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아네트, 세상에! 우리 예쁜이, 순둥이!! 이게 대체 얼마 만이야!!!”
마차에서 뛰어내린 푸른 머리칼의 미인이 흥분해 외쳤다.
“클레어 언니!”
활짝 웃는 얼굴의 아네트가 달려가 클레어를 힘껏 끌어안았다. 늘 우아하게 사뿐사뿐 걷던 아네트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그래서 오히려 더 기뻐 보였다. 꽉 끌어안은 아네트를 잠깐 품에서 내려놓은 클레어가 친애의 키스를 퍼부었다. 뺨과 이마에 쏟아지는 키스를 받은 아네트가 소리 내어 웃었다. 그 웃음소리가 마치 은구슬이 굴러가듯 청명했다.
“안색이 좋네. 예전엔 찬바람이 불 때쯤 꼭 감기에 걸리곤 했는데. 그래서 겨울이 언제 올지 알려면, 아네트의 재채기 소릴 들으면 된다고 그랬었지.”
“언니도 참, 그게 언제 적 얘기인데요. 지금은 보시다시피 건강해요. 심지어 최근엔 아주 유능한 주치의까지 들였는걸요? 그녀가 종종 건강 약을 지어서 올려준답니다.”
생긋이 웃는 아네트의 얼굴에 클레어가 또 쪽쪽 뽀뽀를 했다. 나이 차 많이 나는 시누이가 귀여워 죽겠다는 눈치였다. 라펠은 몇 걸음 뒤에서 불퉁한 눈으로 그녀들의 재회를 지켜보았다. 머리로는 클레어가 여자, 그것도 아네트의 새언니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 본 클레어는 예상과 달라도 너무 달랐다.
‘저건 누가 봐도 남자잖아.’
그것도 심지어 아주 잘생긴 남자 같았다. 라펠은 중성적인 아름다움을 가진 클레어를 노려보았다. 어쩐지 코앞에서 아네트가 딴 놈과 애정행각 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듯한 기분이었다. 자연히 라펠의 심기는 엄청나게 저조해졌다.
같은 여자끼리 저러는 것도 화가 나는데, 하물며 진짜 바람이라도 나면 얼마나 속이 뒤집힐까. 상상만으로도 눈앞이 울렁거렸다. 라펠의 지독한 소유욕이 두각을 드러내며 넘실넘실 차올랐다.
이때, 라펠의 뜨거운 시선을 감지한 클레어가 이쪽을 돌아보았다. 그녀 또한 샤펠 제국에서 어엿한 기사단장을 꿰찬 만큼, 타인의 적의에 예민했다. 라펠을 발견한 그녀의 샤프한 눈매가 반짝 빛을 발했다.
‘저 놈이렸다?’
클레어의 눈이 재빠르게 라펠의 전신을 훑었다. 그녀는 라펠의 아름다운 흑발이나 또렷한 콧대, 육감적인 입술 같은 건 관심도 없었다. 클레어의 사람 보는 기준은 남들과 조금 달랐으니까.
‘저 전완근 두께 좀 봐. 악력이 엄청나겠는데? 손에서 검을 떨어트릴 일은 거의 없겠어. 신체 밸런스가 잘 잡혀 있고, 무엇보다 대퇴사두근과 대퇴이두근의 균형이 좋아 보여. 확실히 골격부터 타고 난 검골이군.’
질투를 느낀 클레어가 칫, 하는 소리를 내었다. 불행히도 이쪽 업계는 노력만으로 되는 곳이 아니었다. 날 때부터 타고난 체격 조건과 재능이 있어야 했다. 인정하긴 싫었지만, 클레어가 보기에 라펠은 확실히 둘 다 가진 재수 없는 놈이었다. 저쯤 되면 제국의 넓은 땅덩어리에까지 라펠의 이름이 떠도는 게 당연했다.
만약 다음 소드 마스터가 탄생한다면, 그건 반드시 델티움의 라펠 카네시스일 것이다.
검 좀 쓰는 기사들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입소문이었다. ‘그’ 라펠의 실물을 드디어 보게 된 클레어의 초록색 눈이 짙은 호승심으로 불타올랐다.
“드디어 만나 뵙는군요. 반갑습니다. 샤펠 제국의 달 그림자, 루시드 가의 클레어입니다.”
기사단에 몸담은 사람답게 클레어의 인사는 대단히 절도 있었다. 누가 봐도 시매부에게 하는 인사가 아니고, 기사 대 기사로서의 인사에 가까웠다.
