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라펠의 질문은 당혹스럽기 그지없었다. 적어도 아네트에겐 그랬다. 저, 정말로 셀레스틴이 누군지 몰라서 묻는 걸까? 그래도 명색이 배다른 형제의 약혼녀인데? 떨리는 동공을 숨기지 못한 아네트가 떨떠름하게 대꾸했다.
“키어스 후작가의 셀레스틴이에요. 그…… 루드비히 전하의 약혼녀죠.”
“뭐? 그 눈매 나쁜 여자가?”
라펠이 인상을 확 찡그렸다. 가뜩이나 루드비히도 꼴 보기 싫은데, 그 약혼녀까지도 마음에 안 들었다. 만약 그녀가 누군지 알았다면 친절한 대화의 시간을 좀 가졌을 텐데. 이를테면 ‘네 남자 간수 좀 똑바로 해라.’ 같은 대화 말이다.
번듯한 약혼녀까지 있는 놈이 아네트, 아네트 하며 남의 부인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꼴이라니. 라펠의 눈가에 짜증이 어렸다.
“대체 그놈은 왜 당신에게 그토록 미련을 갖는 거지?”
라펠의 팔이 반사적으로 아네트를 좀 더 바짝 끌어당겼다. 마치 그녀에 대한 소유욕을 증명하기라도 하듯이. 라펠의 수려한 옆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진 걸 본 아네트가 달래듯 그의 이름을 불렀다.
“라펠.”
“아니, 이상하잖아. 약혼녀도 있는 새끼가 지금 뭐 하자는 거지? 당신을 정부로 삼고 싶기라도 한 건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군.”
으르렁거린 라펠이 이제는 숫제 양팔로 아네트를 꽉 끌어안으며 짜증을 부렸다. 그 꼴이 마치 자신의 새끼를 빼앗길까 봐 경계하는 짐승과도 같았다. 그 팔 안에서 이리저리 휘둘리던 아네트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잠시 여기 앉아봐요, 라펠.”
라펠의 팔 안에서 가까스로 빠져나온 아네트가 근처 벤치를 가리켰다. 라펠이 순순히 그곳에 가 앉자, 아네트도 그의 옆에 붙어 앉았다. 그녀는 약간 헝클어진 머리칼을 귀 뒤로 넘기며 천천히 말을 골랐다. 매사에 말하기 전, 신중히 생각하는 게 아네트의 장점 중 하나였다.
“제가 루드비히 전하를 처음 만난 건 여덟 살 때였어요. 처음 그분을 만났을 때, 폐하와 제 아버지는 말씀하셨죠. 너희 둘은 나중에 커서 결혼할 테니 지금부터 잘 지내라고요. 아마 그때부터…… 일종의 애착 관계가 형성되었던 거겠죠. 어린 나이에 처음으로 명확한 연결 고리가 있는 이성을 만난 셈이니까요.”
라펠의 표정이 조금 묘해졌다. 부인의 옛 남자 이야기를 듣는 상황은 충분히 기분이 나쁠 법했다. 특히나 영역 및 소유욕 개념이 강한 라펠에겐 더더욱 불쾌한 일이었다. 하나 문제는…… 아네트의 말투가 너무 이성적이었다.
만약 그녀가 좀 더 추억에 잠긴 목소리로 얘기했다면 속이 부글부글 끓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지금 아네트는 무슨 ‘유년 시절의 애착 관계 형성에 대한 추론’ 같은 느낌으로 말하고 있었다. 덕분에 응당 들어야 할 불쾌감이 들질 않았다. 오히려 그 말투 덕에 아네트의 안에선 루드비히가 이미 ‘정리된 사람’이란 걸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전하께선 좀 예민하고 불안정한 구석이 있으세요. 스트레스에 약한 편이죠. 상황이 악화되면 그때 그 무도회에서처럼 발작도 간혹 일으키시고요. 그래서 주기적으로 스트레스를 풀 곳이 필요해요. 예전엔 류트 연주로 어느 정도 해소했지만, 지금은 그것도 어렵죠. 폐하께선 루드비히 전하가 악기를 만지는 걸 아주 싫어하시거든요.”
“왜 싫어하지? 악기를 다루는 건 고상한 취미 아닌가?”
“폐하께선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군주의 자질’이 명확하세요. 그리고 그 기준에 비해 루드비히 전하가 좀…… 유약하다고 생각하시죠. 오히려 전하의 취미가 검술이나 사냥 쪽이었다면 좋아하셨을지도 모르겠네요. 그편이 더 ‘남자답다.’라고 말이에요.”
