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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화





















아르옌이 던진 뜻밖의 질문에 아네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여기서 왜 라펠의 이야기가 나오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아네트는 애써 가빠지는 호흡을 내리누르며 침을 삼켰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오라버니? 설마 라펠이 제국의 군사령관을 암살하려 했던 배후는 아닐 테지요. 그는 정치와는 거리가 멀어요. 하물며 제국에까지 손이 닿을 사람은 아닌걸요.”



“나쁘지 않은 대답이야. 하지만 내 질문에 대한 정확한 답은 아니지. 그래서 어때, 아네트? 넌 그를 신뢰하고 있니?”



아르옌이 인내심 있게 질문을 반복했다. 그러자 아네트의 눈동자가 바람에 떨어지는 꽃잎처럼 어지러이 흔들렸다. 짧은 순간, 머릿속으로 무수히 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그 어떤 것도 지금 아르옌이 던진 질문에 확실한 답이 되어주진 못했다.



고뇌하는 아네트를 본 아르옌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벌써 이 모든 사건의 정황을 어렴풋이 꿰뚫어 보고 있었다. 아네트에게 자신이 알아낸 것들을 전부 말해주는 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아네트는? 그녀의 마음은 무사할 수 있을까?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던 아르옌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상하지 않니? 아네트, 네가 쓴 누명에 대해서도 많은 걸 조사했어. 처음엔 우연일 거라 생각했지. 남들의 머리 위에 올라서면 무수한 화살들이 날아오는 법이거든. 그러니 나는 나대로, 너는 너대로 발밑을 무너트리려는 자들이 있는 게 당연한 이치야.”



“하지만 시기가 참 공교롭네요. 도무지 두 건을 따로따로 보긴 어려울 정도로요. 그렇죠?”



“영리하기도 하지. 그럼 네게 물어보도록 하마. 만약 너와 날 동시에 쏘아 떨어트리려는 사람이 있다면, 그게 과연 누구일까? 그자는 무엇을 원해서 이런 짓을 꾸민 걸까?”



아네트의 뺨이 창백해졌다. 전생엔 미처 풀지 못했던 자신의 누명. 이번 생에는 기필코 벗겠다고 다짐했었다. 하지만 뿌리를 더듬어 내려갈수록 그 실체는 너무도 깊고 어두워서, 겁이 덜컥 났다. 과연 이 끝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 걸까? 그걸 깨닫고 나서도 자신은…… 아무것도 몰랐던 예전처럼 계속 살아갈 수 있을까?



아네트는 숨이 턱턱 막혔다. 설마 아르옌에게도 같은 일이 있었을 줄은 몰랐다. 자신은 미처 준비된 함정을 피하지 못했지만, 아르옌은 가까스로 피해냈다. 이게 둘 사이의 차이점이었다.



불현듯 라펠을 믿냐고 묻던 아르옌의 질문이 떠올랐다. 그 순간, 아네트의 머릿속에 번뜩 떠오른 얼굴이 있었다. 전혀 생각도 못 한 인물,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가장 그럴싸한 후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입 밖으로 꺼내기엔 차마 용기가 나질 않았다. 그만큼 충격적인 가정이었기 때문이다.



“아네트.”



그녀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리는 걸 본 아르옌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아네트가 어릴 때 으레 그러했듯이, 그녀를 끌어안고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혈육이 주는 온기에 약간 진정한 아네트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께서 이 일에 관련되어 계신 건가요? 그런 거죠?”



“글쎄, 어떨까.”



그녀를 내려다보는 아르옌의 어른스러운 얼굴에 짙은 피로감이 떠올랐다. 굳이 그녀의 가설을 부정하지 않는 아르옌의 태도는 많은 걸 의미했다. 아네트는 눈앞이 아찔해져서 양손으로 테이블을 짚었다. 그렇지 않으면 어쩐지 어지러워서 토할 것 같았다.



“아버지께서도, 혹시 이 사실을 아시나요?”



“아마도.”



“알면서도 절 라펠에게 시집 보냈었던 거로군요. 하지만, 그분이 대체 우리를 왜? 이유가, 도무지 그럴 만한 이유가…….”



아네트가 더듬더듬 말했다. 머릿속이 뒤죽박죽이 되어서 도무지 이성적인 판단이 불가능했다. 그런 아네트를 내려다본 아르옌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의 왼뺨 근육이 비틀리자, 그 위에 올라앉은 흑거미가 꼭 살아있는 것처럼 꿈틀했다.



