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라펠은 결혼식장에서 덜덜 떨며 자신에게 키스했던 아네트의 얼굴을 아직도 선명히 기억했다. 당시엔 그저 재미있다고만 생각했는데, 왜 지금 회상하니 새삼 가슴이 뛰는 건지. 별생각 없이 던진 라펠의 말을 들은 아네트가 뺨을 붉혔다.
“부부잖아요. 이제 저도 이 정도쯤은 말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해요. 당신은 너무 제멋대로인걸요.”
우아하게 브러쉬를 휘두른 아네트가 핀잔했다. 라펠은 순해 빠진 그녀의 얼굴에서 도도한 말투가 나오는 게 귀엽다고 생각했다. 피식 웃은 라펠이 집었던 셔츠를 내려놓고 아네트에게 어슬렁어슬렁 걸어왔다. 그리고 의자에 앉아 있던 아네트를 번쩍 안아 올려 화장대 위에 앉혔다.
“라펠?”
졸지에 새하얀 화장대 위에 걸터앉게 된 아네트가 의아한 얼굴로 그를 마주 보았다. 웃음기를 지운 라펠의 진지한 얼굴이 꼭 아름다운 야수 같았다.
그의 짙푸른 눈동자가 가만히 자신의 얼굴선을 따라 더듬자, 괜스레 호흡이 가빠졌다. 이윽고 큼지막한 손이 그녀의 뺨을 감싸 쥐었다가 목덜미를 쓸어내렸다. 검 때문에 못이 박힌 그 손은 거칠었지만, 그만큼 따뜻하기도 했다. 속눈썹 그늘 밑으로 한층 더 깊어진 눈빛을 한 라펠이 심각하게 물었다.
“당신도 알고 있지? 당신이 예쁘다는 거.”
“……제가요?”
“몰랐나? 그걸 믿고 나에게 이러는 줄 알았는데.”
아네트는 그가 농담을 하는 줄 알고 피식 웃었다. 하지만 자신의 뺨을 쓸어내리고, 머리칼을 만지작거리는 라펠의 얼굴은 진지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의 눈빛이 꼭 경이로운 무언가를 보듯 자신을 바라보고 있어서 뺨이 화끈 달아올랐다. 그러나 라펠은 눈 하나 깜박하지 않고 태연하게 내뱉었다.
“머리칼도, 눈도, 입술도 다 반짝거리지. 당신이란 여자는.”
“그건, 햇살을 받아서…….”
오후의 햇살 속, 흐트러진 차림으로 화장대 위에 걸터앉은 아네트는 새삼 이 상황이 부끄러워졌다. 그녀는 어찌할 줄 몰라 눈을 피하며 그의 어깨를 밀어냈다. 하지만 라펠은 순순히 밀려나 주지 않았다.
눈도 깜박이지 않고 아네트를 내려다보던 라펠이 화장대의 가장자리를 짚고 느릿하게 고개를 숙였다. 아직까지 정사의 열기가 남아 뜨거운 그의 입술이 아네트를 집어삼켰다. 단단한 혀끝이 입안을 훑고, 예민한 입술 가장자리를 할짝거렸다. 짧지만 열렬한 키스를 끝마친 라펠이 고개를 들고 아네트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리고 입꼬리를 비틀며 소년 같은 얼굴로 해사하게 웃었다.
“핥아서 타액을 묻혀 놓으니 더 반짝이는군. 예뻐.”
라펠에게 연거푸 두 번이나 예쁘다는 소리를 들은 아네트가 결국 새빨개졌다. 미혼일 땐 사교계에서 수도 없이 들었던 말인데, 왜 갑자기 심장이 고장 난 것처럼 뛰어대는 건지.
입술을 깨문 아네트가 자신의 가슴 위를 지그시 내리눌렀다. 이런 상황은 별로 좋지 않았다.
* * *
저녁 식사는 화기애애했다. 침실에서 쉬고 나온 아르옌은 아까보다 안색이 많이 나아져 있었다. 줄곧 격무에 시달린 데다, 델티움까지 오는 긴 여행으로 어지간히 피곤했던 모양이었다.
짧은 낮잠만으로도 훨씬 생기가 도는 아르옌은 마지막 요리까지 알뜰히 비웠다. 그는 깨작거릴 것 같은 겉모습과 달리 꽤 대식가였다. 냅킨으로 입가를 닦아 낸 아르옌은 보라색 눈으로 라펠을 바라보았다. 그가 미소짓자, 뺨에 그려진 흑거미가 살아있는 것처럼 꿈틀거렸다.