라펠은 자신의 눈앞에 척 들이민 클레어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여자라 조금 작은 편이긴 했지만, 아주 잘 단련된 손이었다. 몇 번이고 손아귀가 터질 때까지 검을 잡고 휘두른 그런 손. 확실히 인상적이었다.
“……라펠 카네시스입니다. 아네트의 남편이죠.”
느릿하게 대꾸한 라펠이 클레어의 손을 맞잡았다. 악수라고 치기엔 지나치게 힘이 들어간 두 손아귀가 서로의 악력을 시험했다. 둘 사이에 묘한 호승심의 기류가 감돌기 시작했다. 이를 본 아네트는 의아한 얼굴로 라펠을 올려다보았다.
‘별일이네. 그가 사람에게 관심을 다 보이고.’
라펠은 개인주의가 심했고, 인간 불신은 더 심했다. 미안한 얘기지만 아네트가 보기엔 성격에 문제가 좀 있었다. 특히나 대인관계 쪽에 주로.
그래서 아네트는 오빠 부부가 방문한다는 전갈을 받았을 때, 속으로 걱정을 많이 했다. 아무리 자신의 가족이라도 라펠에겐 한낱 타인에 불과하단 걸 알았기 때문이었다. 아니, 오히려 바이에른의 성을 달고 있다고 질색하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하지만 라펠은 전생에 비해 정말 많이 변했다. 오늘만 해도 자신과 같이 클레어를 마중하러 나와 주지 않았던가? 덕분에 아네트는 줄곧 그에게 품고 있던 원망이 조금 누그러지는 것을 느꼈다.
‘예전 같았으면 어림도 없는 일이야.’
사실 아네트의 오빠 부부는 전생에도 한 번 그녀를 방문했었다. 불행히도 그땐 상황이 썩 좋지 않아서, 제대로 된 손님맞이도 못했다. 아네트는 이미 건강이 안 좋은 상태였고, 라펠과의 부부 관계는 말 그대로 최악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손님을 제대로 맞이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오빠 부부는 계속되는 아네트와 라펠의 싸움 사이에서 어색한 표정으로 얼른 돌아가 버렸다. 뭔가 할 말이 있었지만, 차마 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은 채 말이다.
‘이번엔 그런 일이 반복되지 않게 노력해야지.’
아네트는 속으로 한숨을 삼키며 라펠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녀는 요즘 라펠과 다소 거리감 있는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오랜만에 보는 혈육 앞에서까지 그런 모습을 보일 순 없었다. 그래서 잠시나마 라펠과 잘 지내는 척해 볼 요량이었다.
다정한 체 라펠의 옆에 붙어선 아네트가 클레어에게 물었다.
“아르옌 오라버니는 언제쯤 오신댔죠?”
“음, 내 기억대로라면 4일 후? 아직 일 처리가 덜 되었다나 뭐라나. 법적인 절차가 꽤 까다로운 모양이던데? 기다려서 같이 올까도 생각해 봤지만, 난 네가 너무너무 보고 싶어서 일찌감치 먼저 와 버렸지.”
아네트의 코끝을 장난스레 톡 건드린 클레어가 잘난 체를 했다. 어깨를 으쓱한 그녀가 ‘이래서 문관들이란.’ 하고 혀를 찼다. 사소한 것들은 빨리빨리 치워 버릴 것이지, 뭐 그리 절차와 과정들이 복잡한지 원. 뼛속부터 무관인 그녀는 이해할 수 없는 번거로움이었다.
클레어의 가문인 루시드 가는 샤펠 제국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무골 명문가였다. 덕분에 클레어도 어릴 적부터 맹렬한 기사 훈련을 받아왔고, 지금은 어엿한 제국의 기사단 중 하나를 이끌고 있었다.
반면 아네트의 오라비인 아르옌은 몸 쓰는 것과 거리가 멀었다. 대신 특출난 머리를 타고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수재로 명성이 자자했던 그는 지금은 무려 샤펠 대제국의 총리대신을 맡고 있었다. 제국의 무수한 법안과 정치적 사안, 민감한 안건들이 전부 아르옌의 손을 거쳐 지나갔다. 그야말로 왕국 출신이라곤 믿을 수 없을 만큼 대단한 출세였다.
