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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화





















이게 대체 무슨 소리지? 라펠은 동요했다. 아르옌의 창백하기까지 한 뺨에 새겨진 흑거미 문신은 눈에 잘 띄었다. 근데 이 문신이 설마, 자신의 눈에만 보이는 걸까? 무슨 마법이라도 되나?



진지한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는 아르옌과 라펠 사이에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바로 그때, 한숨을 내쉰 아네트가 뒤에서 아르옌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라펠을 놀리지 말아요, 오라버니. 그는 이런 장난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장……난이라고?”



라펠이 떨떠름하게 되묻자, 아네트가 미안하다는 눈짓을 건넸다. 무거웠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산산이 흩어졌다. 여동생에 의해 장난을 방해받은 아르옌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 갸름한 얼굴에 비해 긴 입꼬리를 피식 비틀며 사과했다.



“아, 이거 미안합니다. 클레어가 하도 그쪽 얘기만 하길래, 질투가 나서 그만.”



놀림당한 라펠의 표정이 험악하게 변했다.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오히려 화를 바로 낼 수 없었다. 자신에게 이딴 시시한 장난을 걸다니.



라펠은 어지간한 남자보다 머리 하나가 더 큰 장신이었고, 몸 또한 훈련으로 인하여 근육이 꽉 짜여 있었다. 간혹 사람이라기보단 어떤 포식자에 가까운 위험한 느낌이 들 지경이었다. 이 때문에 같은 남자들은 라펠 앞에 서면 본능적으로 위축되곤 했다. 마치 승냥이가 범 앞에서 기를 펴지 못하듯이.



근데 이런 자신의 앞에서, 초면부터 시시껄렁한 농담을 건네다니. 라펠은 호리호리한 아르옌의 체구를 내려다보며 말 그대로 기가 막혔다. 이 계집애처럼 곱상한 남자는 간이 부은 게 분명했다. 아마 자신의 머리와, 제국에서의 지위를 믿고 이러는 모양이었다. 그게 아니면…….



“라펠. 혹시 기분 상했어요?”



……세상에서 제일 예쁜 자신의 여동생을 믿고 이러는 거던가. 라펠은 곁에서 걱정스레 자신을 올려다보는 아네트의 얼굴을 보자 급격히 화가 식었다. 그래, 다른 건 고사하고 명색이 손위처남인 아르옌에게 성질을 부릴 순 없는 노릇이었다. 아네트의 얼굴을 봐서라도 참아야 했다.



라펠이 화를 꾹 억누르자, 아르옌이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며 등을 돌렸다. 의외로 제 목숨 아까운 줄 모르고 나다니는 타입인 것 같았다. 이때, 클레어가 자신의 남편에게 달라붙으며 그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어때? 당신도 라펠이 마음에 들지? 타고난 재능 때문에 재수가 없는 게 흠이지만. 어쨌든 나쁘지 않다니까! 무엇보다 허공에서 궤도를 자유자재로 트는 그 변칙적인 초식과 창의적인 응용기가 대단히 훌륭하고, 또 그걸 가능케 하는 근력의 수준이…….”



“그래그래, 알겠다고. 이 머릿속에 검밖에 없는 여자야. 5일 만에 보는 건데, 남편 앞에서 자꾸 딴 남자를 칭찬할 셈이야?”



아르옌이 신경질적인 얼굴에 미소를 띠며 의외로 다정하게 클레어를 끌어당겼다. 숏커트 때문에 고스란히 드러난 클레어의 뺨에 입을 맞추는 모양새가 무척 자연스러웠다. 겉으로만 보면 썩 잘 어울리는 부부는 아닌데, 의외로 금슬이 좋은 모양이었다.



클레어는 여자 중에서도 키가 커서 남편과 거의 비슷했다. 머리 색도 짙푸른 색이고, 콧대나 턱선도 날카로운 느낌이 강해서 오히려 클레어 쪽이 더 남성미가 있었다. 반면 아르옌은 연한 백금발에 여동생처럼 섬세한 이목구비라, 남자인데도 예쁘장하고 신경질적인 느낌이었다. 그나마 왼뺨에 새겨진 흑거미 문신이 자칫 여자처럼 보일 수 있는 외모에 경각심을 불어넣어 주었다.