“명성은 많이 들었습니다. 아주 뛰어난 검사라죠. 어쩌면 소드 마스터가 될지도 모르는 사람이 내 매부라니, 기쁘군요.”
“과찬의 말씀을.”
그러는 아르옌은 이미 델티움을 넘어서서 샤펠 제국에까지 명성을 떨치는 수재였다. 그에게 입발린 칭찬을 받아봐야 떨떠름할 뿐이었다.
라펠은 어쨌든 고개를 까딱하며 예의 표시를 했다. 이를 본 아네트는 속으로 웃었다. 저 독불장군 같은 성격에 자신의 오라비를 접대한답시고 노력하는 게 보였다. 이때, 아르옌이 문득 자신의 손뼉을 짝 쳤다.
“아참, 내 정신 좀 보라지. 하마터면 선물을 깜박할 뻔했군요. 결혼식에도 참석하지 못한 무심한 친족인데, 저택에 빈손으로 오는 건 너무 뻔뻔하겠죠.”
별생각 없이 그 말을 듣던 아네트는 불현듯 의아했다. 하마터면 ‘깜박할’ 뻔했다고? 그 아르옌 바이에른이? 뭔가가 좀 이상했다.
‘아냐, 오라버니가 뭔가를 잊을 리 없어.’
괜히 아르옌이 세기의 천재라고 떠받들어지는 게 아니었다. 그는 뭔가를 한 번 보면 결코 잊어버리는 법이 없었다. 아네트는 분홍색 눈을 가늘게 뜨며 자신의 오라비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라펠은 심드렁한 표정이었다.
선물, 누구나 좋아할 단어였다. 하지만 라펠에겐 그리 매력적인 미끼는 아니었다. 많은 전리품을 하사받은 그는 꽤 부유한 편이었고, 딱히 물욕이 있는 편도 아니었다. 굳이 따지자면 오히려 출세욕 쪽에 더 흥미가 있었다.
어차피 아르옌이 가져온 선물이라고 해 봐야 보석, 비단, 제국의 특산품, 뭐 그런 것이겠거니 싶었다. 하지만 아르옌은 그런 뻔한 것으로 남을 꾈 만큼 머리 나쁜 인간이 아니었다. 가느다란 눈웃음을 지은 아르옌이 뻔뻔하게 라펠을 꾈 떡밥을 던졌다.
“혹시 아론다이트의 검이라고 아십니까? 꽤 유명하다던데요.”
“아론다이트의 검…… 말입니까? 설마 그, 절대로 이가 빠지지 않는다는 명검? 지금은 라우렌 지역의 장인만 만들 수 있다던데.”
아니나 다를까, 라펠의 눈이 대번에 흥미를 보였다. 그는 식사 직후라서 다소 느른했던 자세마저 바짝 고쳐앉을 만큼 솔깃했다. 사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검사에게 명검 선물이라니! 이는 고양이 앞에 캣닙을 흩뿌리는 거나 다름없는 행위였다. 아르옌이 느긋하게 자신의 백금발을 만지작거리며 웃었다.
“아, 역시 검사라서 잘 아시는군요. 변변찮은 선물입니다만, 매부의 환심을 사는 데 도움이 될까 하여 가져왔지요. 무거워서 내리진 않고 마차 뒤쪽에 놔뒀습니다만…… 한번 보시겠습니까?”
대답은 굳이 들을 필요도 없었다. 라펠의 허벅지는 이미 의자에서 반 뼘쯤 떨어진 상태였다. 당장이라도 이 자리를 박차고 뛰어나가 검의 실물을 보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안절부절못하던 라펠이 마치 허락이라도 구하듯 아네트 쪽을 흘끗 바라보았다. 저녁 식사 테이블에 아네트를 혼자 놔두고 뛰쳐나가려니 마음이 쓰이는 모양이었다. 이를 본 아네트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선물이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네요, 라펠. 얼른 보고 와요.”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라펠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성급한 그의 움직임에 의자 다리가 카펫에 걸려 휘청할 정도였다. 라펠의 흥미를 끄는 데 성공한 아르옌이 웃으며 자신의 아내를 돌아보았다.