그 말에 라펠은 짚이는 구석이 있어 납득했다. 셀그라티스가 자신을 친자로 인정하고, 뒤를 밀어주기로 결심한 이유 또한 검술이었다. 만약 자신의 재능이 악기 연주나 그림 따위였다면 진즉에 셀그라티스에게 팽 당했을지도 몰랐다.
셀그라티스는 사생아 따위를 친히 귀족으로 만들어 줄 만큼 진보적인가 하면, 한편으론 전통적인 남성성을 따질 만큼 보수적인 측면도 있었다. 하긴, 인간은 누구나 다소 모순적인 이중성을 가지기 마련이었다. 그 누가 완벽한 일관성만으로 긴 생애를 살아갈 수 있을까.
“상황이 이렇다 보니, 전하께선 저를 불러 종종 하소연하시곤 했죠. 들어주는 사람이 있는 것만으로도 훨씬 중압감이 덜해지니까요. 그렇다고 미래의 왕으로서 아무에게나 약한 모습을 보일 순 없으니, 자연히 상담은 저 하나로 한정되었어요. 그 관계가 어느덧 10년 가까이 고착되다 보니…… 이제는 힘든 일이 생기면 반사적으로 절 떠올리시는 거예요. 마치 조건 반사처럼 말이에요.”
말을 마친 아네트가 아련한 눈동자로 속눈썹을 내리깔았다. 동그란 이마 밑으로 솟아오른 작고 예쁜 콧날과, 부드러운 입술의 선이 꼭 요정 같았다. 라펠은 딴 남자를 떠올리며 동정심을 느끼는 아네트의 옆얼굴이 빌어먹도록 예쁘다고 느꼈다. 제 눈에도 이렇게 예쁜데, 딴 놈들 눈에는 오죽 예쁘겠는가.
아네트는 지금 루드비히가 자신을 찾는 게 연정 때문이 아닌, 단순히 감정 쓰레기통을 찾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라펠이 보기엔 좀 달랐다. 자신을 가로막고 아네트를 언젠가 되찾겠다며 짖어대던 루드비히의 눈은 진심이었다. 그 우스우리만큼 필사적인 꼴을 본 라펠의 기분이 절로 더러워질 만큼.
‘뭐, 아네트는 모르는 편이 더 낫겠지.’
속으로 비틀린 웃음을 지은 라펠이 그녀의 뒤통수를 끌어당겨 입을 맞췄다. 갑작스러운 입맞춤에 아네트의 눈동자가 약간 떨렸다. 하지만 그녀는 라펠을 밀어내는 대신, 가만히 눈을 감고 입맞춤을 받아들였다. 턱을 감싸 쥐고 입술을 내리누르는 그의 사나운 숨결에 잡아먹히는 것 같아 아찔했다.
눈을 살짝 뜨면 보이는 잘생긴 눈썹이, 날카로운 눈매가 요요하게 아름다웠다. 그래서인지 오늘따라 유독 더 슬펐다. 그가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언젠가 그를 떠날 예정인 자신의 미래가.
라펠은 가족이란 것과 거리가 먼 인생을 살았다. 굳이 가족이란 이름을 붙이자면, 황송하게도 왕인 셀그라티스가 전부였다. 이복동생인 루드비히는 남보다 못한 사이였고, 죽은 줄 알았던 외삼촌인 벤 마치에 대해선…… 아예 말을 말자.
어쨌든 라펠에게 있어서 가족이란 아주 막연하고도 떨떠름한 것이었다. 적어도 아네트가 그의 아내가 되기 전까지 그랬다. 자존심 때문에 티를 내진 않았지만, 라펠은 사실 아내의 가족을 만나는 게 무척 긴장되었다. 장인인 알라만드는 없는 셈 치면 그만이었지만, 아르옌 부부는…… 그럴 수 없었다. 아네트와 퍽 친근한 사이인 것 같았으니까.
‘그래도 클레어 바이에른은 좀 괜찮았지.’
라펠은 그녀가 샤펠 대제국에서도 명문가 출신이라길래 아주 오만한 여자를 상상했었다. 그가 아는 또 다른 명문가가 하필이면 바이에른이기에 그러했다.
하지만 실제로 본 클레어는 여러모로 라펠의 예상을 와장창 깨트렸다. 그녀가 아네트를 붙잡고 키스를 퍼부어댈 때마다 조금 짜증이 나긴 했지만 뭐, 그만하면 털털하고 좋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정작 아르옌 바이에른은 어떨까? ‘그’ 알라만드의 아들. 안 그래도 콧대 높은 바이에른의 적자인데, 심지어 뛰어난 천재이기까지 했다. 델티움 왕국을 넘어서서 무려 제국에서까지 인정받는 남자라니. 그쯤 되면 왕만큼 교만하다 한들 이상할 게 없었다.
