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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화





















클레어의 돌발 질문을 받은 라펠이 침묵했다. 지나치게 사적인 질문에 어이가 없고 불쾌했다. 아네트를 사랑하냐고? 그건 그렇게 쉽게 얘기할 문제가 아니었다. 하물며 아네트의 새언니인 클레어에겐 더더욱.



라펠이 아무 대답도 하지 않자, 클레어의 검 끝이 좀 더 빠르게 그를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델티움에서 주로 ‘쾌속검’이라고 불리는 타입이었다. 현란한 궤도와 속도로 눈을 어지럽히고, 상대의 손발이 어지러워지면 빈틈을 치고 들어오는 매서운 검법이 특징이었다. 한 마디로 딴 곳에 정신을 판 채 상대해도 좋을 만큼 만만한 상대는 아니었다.



라펠은 그녀의 기세에 떠밀려 정신없이 검을 휘둘러 받아쳤다. 한번 그녀의 페이스에 말리기 시작하자, 라펠은 대련에 더욱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아네트의 앞에서 처음 보여주는 검술이었다. 여기서 꼴사납게 질 순 없었다. 날이 새파랗게 선 라펠의 눈동자가 클레어를 향했다.



“좋아, 바로 그 눈빛이지!”



환호성을 지른 클레어가 더 거세게 검을 부딪쳐 왔다. 지금까지 방어에 치중하던 라펠은 훨씬 적극적인 태도로 그녀의 공격을 받아쳤다. 나아가 그녀의 검을 튕겨내면서 반격까지 시도하고 있었다.



클레어 또한 뛰어난 검사였지만, 라펠은 말 그대로 천재였다. 그는 정말로 재능이 있었고, 심지어 체격 조건도 클레어보다 훨씬 우위였다. 그러니 라펠이 제대로 마음먹으면 클레어는 그를 이길 수 없었다. 그녀는 곧 무섭도록 위력적인 라펠의 검 앞에서 수세에 몰렸다.



하지만 클레어에겐 아직 비장의 무기가 남아있었다. 한 차례 검을 크게 휘두르며 라펠을 물러서게 한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잔디밭 위에 앉아 있는, 파리한 달빛 같은 자신의 남편을 바라보았다. 다행히 아르옌 또한 차를 마시면서도 이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와 눈이 마주친 순간, 클레어가 재빨리 눈짓했다.



‘지금이야, 여보!’



곧바로 닥쳐오는 라펠의 검에 클레어는 더 이상 남편을 바라볼 수 없었다. 하지만 이것으로도 충분했다. 머리가 좋은 아르옌은 자신의 뜻을 금세 알아차렸을 테니까.



클레어와 그 사이에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깊은 유대감이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선택한 자신의 남편을 믿었다. 고개를 돌린 클레어는 다시 대련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휘몰아치는 라펠의 공격은 말 그대로 눈앞이 아찔할 만큼 위력적이었다. 그냥 가볍게 휘두르는 것 같은데, 부딪치는 검에서 느껴지는 근력이 어마어마했다. 그의 공격을 받아칠 때마다 손아귀가 찢어지는 것 같았다.



라펠은 자신의 승리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제 조금만 더 클레어를 몰아붙이면 항복을 받아낼 수 있었다. 무섭도록 집중한 그의 눈빛이 오로지 상대만을 응시했다. 대련의 긴장이 최고조를 향해 치달았다.



라펠이 검을 막 내리치려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뒤에서 갑자기 큰 외침이 들려왔다. 방금까지 아네트와 차를 마시던 아르옌의 목소리가 급박하게 귓가를 때렸다.



“아네트, 위험해!!!”



머리보다 몸이 더 먼저 반응했다. 라펠의 등골에 소름이 쫙 곤두서며, 고개가 저절로 그쪽을 향해 휙 돌아갔다. 고작 1초도 안 되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무수한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쳤다. 혹 아네트에게 무슨 사고라도 생겼을까 봐 심장이 선뜩했다.



하지만 눈에 담긴 아네트의 모습은 지극히 멀쩡했다. 그녀는 치맛자락에 차를 조금 흘린 듯, 손수건으로 그 위를 닦고 있었다. 오히려 갑자기 고함을 친 아르옌 때문에 더 놀랐다는 표정이었다.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한 아네트의 얼굴이 이쪽을 향했다. 그리고 그녀의 분홍색 눈동자가 갑자기 커졌다.



“큭!!”