“아, 이 문신에 대해 궁금해하셨죠? 그래도 새긴 지 몇 년은 됐는데, 델티움 사람들은 제 문신의 존재를 잘 모르더군요. 귀국할 때마다 다들 놀란다니까요. 아마 소문이 덜 나서 그럴 테죠. 샤펠 제국에선 흑거미를 터부시하거든요.”



라펠과 눈이 마주치자, 아르옌이 여상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피로로 인해 눈 밑에 옅은 그늘을 매단 상태에서도 제법 성실하게 설명하고 있었다. 제 딴에는 아까 장난을 친 것에 대한 사과의 제스처 같았다.



“제국에 남아 있는 옛 신화와 관련된 미신이죠. 샤펠 제국인들은 흑거미를 무척 두려워해요. 그들의 신이 누군가를 징벌할 때 보내는 죽음의 사자거든요. 그래서 입에 담는 것만으로도 벌을 받을까 봐 꺼리는 편이죠.”



이 때문에 델티움까지 소문이 잘 안 퍼진다며 아르옌이 투덜거렸다. 애초에 그는 정말로 바쁜 몸이었다. 하나뿐인 여동생, 아네트의 결혼식에도 끝내 불참했던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덕분에 델티움으로 귀국하는 것도 몇 년에 한 번이 고작이었다.



그러다 보니 델티움 왕국인들은 아르옌에 대해 그 명성만 알고 있었다. 타국에서 출세한 자국민은 자랑의 대상이 되기 마련이었다. 자연히 사교계에선 종종 아르옌의 이름이 거론되었다. 하지만 정작 아르옌에 대해 ‘진짜로’ 아는 사람은 몇 없었다.



이러면 샤펠 제국민이라도 좀 적극적으로 입소문을 내줘야 할 텐데, 그들은 흑거미의 존재 자체를 입에 올리길 꺼렸다. 덕분에 아르옌의 문신에 대해선 말이 그다지 퍼지지 않았다. 이 때문에 아르옌은 간혹 델티움으로 귀환할 때마다 남들의 시선에 몹시 귀찮아졌다.



“그러게 왜 얼굴에 문신을 한 겁니까? 얼마든지 다른 곳에 할 수도 있었을 텐데.”



아까의 뒤끝이 여실히 남은 라펠이 불만스러운 눈빛으로 물었다. 그러자 아르옌이 눈 밑에 드리운 옅은 보라색 그늘을 문지르며 대꾸했다.



“뭐, 제가 비록 거창한 타이틀은 달고 있지만 이래 봬도 좀 힘든 상황이라서요. 완장만 차면 뭐 하겠습니까? 외국인이니 뭐니 하며 들어 처먹질 않는데. 보시다시피 제 얼굴도 이런 편이니 카리스마를 찾긴 영 글렀죠. 그래서 이 콧대 높은 샤펠 제국민들에게 제 ‘의지’를 좀 보여줄 필요가 있겠더군요. 최대한 인상적인 방식으로 말이죠. 사실 흑거미 말고 뱀으로 할까도 고민했는데, 둘 중 거미를 더 무서워한다더군요.”



확실히 아르옌의 표정은 피곤해 보였다. 라펠은 저 눈을 잘 알고 있었다. 끝없는 전쟁의 폐허 속에서 적들에게 둘러싸인 병사의 막막한 얼굴. 할 수 없이 검을 움켜쥔 손에는 생의 고단함이 묻어있는 그런 느낌. 아무래도 아르옌의 어깨에는 보기보다 많은 짐이 지워져 있는 게 틀림없었다.



“그래도 그 문신은 꽤 효과가 좋았잖아요. 그렇죠, 오라버니?”



무거워진 분위기를 의식한 아네트가 상냥하게 웃으며 되물었다. 모처럼 보는 여동생의 미소에 아르옌의 성마른 입가에도 웃음이 떠올랐다.



“아주 톡톡히 봤지. 미신에 휘둘리는 고리타분한 영감탱이들은 나와 눈도 마주치지 않는다니까! 덕분에 외국인이 뭘 알고 지껄이냐는 반발도 예전보다 훨씬 줄어들었고 말이지. 그들의 가장 오래된 신화가 내 얼굴에 새겨져 있는 셈이니까 말야.”



