한 얼굴이었지만, 그래도 다정한 눈을 하고 있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즐거웠단다. 또 보자꾸나, 아네트. 내 소중한 동생.”
고개를 숙인 아르옌이 그녀의 이마에 친애의 키스를 남겼다. 아네트 또한 아쉬움을 감추며 그의 창백한 뺨에 키스했다. 바쁘고 고달픈 와중에도 자신을 걱정해 여기까지 와 준 아르옌이 고마웠다.
아마도 아르옌은 전생에도 그녀에게 위험을 경고하려 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땐 아네트의 상황이 너무 나빴다. 건강도 너무 안 좋았고, 라펠과의 지독한 부부싸움으로 인해 손님맞이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런 아네트에게 괜히 걱정을 더 안겨줄 수 없었던 아르옌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몫까지 혼자서 다 끌어안는 선택을 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젠 모든 게 전생과는 달라졌어.’
아네트는 이제 자신에게 누명을 씌운 게 셀레스틴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이 정황을 꾸며낸 마부 이반이 라펠의 외삼촌이란 것도, 또한 자신만 이런 공격을 받은 게 아니라 아르옌도 비슷한 일을 겪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어쩌면 아버지인 알라만드까지도.
하나뿐인 오빠와 이별의 포옹을 한 아네트가 진심을 담아 작게 속삭였다.
“부디 몸조심하세요, 오라버니.”
아르옌의 새하얀 속눈썹이 조금 움찔했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대신 대견한 눈빛으로 아네트를 내려다보았다. 그 작고 마음 여렸던 아이가 자신의 짐을 나눠들 만큼 저렇게 커버릴 줄이야. 실로 기특하기 짝이 없었다.
아네트와 작별인사를 마친 아르옌이 이번엔 라펠을 바라보았다. 아르옌 또한 성인 남성의 평균은 되는 키이건만, 라펠은 그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컸다. 자신의 여동생을 지키는 파수견처럼 그 옆에 버티고 선 라펠을 보는 아르옌의 눈빛이 복잡했다.
“부디 아네트를 잘 부탁합니다, 매부.”
“걱정 마시죠.”
라펠은 아르옌이 내민 손을 힘있게 맞잡았다. 그 크고 단단한 손아귀에서 느껴지는 악력은 어쩐지 마음을 놓이게 하는 구석이 있었다. 여차하면 아네트를 번쩍 안아들고 안전한 곳까지 도망갈 수 있을 듯한 남자였다.
고개를 든 아르옌이 라펠을 올려다보며 웃었다. 역시 남매라 그런가, 그 미소가 묘하게 아네트와 닮은 구석이 있어 라펠은 흠칫했다. 그때 아르옌이 목소리를 낮춰 의미심장한 말을 속삭였다.
“그리고 부디 무엇이 본인에게 가장 중요한지, 우선순위를 확실히 해 주시길.”
라펠은 이게 무슨 뜬금없는 소리인가 싶어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매처럼 날카로운 그의 눈매와 마주한 아르옌이 싱그럽게 웃는 얼굴로 덧붙였다.
“원하는 걸 모두 선택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삶이 그렇게 흘러가진 않는 법이니까요.”
……그러니까 그게 대체 무슨 소리냐고. 저걸 지금 부연 설명이라고 하는 건가? 라펠은 갑자기 뜬구름 잡는 소리만 늘어놓는 아르옌을 노려보았다. 그는 세상 사람들이 다 저처럼 천재인 줄 아는 모양이었다. 라펠이 막 입을 열어 질문을 던지려던 찰나, 아르옌이 몸을 휙 돌렸다. 그리고 손을 휘적휘적 흔들며 마차에 냉큼 올라타 버렸다.
덕분에 아르옌의 뒤통수를 바라보는 라펠의 시선은 더 짜게 식었다. 자기 할 말만 실컷 해놓고 가 버리다니. 선물로 받아먹은 명검만 아니었다면 확 잡아채서 끌고 와 심문하고 싶었다. 제가 한 말의 마디마다 낱낱이, 하나하나 해부해서 그 뜻을 알려주게끔 말이다.
“준비가 다 끝났습니다.”
때마침 마지막 짐을 실은 마부가 머리를 조아렸다. 이제 정말로 작별의 순간이었다. 아르옌과 클레어, 둘 다 허례허식과는 거리가 먼 편이라 짐은 그리 많지 않았다. 작업이 빨리 끝난 덕에 인사를 나눌 시간은 줄어들었다. 참으로 슬픈 일이었다.
“그런 표정 짓지 말고 이리 와 안아 줘, 아네트. 얼른.”
팔을 벌린 클레어가 다가와 아네트를 와락 끌어안았다. 그녀의 팔은 언제나 그랬듯이 강인하면서도 부드러웠다. 그 팔에 머리를 기댄 아네트가 가만히 클레어의 등을 마주 끌어안았다. 애써 꾹 눌러 참았는데도 불구하고, 목소리에 결국 훌쩍임이 섞였다.
“눈앞에 있는데 벌써 보고 싶어져요, 언니. 이를 어쩌죠?”
“저런, 우리 토끼 아가씨. 결혼해도 이럴 땐 여전하네. 하여튼 물렁하다니까.”
클레어가 아쉬움 반, 애정 반의 얼굴로 웃으면서 아네트에게 키스를 퍼부었다. 그 키스는 놀랍게도 효과가 있어서, 아네트 또한 웃으면서 눈물을 닦았다. 마차 창문 너머로 턱을 괴고 이를 지켜보던 아르옌이 부드럽게 그녀들을 재촉했다.