바로 그 순간, 라펠의 팔뚝에서 갑자기 둔탁한 통증이 느껴졌다. 뜻밖의 강한 타격에 라펠이 대련용 검을 떨어트렸다. 눈앞의 클레어가 빙글빙글 웃으며 자신의 검을 척하니 어깨에 걸쳤다. 그리고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얄밉게 라펠을 놀렸다.



“저런, 대련 중에 한눈팔면 안 되죠.”



라펠은 황망한 눈으로 바닥에 떨어진 자신의 검을 바라보았다. 손에서 검을 놓쳐본 건 성년 이후 처음이었다. 그것도 심지어 그 이유가 대련 도중 딴 데 한눈을 팔았기 때문이라니! 망연자실한 라펠을 본 클레어가 잘생긴 얼굴로 씩 웃었다.



“그것 봐요. 내 말이 맞죠? 사랑이래도.”



라펠은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듯한 기분으로 클레어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검을 내려놓고 자신의 남편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이미 라펠에게서 확인하고 싶은 건 모두 확인했다. 클레어가 두 팔을 벌리며 다가가자, 찻잔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난 아르옌이 그녀를 끌어안으며 웃었다. 둘 사이에는 그 누가 봐도 명백한 애정이, 그리고 사랑이 있었다. 라펠은 충격에 어안이 벙벙해져서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라펠! 괜찮아요?”



이때, 라펠의 옆에서 사랑스러운 인기척이 느껴졌다. 굳이 눈으로 보지 않아도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라펠은 충격에 휩싸인 와중에도 고개를 숙여 반사적으로 아네트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손을 뻗어 라펠의 얻어맞은 팔뚝을 살피고 있었다.



“세상에, 새빨개졌네. 아무래도 멍이 들겠어요. 아프진 않아요?”



황금빛 속눈썹 밑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분홍색 눈동자가 꼭 보석처럼 영롱했다. 그 눈과 마주치자, 주위의 소리가 사라지고 오직 자신의 심장 뛰는 소리만 귓가에 메아리쳤다. 팔을 어루만지는 그녀의 손길이 닿는 곳마다 피부가 데인 것처럼 달아올랐다. 머리칼 사이로 보이는 자그마한 귓바퀴마저도 저토록 사랑스러워 가슴이 저미는데, 어찌 이 감정을 부정할 수 있을까.



“하…….”



라펠은 한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렸다. 한번 자각한 순간, 거대한 해일처럼 압도적으로 밀어닥치는 감정이 자신을 익사시키는 듯했다. 막연히 알고 있었지만 외면하고 싶었던 낯선 감정.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부정하고 싶었던 생소한 이 감각.



정말로 사랑이 맞았다, 빌어먹을.



문득 아르옌이 그녀의 이름을 다급하게 소리쳐 불렀던 순간이 떠올랐다. 분명히 대련 도중이었는데, 클레어와 정신없이 검을 부딪치는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는데도 불구하고 그 순간만큼은…… 모든 걸 잊어버리고 말았다. 당장이라도 아네트의 안위를 눈으로 확인하지 않으면 죽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자신의 몸이 통제를 벗어나 제멋대로 움직이던 그 생소한 감각이라니. 그 순간을 떠올린 라펠의 표정이 저도 모르게 핼쑥해졌다.



“왜 그래요, 라펠? 많이 아파요? 이를 어째.”



아무 대답도 없이 얼굴을 숨기는 라펠의 모습에 아네트가 발을 동동 굴렀다. 얼핏 보이는 그의 턱이 약간 떨려오는 것 같았다. 혹시 이를 악물고 아픔을 참는 걸까? 안절부절못하며 그의 팔뚝 위를 살살 매만지던 아네트가 이윽고 몸을 돌렸다.



“여기서 조금만 기다려요. 지금 가서 유칼리를 불러올…….”



“아니, 괜찮으니까 가지 마. 여기에 있어.”



굳게 다물린 입술을 뗀 라펠이 한 팔을 뻗어 아네트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슬쩍 올려다본 그의 얼굴이 무척이나 괴로워 보였다. 이를 본 아네트는 마음이 괜히 찡해졌다. 안 그래도 자존심 센 사람인데, 자신이 보는 앞에서 클레어에게 졌으니 원. 얼마나 정신적인 충격이 클까?



“당신은 아주 훌륭했어요, 라펠. 저는 검에 대해선 잘 모르지만, 그냥 보기에도 당신은 정말 대단하던걸요! 특히 이렇게 허리를 틀고 검을 비스듬히 올려칠 때가…….”