자신의 창백한 왼뺨을 손가락으로 툭 건드린 아르옌이 웃었다. 그러자 클레어가 그의 손을 잡고서 손등에 입을 맞췄다. 그녀의 날카로운 이목구비에 자신감 넘치는 웃음이 떠올랐다.



“걱정하지 마, 내 사랑. 앞을 가로막는 장애물은 그 무엇이 된다 한들 부수고 통과하면 그만이지. 난 언제나 당신을 지키는 가장 날카로운 검이 될 거야.”



“클레어……. 제국에서 얻은 무수한 것들 중, 당신만이 내 진짜 보물이야.”



미소 지은 아르옌이 자신의 아내를 끌어당겨 가볍게 입 맞췄다. 이를 본 라펠은 속으로 ‘지랄 염병을 하고 자빠졌군.’이라고 생각했지만, 예의 바르게 이를 입 밖으로 내진 않았다. 부부의 닭살 행각에 급격히 피곤해진 라펠은 서둘러 아르옌에게 침실을 안내해 주었다. 그리고 그들이 실컷 회포를 풀 수 있게끔 문을 쾅 닫아주고 나왔다. 라펠의 섬세한 눈썹 사이에 잡힌 미묘한 주름을 캐치한 아네트가 웃었다.



“손님 접대하느라 고생 많았어요, 후작 각하.”



“별말씀을, 부인.”



아네트의 장난스러운 말에 라펠이 비로소 입술 끝에 미소를 머금었다. 팔을 뻗어 그녀를 번쩍 안아 든 라펠이 퇴폐적인 어조로 속삭였다.



“잘했으면 상을 줘야지. 아직 저녁까진 시간이 좀 남았어. 그러니 우리도 부부끼리 할 수 있는 일을 하러 가자고.”









관계가 끝난 뒤, 남는 건 쾌감의 뻐근한 후유증과 약간의 공허함이었다. 아네트는 자신의 몸을 채운 열기가 서서히 식고 난 뒤 몰려드는 씁쓸함을 곱씹었다. 그리고 약간 떨리는 다리를 모으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모처럼 아르옌이 왔는데 저녁 식사쯤은 같이 해야 했다.



화장대 앞에 가 앉은 아네트는 가만히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흐트러진 머리칼이, 새하얀 얼굴을 물들인 홍조가, 입가에 살짝 번진 루즈가 낯설었다. 언제나 한 점 오차도 없는 단정함을 요구받으며 살았기에 더더욱 지금이 생소할 때가 있었다. 하지만 아네트는 왕세자비가 되기 위해 길러졌던 그때보다 지금이 훨씬 더 좋았다.



이때, 뒤에서 뻗어 나온 큼지막한 손이 그녀의 턱을 잡고 얼굴을 위로 들어 올렸다. 고개가 한껏 젖혀진 상태에서 눈을 뜨자, 라펠의 얼굴이 거꾸로 보였다. 그의 완벽한 이목구비는 심지어 거꾸로 봐도 결점을 찾을 수 없었다. 허리를 숙인 라펠이 그녀의 이마에 뜨거운 입술을 내리눌렀다. 그리고 퉁명스러운 핀잔을 던졌다.



“끝나기 무섭게 일어나 버리는군. 하여튼 매정하긴.”



툴툴대는 라펠의 말을 들은 아네트가 눈동자를 굴렸다. 그는 뭔가가 불만스러우면 바로바로 표현하는 편이라 알기 쉬웠다. 언제나 귀족답게 돌려 말하는, 일종의 의뭉스러운 화법에 익숙한 아네트는 종종 그의 직설적인 화법이 신선했다. 그래도 이젠 라펠의 떼를 들어주고 싶지 않았다. 그는 슬슬 자신이 없는 삶에 익숙해질 필요가 있었다.



“당신도 저녁 식사에 함께할 거죠? 그럼 지금부터 준비해야 해요. 그러지 말고 얼른 옷 입어요, 라펠.”



브러쉬를 집어 든 아네트가 자신의 엉킨 금발을 빗어 내리며 부드럽게 타일렀다. 그러자 라펠이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도 자신의 건장한 알몸에 바지를 걸쳤다. 그리고 셔츠를 향해 손을 뻗다 갑자기 피식 웃었다.



“이젠 나에게 잔소리도 다 하는군. 처음엔 바짝 긴장해서 부들부들 떨더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