“말했잖니, 아네트. 남들 머리 위로 올라간다는 건 그런 거란다. 모든 화살촉이 널 겨누게 되지. 아래에서도, 심지어 위에서도 말이야. 아버지는 그토록 널 왕세자비로 만들고 싶어 하셨는데, 정작 이 점에 대해선 안 알려주셨나 보네.”



꼭 노래하듯이 나지막한 아르옌의 목소리를 듣던 그녀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밖에서 검을 두고 클레어와 옥신각신하는 라펠의 목소리가 바람결에 설핏 들렸다. 그는 짜증을 내는 척하고 있었지만, 선물 받은 검 때문에 들뜬 기색이 역력했다. 아네트는 이제 목소리만 듣고도 라펠의 기분을 파악할 수 있었다.



감았던 눈을 뜬 아네트는 허탈하게 웃었다. 갑자기 이 모든 게 지독한 막장극처럼 우스꽝스럽게 느껴졌다. 자신이 결코 출연을 희망한 적 없는.









그 뒤로는 모든 게 거짓말처럼 평화로웠다. 아네트와 아르옌은 그런 대화를 나눈 적 없었던 것처럼 간만의 회포를 도란도란 풀었다. 좀처럼 보기 드문 선물을 받은 라펠도 호의적으로 손님들을 대접했다. 아네트의 눈치 때문이 아니라, 그 자신이 그러고 싶었다.



라펠은 틈만 나면 연무장으로 나가서 새 검을 휘둘렀고, 클레어와 자웅을 겨뤘다. 이쯤 되면 서로 말도 필요 없었다. 그들은 낮에 흘린 땀 덕분에 밤새도록 푹 잤고, 자연히 새벽같이 일어났다. 그리고 굶주린 배를 채우러 내려간 식당에서 딱 마주치곤 했다. 서로의 얼굴을 확인하면 둘 중 하나가 눈빛으로 물었다.



‘한 판 가능?’



그럼 다른 쪽도 눈빛으로 대꾸했다.



‘가능. 열 판도 가능.’



어마어마한 양의 달걀과 햄, 베이컨을 먹어치운 그들은 곧장 연무장으로 달려나갔다. 실로 어마어마한 열정이었다. 아네트는 검에 인생을 건 두 사람이 만나면 어디까지 합이 맞을 수 있는지를 실시간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의 뒷모습을 배웅한 아르옌이 몸을 뒤로 기대며 느긋하게 다리를 꼬았다.



“큰일이야, 아네트. 내 부인이 네 남편을 꼬시고 있어.”



“주먹으로요?”



아네트는 간밤에 라펠의 관자놀이 부근에 든 가벼운 멍을 떠올리며 대꾸했다. 엄밀히 말하면 주먹 대신 팔꿈치로 얻어맞아 생긴 멍이랬지만, 뭐. 그리 중요한 차이는 아니었다. 창백한 손가락으로 우유컵을 만지작거리던 아르옌이 말했다.



“왜 바이에른에는 검술 유전자가 없는 거지? 이토록 오래된 명문가인데, 적어도 한 명쯤은 유명한 검사가 있을 법도 하잖아.”



“글쎄요. 대체로 근력이 없는 체질이라 그런 게 아닐까요?”



고개를 갸웃한 아네트가 나름대로 진지하게 의견을 어필했다. 확실히 그녀의 말마따나 바이에른 가 사람들은 대체로 호리호리한 체격이었다. 덕분에 무도회에서 입는 화려한 의상들을 소화하기엔 좋은 옷걸이였으나, 그게 다였다.



바이에른 가의 남자들은 어릴 때 교양 수업의 일환으로 기초 검술을 배웠다. 그러나 투자하는 시간 대비 효율이 퍽 나쁜 편이었다. 한 마디로 재능이 없다, 이 말이었다. 덕분에 역대 바이에른 가의 인재들은 전부 문관이었다. 그들 중 한 명인 아르옌이 피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아네트를 향해 고갯짓을 했다.



“우리도 나가자, 아네트. 날씨도 좋은데 밖에서 차나 마시자고. 이왕이면 재밌는 구경도 해 가면서.”



아네트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위층에 올라가 책을 좀 가져와야 할 것 같았다. 어차피 이렇게 말해놓고 아르옌 본인 또한 서류를 잔뜩 가져올 것이다. 그리고 티 테이블에서 차를 물약처럼 들이키며 죽도록 일하겠지.