부드럽게 라펠의 팔을 마주 끌어안은 아네트가 다정한 위로를 건넸다. 그녀는 라펠의 이런 모습에 약한 편이었다. 아마 어릴 때부터 누군가를 위로하는 일에 익숙했기 때문일 것이다.



저 멀리에서 남편의 허리를 끌어안은 클레어는 웃는 눈으로 아네트를 바라보았다. 자신보다 훨씬 큰 라펠을 다독이느라 쩔쩔매는 아네트는 꼭 요정처럼 사랑스러웠다. 저러니 제아무리 비뚤어진 인간이라도 아네트에게 홀랑 넘어갈 수밖에.



‘마음을 자각하게 해 줬으니, 내 귀여운 아네트도 이제 좀 편해지겠지?’



가만 놔뒀으면 라펠은 아마 어지간히 먼 길을 돌아갔을 것이다. 애초에 그는 솔직하지 못한 고집쟁이였으니까. 클레어는 그 과정에서 마음고생 할 아네트의 미래가 뻔히 보이는 것 같았다. 그래서 그녀는 부러 라펠을 한번 들쑤셔 보았다. 효과는 참 놀라웠다!



“참 좋을 때다. 안 그래, 자기?”



클레어의 물음에 아르옌은 대답 없이 가느다란 눈웃음을 지었다. 이전에 아네트에게 ‘네 남편을 얼마나 신뢰하냐’라고 물었던 그였다. 공교롭게도 그는 방금 라펠의 행동에서 한 가지 새로운 가능성을 보았다. 아르옌이 계산했던 수많은 미래 중 또 다른 길 하나가 방금 그 문을 빼꼼히 열었다.









즐거운 시간은 눈 깜박할 새 끝난다는 게 인생의 슬픈 진리였다. 아르옌과 클레어를 배웅하기 위해 나온 아네트는 고개를 갸웃했다. 먼저 나온 라펠이 쓸데없이 진지한 눈으로 바닥에 핀 민들레를 쏘아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새카만 눈썹은 무척이나 섬세하고 남자다운 형태였는데, 그걸로 고작 민들레나 쏘아보고 있다니. 그래서인지 민들레 잎이 유독 시들해 보였다.



‘요즘 라펠이 왜 이러지?’



아네트는 고개를 갸웃했다. 저번 대련 이후로 라펠은 좀…… 이상해졌다. 그는 종종 혼자만의 생각에 깊이 빠져들곤 했다. 그리고 가끔 얼빠진 사람처럼 아네트를 빤히 바라보다, 그녀가 말을 걸면 흠칫 놀라 후다닥 가 버렸다. 한 마디로 꼭 아네트에게 뭔가 찔리는 게 있는 사람처럼 굴었다.



그런 주제에 아침에 눈을 뜨면 어김없이 옆자리로 기어들어 와 있었다. 덕분에 아네트는 그의 팔 안에서 눈을 떴고,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지?’ 따위의 생각을 하곤 했다. 아무래도 클레어에게 진 게 어지간히 크나큰 마음의 상처로 남은 모양이었다. 아네트는 최대한 그의 상처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조심조심 말을 붙였다.



“라펠, 당신 괜찮아요?”



“……음? 음.”



아네트가 말을 걸자, 자신만의 생각에서 빠져나온 라펠이 홱 고개를 돌렸다. 마치 그녀와 마주 보는 걸 피하기라도 하듯이. 덕분에 아네트는 오늘도 마음의 상처를 조금 입었다. 더 이상 라펠의 기행을 방치할 수 없었던 아네트가 진지하게 물었다.



“당신 요즘 좀 이상해요, 라펠. 혹시 내가…… 뭐 잘못한 거라도 있나요? 왜 자꾸 내 눈을 피해요?”



“그런 거 아냐.”



팔짱을 낀 라펠이 다른 곳을 보며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그의 냉막한 외모와 어우러져서 무척 쌀쌀맞아 보이는 태도였다. 아네트는 굳이 구질구질하게 그런 라펠에게 더 캐묻진 않았다. 괜찮아, 난 떠날 사람이니까. 속으로 되뇌인 아네트가 말없이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서운함을 느낀 그녀의 입꼬리는 솔직하게 축 처졌다.



이를 흘끗 본 라펠은 다급해졌다. 그가 요즘 가장 무서워하는 건 아네트의 저런 표정이었다. 라펠은 저도 모르게 얼른 부연 설명을 덧붙였다.



“난 그냥, 내가 좀 이상해. 아네트.”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