물론 아르옌이 그 자리에 오르기까진 정말로 많은 일이 있었다. 제아무리 제국의 아카데미에서 오랜 수학을 거쳤다지만, 아르옌은 외국인인 데다 나이도 젊었다. 원래라면 그가 세기의 천재라 한들 그토록 높은 자리까지 오를 수 없었으리라. 하지만 그 과정에서 클레어가 큰 역할을 해주었다. 정확하겐 그녀의 가문이.
‘클레어가 새언니라서 정말 다행이야. 오라버니에게도, 나에게도.’
아네트는 방긋이 웃으며 제 오라비의 출세를 팍팍 밀어준 클레어를 존경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클레어의 부친 또한 호쾌한 성격으로, 샤펠의 황제와 어릴 적부터 검술을 같이 배운 막역한 사이였다. 이 때문에 비록 무관일지라도 정치계에선 입김이 꽤 센 편이었다.
처음엔 아르옌이 비리비리해서 사윗감으로 눈에 차지 않는다던 장인은 어느새 그의 천재성에 매료되었다. 그리고 누가 감히 내 사위를 차별하냐며 팔을 걷어붙이고, 아르옌의 뒤를 밀어주었다. 한 마디로 그 딸에 그 아버지인 셈이었다.
비록 피가 섞이진 않았어도, 클레어는 정말로 아네트의 가족이었다. 그녀가 아니었다면 이반의 함정에 빠져 누명을 썼을 때, 너무 억울해서 나쁜 생각을 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전적으로 자신을 믿고, 자기 일처럼 화내 준 클레어 덕에 용기를 얻을 수 있었다.
라펠의 손을 놓고 한 걸음 다가간 아네트는 그녀를 꼬옥 끌어안았다. 훈련으로 잘 단련된 클레어의 탄탄한 몸에서 따뜻한 체온이 전해졌다. 그 어깨에 이마를 기댄 아네트가 진심을 담아 속삭였다.
“클레어 언니, 와주셔서 고마워요. 정말로요.”
“얘도 참. 여전히 푸딩처럼 물렁하다니까.”
클레어가 쑥스러운 듯 핀잔을 주면서도 아네트를 마주 안아 주었다. 무골가에서 자란 클레어는 늘 우락부락한 형제들 사이에서 주먹질을 하며 커 왔다. 그래서 상냥한 아네트가 말 그대로 별세계의 생물처럼 느껴졌다.
세상에 뭐 이렇게 순하고 예쁜 게 다 있담. 아르옌과의 결혼에서 클레어가 얻은 가장 큰 이득은 다름 아닌 아네트였다. 자연히 아네트를 끌어안은 클레어의 팔에는 진한 애정이 담겨 있었다. 아쉬운 포옹을 푼 아네트가 생긋이 웃으며 클레어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그녀의 손을 다정하게 잡아끌었다.
“이리 오세요, 언니. 카네시스 저택을 구경시켜 드릴게요.”
“그거 좋지. 하지만 저택보다 먼저 보고 싶은 게 있거든?”
제자리에 우뚝 멈춰 선 클레어가 뒤를 휙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몇 걸음 떨어진 뒤에서 어슬렁어슬렁 두 여자를 따라오던 라펠이 있었다. 그는 혹 아네트가 자신을 돌아봐 주진 않을까, 싶어서 귀를 쫑긋 세우고 있던 참이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를 돌아본 장본인이 하필 클레어였다.
한편, 아네트는 불안한 눈빛으로 클레어를 바라보았다. 어쩐지 클레어의 입에서 나올 다음 말이 뭔지 안 봐도 알 것 같았다.
“연무장! 그곳부터 가자, 지금 당장!!”
아니나 다를까. 허리에 손을 얹은 클레어가 제국의 기사단장다운 씩씩한 태도로 선언했다. 그 말을 들은 아네트가 난처한 미소를 지으며 살그머니 라펠을 돌아보았다. 연무장을 구경시켜 주는 거야 그리 어렵지 않았지만, 본디 시식 후엔 구매가 뒤따르는 법.
아네트는 연무장을 한 바퀴 둘러본 클레어가 다음으로 무엇을 원할지 깨달았다. 아마도 라펠은 곧 땀을 뻘뻘 흘리며 뛰게 될 것이다. 손에는 대련용 검을 들고 말이다. 호승심 넘치는 클레어가 모처럼 라펠 같은 인재를 마주하고도 가만있을 리 없었다.
‘음, 이거 큰일이네.’
둘의 성격을 잘 아는 아네트의 얼굴이 걱정으로 흐려졌다. 부디 이 살벌한 만남에서 누구 한 명이 피를 보지 않길 바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