아르옌의 섬세한 눈가에 길게 드리운 연보랏빛 다크서클은 사라질 기미가 안 보였다. 덕분에 뺨에 새겨진 흑거미는 뜻하지 않게 칙칙한 특수효과를 얻게 되었다. 아르옌의 말마따나 높이 올라간 자일수록 사방에서 화살이 날아오는 모양이었다. 그의 경우는 화살촉이 서류로 되어있다는 게 특이한 점이었지만 말이다.



한편, 오전의 우아한 티타임을 준비 중인 바이에른 남매와 달리 연무장 상황은 다소 과격했다. 발밑으로 연무장의 흙을 쓱 밀어본 클레어가 호기롭게 외쳤다.



“좋아, 오늘도 불타오르는데! 날씨도 좋고!! 흙의 상태는 더 좋고!!!”



평소 같았으면 라펠도 함께 몸을 풀며 그녀의 호기로움에 응했을 터였다. 그러나 라펠은 지금 다른 곳에 신경이 팔려있었다. 겉으로 보기엔 대수롭지 않게 딴 곳을 보는 것 같았지만, 같은 검사인 클레어는 알 수 있었다. 라펠은 지금 누군가를 대단히 의식하는 중이었다.



“왜요? 구경꾼이 있으니까 긴장됩니까?”



허리에 손을 얹은 클레어가 개구진 미소를 지으며 도발적인 멘트를 날렸다. 그러자 라펠이 쓸데없는 소리 말라는 듯 질색하는 얼굴을 했다. 이 와중에도 그의 새파란 눈동자는 힐끗힐끗 연무장 바깥쪽의 잔디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곳에 있는 건 다름 아닌 아네트였다.



아르옌과 함께 나온 그녀는 짙푸른 잔디 위에 도톰한 카펫을 깔고, 티 테이블의 위치를 조정 중이었다. 보아하니 자신들의 대련을 구경하며 차라도 마실 모양이었다. 덕분에 라펠은 평소보다 부쩍 긴장하기 시작했다. 그래서인지 클레어의 놀림을 평소처럼 무시할 수가 없었다.



“우우, 뜨거운 시선! 부인을 아끼는 마음은 갸륵하다만, 그렇다고 봐 주진 않아요. 갑니다?”



“얼마든지 오시죠. 입으로만 도발하지 말고.”



자신을 바라보며 싱긋 웃는 클레어의 표정이 어쩐지 여우 같았다. 라펠은 뭔가 꿍꿍이가 있는 듯한 그녀의 표정에 질색하며 검을 뽑아 들었다. 그러자 클레어가 기다렸다는 듯 곧바로 검을 부딪쳐 왔다. 몇 합을 주고받고 나자, 라펠의 눈동자가 본격적으로 서늘한 예기를 품었다.



라펠은 이 순간이 좋았다. 오롯이 검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 모든 감각이 예민하리만큼 활성화되고, 주위의 어떤 소음도 잡념도 전부 머릿속에서 사라져 갔다. 그럼 남는 것은 오직 눈앞의 상대방뿐. 날카롭게 휘두르는 검의 궤도, 집중하는 눈빛, 부딪쳐 오는 숨결. 여기에 온통 신경을 기울이다 보면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검을 부딪치는 데 말은 필요 없었다. 클레어도, 라펠도 둘 다 검에 인생을 바친 사람들이었으니까. 하지만 라펠이 미처 몰랐던 사실이 하나 있었다. 대련 상대인 클레어는 의외로 구경꾼이 있으면 말이 많아지는 타입이었다.



“역시 평소 실력이 안 나오잖아요! 다리의 움직임도 뻣뻣하고, 검의 궤도도 너무 뻔한데. 대체 왜 이렇게까지 긴장하는 거죠? 응?”



매섭게 몰아붙이는 클레어의 검 끝이 라펠을 향했다. 그는 이를 악물며 그 검을 받아쳤다.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부딪친 두 검 사이에서 불똥이 튀었다. 마주 댄 검신에 힘을 준 클레어가 얼굴을 바짝 갖다 대었다. 그녀의 이지적인 초록색 눈이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라펠을 바라보았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진 모르겠지만, 뭔가를 안다는 눈빛으로 보는 게 영 찝찝했다. 이에 라펠이 눈가를 찡그리며 클레어에게서 막 떨어지려던 찰나였다. 목소리를 낮춘 클레어가 불쑥 그에게 질문을 던져왔다.



“당신, 솔직히 말해봐요. 아네트를 사랑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