“자자, 눈물은 이쯤에서 그치자고. 오늘이 마지막 날도 아니잖아? 언제든 다시 또 볼 수 있어.”
클레어를 끌어당겨 마차에 태운 아르옌이 다정하게 아내에게 입을 맞췄다. 그리고 마차 창문 너머로 손을 뻗어 아네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마치 어릴 적 그녀에게 종종 그랬었던 것처럼 말이다. 희끄무레한 속눈썹 밑으로 깊이를 알 수 없는 보랏빛 눈동자가 아네트에게 속삭였다.
“기억하렴, 내 귀여운 동생아. 가장 뛰어난 정치인일수록 소중한 걸 교묘하게 잘 숨기는 법이란다. 그래야 자신의 약점을 감출 수 있거든.”
가만가만 속삭이는 아르옌의 말을 듣던 아네트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짚이는 구석이 하나 있었다. 지금 아르옌이 알려준 것은 이 문제의 실마리가 되어줄 사람이었다.
아네트는 멀어지는 마차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앞으로 더 바삐 움직여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만나서 대화를 해 볼 사람들이 좀 있었다. 물론 그들 중 누구도 순순히 아네트에게 사실을 털어놓으려 들진 않겠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아네트는 어떻게 해서든 그들에게서 반드시 대답을 얻어내고야 말 작정이니까.
* * *
아네트는 오늘 연한 하늘색 드레스에 흰 보닛을 쓴 모습이었다. 마치 청명한 봄의 하늘 같은 느낌이었다. 그 어떤 더러운 음모와도 관련이 없을 듯한, 실로 천사처럼 깨끗한 외모였다. 오늘 그녀가 키어스 가를 방문한 건 셀레스틴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모처럼 찾아온 아네트를 남몰래 별채로 맞아들인 셀레스틴은 미안한 표정이었다. 원래대로라면 귀한 손님을 본관으로 안내해야 마땅했다. 하지만 셀레스틴의 가족은 여전히 아네트를 납치사건의 진범으로 오해하고 있었고, 고로 그녀를 무척 적대시했다.
이런 상황에서 아네트를 정문으로 맞아들이는 건 불가능했다. 확실한 물증이 없으니 아네트의 결백을 대신 주장해 주기도 어려웠다. 헛기침을 한 셀레스틴이 먼저 사과의 말부터 건넸다.
“와 줘서 고마워요, 레이디 아네트. 그리고 정리도 안 된 별채로 오게 해서 미안해요.”
“천만에요, 레이디 셀레스틴. 듣는 귀는 적을수록 좋으니까요.”
아네트의 다정한 대답에 셀레스틴은 안도하는 기색이었다. 여전히 얼굴에 광대뼈가 도드라지고, 눈 밑의 그늘이 짙은 거로 보아 납치 트라우마가 남아있는 듯했다. 아네트는 그녀의 뒤를 따르며 별채를 한 바퀴 둘러보았다.
‘이곳이 키어스 후작가로구나.’
약 200년 전까지만 해도 이곳은 델티움에서 가장 잘 나가는 명문가 중 하나였다. 키어스 가는 커다란 곡창 지대의 소유주였고, 이를 바탕으로 부와 권력을 쌓아 올렸다. 하지만 어느 날 일어난 대지진 때문에 모든 게 달라졌다. 그때 곤두박질친 키어스 가의 위세는 200년이 지난 지금에도 복구되질 않았다.
그러나 저택만큼은 여전히 옛 위용을 간직하고 있었다. 심지어 본관도 아닌 별채인데도 그러했다. 아네트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속으로 감탄했다. 오랜 역사가 느껴지는 액자들과 초상화, 그리고 값어치를 따질 수 없을 만큼 귀한 앤티크 가구들.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아름다웠다.
특히 아네트를 감탄하게 한 건 별채의 카페트였다. 아주 예스러운 기법으로 한 땀 한 땀 수놓아 만든 카페트는 말 그대로 정교한 아름다움의 극치였다. 짙은 녹색 융단에 화려한 금박으로 수를 놓아 키어스 후작가의 곡창 지대를 그려낸 그것은 한때 이곳이 얼마나 부유했었는지를 간접적으로 시사하는 듯했다. 아네트의 시선을 눈치챈 셀레스틴이 가만히 웃었다.
“마음에 드나요? 저도 좋아해요, 그 카펫. 어릴 땐 종종 별채에 숨어들어 이 위에 엎드려 놀곤 했었죠. 그러다 어머님께 들켜 참 많이도 혼났어요. 너 같은 말괄량이를 대체 누가 데려가겠냐면서 말이에요.”
철없이 카펫 위를 뒹굴던 그 꼬마 아가씨는 커서 왕세자비가 될 예정이었다. 어두운 녹색 눈동자를 든 셀레스틴이 픽 웃었다. 어딘지 모르게 자조적인 미소였다.
“그거 알아요? 200년 전, 우리 가문 영지에 대지진이 일어났던 그때 말이에요. 내 조상님께선 당시 왕가에 도움을 요청했었답니다. 그간 바쳤던 세금이며 충성, 그 모든 헌신을 감안해서라도 당연히 왕가에서 도움을 줄줄 알았지요. 근데 델티움의 왕가는…… 이를 차갑게 거절했어요.”
한때 융성했던 자신의 가문이 망한 이유를 밝히는 셀레스틴의 눈동자가 떨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