라펠은 그에 대한 일종의 경계와 경쟁심을 느꼈다. 잘난 수컷들끼리 은연중 서로를 의식하는 것과 비슷한 감정이었다. 분야는 달랐지만, 라펠 또한 어릴 적부터 뛰어난 재능으로 떠받들어진 입장이었다. 타고난 성정도 오만한 편인지라, 자신의 능력에 대한 찬사를 줄곧 당연하게 받아들여 왔다. 그랬던 라펠에게 처음으로 잘나 보이고 싶은 여자가 생겼다.
‘근데 하필이면 그 오라비가 희대의 천재라니.’
역시 인생은 쉽지 않았다. 라펠은 못마땅한 눈빛으로 팔짱을 꼈다. 때마침 저 멀리에서 굴러들어 오는 마차 한 대가 보였다. 제국에서 한 자리 차지한 남자라 그런지, 마차의 외관부터 휘황찬란했다. 푸른 외벽에 금장으로 장식된 마차 안에선 금방이라도 루드비히 같은 은발의 왕자님이 내릴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더 재수가 없었다.
이윽고 마차의 문이 열리며, 그 안에서 늘씬한 청년이 내려섰다. 역광 때문에 잠시 얼굴이 보이지 않았지만, 그가 마차에서 내려섬에 따라 그 이목구비가 뚜렷하게 드러났다. 드디어 그 유명한 ‘아르옌 바이에른’을 직접 보게 된 라펠의 동공이 조금 커졌다.
“오라버니!!”
해사하게 웃은 아네트가 한 발짝 앞으로 다가섰다. 그러자 쇄골까지 닿는 백금발을 한 남자가 머리칼을 대강 쓸어올리며 이쪽을 바라보았다. 170 중반쯤 되는 키에 다소 호리호리한 체격을 가진 남자는 빈말로라도 위협적이진 않았다.
아르옌의 섬세한 미모는 확실히 여동생인 아네트와 비슷했다. 피부가 창백하고, 스트레스 때문에 다소 신경질적인 표정이지만 원체 이목구비 자체가 곱상해서 몽환적인 느낌이 있었다. 하지만 그를 본 라펠이 놀란 까닭은 따로 있었다. 라펠의 시선은 아르옌의 드러난 왼쪽 얼굴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문신?’
그랬다. 아르옌의 창백한 뺨 위에는 정확히 손가락 두 마디만큼 선명한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그것도 꼭 진짜처럼 생생한 흑거미 문신이.
이를 본 라펠은 충격을 받았다. 문신은 오직 용병들과 노예만 하는 것이었다. 전자의 경우는 자신의 용맹함을 과시하기 위해, 후자의 경우는 노예의 주인을 명시하기 위해.
당연히 고귀하신 귀족 나으리들은 결코 자신의 몸에 문신 따위를 하지 않았다. 하물며 그 무대포인 용병들조차도 몸에 문신은 할지언정, 얼굴에 하는 경우는 없었다. 근데 어찌하여 고명한 바이에른 출신인 아르옌이 얼굴에 문신을 했단 말인가? 심지어 저토록 눈에 띄는 것으로.
하지만 이 점을 의식하는 사람은 오직 라펠 하나뿐인 것 같았다. 아네트도, 클레어도 마치 문신이 안 보이는 것처럼 태연하게 아르옌과 인사의 포옹을 주고받았다.
“아네트, 더 예뻐졌구나. 결혼식에 참석하지 못해서 미안했어.”
“아녜요, 오라버니. 바쁜데 여기까지 와 줘서 고마울 따름이에요.”
자신의 여동생과 먼저 인사를 끝마친 아르옌이 드디어 라펠에게 다가왔다. 알라만드와 비슷한 보랏빛 눈동자가 라펠을 탐색하듯 훑었다. 이윽고 아르옌이 마른 손을 내밀어 그에게 인사를 청했다.
“초면이로군요. 아르옌 바이에른입니다. 저택에 머물게 해 주셔서 감사드리는 바입니다…… 매제.”
엉겁결에 아르옌과 악수한 라펠이 그 차가온 체온에 흠칫했다. 과연 알라만드의 아들이라 그런가, 아르옌 또한 다소 뱀 같은 느낌이 있었다. 고개를 들어 라펠과 시선을 맞춘 아르옌이 문득 그가 바라보는 곳을 눈치챘다. 자신의 왼뺨을 매만진 아르옌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당신 눈엔 보이는 겁니까? 이 문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