“클레어, 내 사랑. 괜찮다면 그에게 선물을 좀 보여주겠어? 나 같은 샌님보다야 그대들끼리 확인하는 편이 얘기가 더 잘 통하겠지.”
“물론이지, 달링. 그간 아네트와 천천히 못다 한 얘기나 하고 있으라고.”
자리에서 일어난 클레어가 남편의 옅은 머리칼 위에 입을 맞추고 나갔다. 라펠이 그런 클레어의 뒤를 조바심내지 않으려고 애쓰며 졸졸 따라갔다. 이제 디너 테이블에 남은 사람은 오직 아르옌과 아네트, 두 명의 바이에른뿐이었다. 냅킨을 내려놓은 아네트가 자세를 바로잡으며 자신의 오라비를 바라보았다.
“무슨 얘기를 하려고 라펠을 내보내셨나요?”
“저런. 벌써 눈치챘구나. 역시 내 동생은 똑똑하기도 하지.”
자신의 관자놀이를 괸 아르옌이 빙그레 웃었다. 혈색이 거의 없어 연한 분홍색을 띤 그의 손톱이 테이블 위를 타닥, 타닥 두들겼다. 머릿속으로 뭔가를 고심할 때 아르옌이 흔히 하는 버릇이었다. 한동안 말을 고르던 아르옌이 입 밖으로 낸 건 다소 뜬금없는 사과였다.
“미안하구나, 아네트. 네 결혼식에 가지 못해서. 꼭 가고 싶었었는데.”
“아녜요, 오라버니. 그건 정말로 괜찮…….”
반사적으로 손을 내저으며 대꾸하던 아네트의 표정이 문득 굳어졌다. 그녀는 한층 어두워진 눈동자로 아르옌을 보며 물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로군요. 그렇죠? 그래서 오라버니도, 클레어 언니도 제 결혼식에 못 왔던 거예요.”
“맞아. 표면적으론 군사령관이 암살당할 뻔해서, 그 건의 뒷수습을 한다고 했었지. 하지만 사실은 말이지…… 내가 그 배후로 의심받고 있었거든. 그래서 델티움으로 돌아갈 수가 없었어. 그 상황에서 자리를 비웠다간 내 입지가 완전히 끝장났을 테니까.”
아무렇지도 않게 엄청난 발언을 한 아르옌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 말에 아네트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안 그래도 외국인이라 제국 내에서 여러모로 불리했던 아르옌이었다. 근데 사령관을 암살했다는 누명까지 쓸 뻔했다니! 정말로 위험천만한 상황이었던 게 틀림없었다.
“누가 그런 짓을 꾸몄나요? 짚이는 곳은요?”
“많지. 너무 많아서 헤아릴 수가 없을 정도야. 덕분에 실마리를 잡는 데 너무 오래 걸렸어.”
아르옌이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기지개를 켰다. 외국인 출신의 젊은 총리대신은 말 그대로 눈엣가시나 다름없었다. 클레어와 그 가문이 버티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아르옌을 끌어 내리길 원하는 세력은 밤하늘의 별만큼 많았다. 그래서 처음에는 제국의 정적들 중 하나가 꾸민 음모라고 생각했었다. 뭐, 얼마 지나지 않아 진짜 배후를 짚어내긴 했지만 말이다.
아르옌은 자신의 말을 경청하는 누이동생을 바라보았다. 귀여운 아네트, 상냥한 아네트. 그의 머릿속에 아네트는 늘 어리고 사랑스러운 소녀로 남아있었다. 자신이 얼마 지나지 않아 샤펠 제국으로 가버렸기 때문에, 그 이미지는 더욱 오래 유지되었다. 한 마디로 아르옌에게 있어서 아네트는 늘 지켜 줘야 할 무구한 존재였다.
하지만 오늘 본 아네트는 많은 발전을 한 모습이었다. 상처받기 쉬웠던 눈동자엔 또렷한 지성이 깃들었고, 부드러운 입술엔 단호한 결의가 맺혀 있었다. 자신이 한마디 하면 열 마디를 알아듣는 영특한 누이동생을 본 아르옌은 몹시 흡족해졌다. 역시 핏줄은 어디 가지 않았다.
“아네트.”
부친인 알라만드를 닮은, 하지만 그보다 더 밝은 보랏빛 눈동자가 아네트를 응시했다. 웃음기를 지운 아르옌이 그녀에게 진지하게 물었다.
“네 남편을 얼마나 믿고 있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