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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화





















‘둘이 대체 왜 저러는 거지……?’



한편, 아네트는 의아했다. 눈빛을 주고받는 남편과 셀레스틴 사이의 분위기가 급격히 험악해지고 있었다. 둘 다 자존심이 보통이 아닌지라, 서로를 쏘아보는 눈에 불똥마저 튀는 듯했다. 이를 눈치챈 아네트가 잽싸게 중간에서 상황 정리를 시도했다.



“라펠, 전 괜찮아요. 그냥 가벼운 감기일 뿐인걸요. 그것보다 지금 중요한 손님과 대화 중이니까 이따 얘기해요.”



아네트가 부드럽게 라펠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만류했다. 그러자 셀레스틴을 돌아보는 라펠의 눈이 미묘하게 찌푸려졌다. 저딴 게 ‘중요한’ 손님이라고?



셀레스틴은 비밀리에 아네트를 찾아오느라 매우 소박한 모습이었다. 덕분에 겉보기엔 꼭 몰락 귀족처럼 생겼다. 뭐, 사실 몰락 귀족이 맞긴 했지만. 어쨌든 셀레스틴에 대한 라펠의 평가는 몹시 박했다. 마음 같아선 당장에라도 내쫓고 싶을 따름이었다.



그러나 아네트가 그녀를 직접 ‘손님’이라고 지칭한 이상, 안주인의 체면을 세워줄 필요는 있었다. 라펠은 아네트와의 관계에서 꽤 많은 것들을 배우고 있었다. 특히 대인 관계적인 측면에서 그러했다. 태연하게 자세를 바로잡은 라펠이 언제 그랬냐는 듯 뻔뻔하게 인사를 건넸다.



“이거 실례했습니다. 라펠 카네시스라고 합니다. 딱히 방문 소식을 들은 바가 없어, 손님의 존재를 미처 몰랐군요. 레이디께서 부디 너그러운 마음으로 양해해 주시길.”



갑작스러운 라펠의 태세변환에 아네트가 놀란 눈을 했다. 그가 웬일이지? 나가달란 말에 불퉁한 표정으로 버티지나 않으면 다행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토끼 같은 눈으로 라펠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아네트는 미처 몰랐다. 그가 예의 바른 태도와는 달리, 면전으론 쌍욕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아네트와 달리, 라펠을 정면으로 마주 보고 있던 셀레스틴은 기가 찼다.



‘허 참. 어이가 없어서.’



셀레스틴이 보기에 라펠 카네시스에게서 정중한 거라곤 오직 주둥이뿐이었다. 그는 사나운 눈초리로 자신을 훑어보며 썩 꺼지라는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 주제에 아네트의 앞이라고 가증을 떠는 꼴이 같잖았다.



셀레스틴은 내심 오기가 생겼다. 마음 같아선 아예 보란 듯 눌러앉아 라펠의 신경을 긁고 싶었다. 하지만 아네트가 아프단 말이 마음에 걸렸다. 아무래도 자신이 방문한 타이밍이 썩 좋지 않은 모양이었다. 방문 예절을 멋대로 건너뛴 셀레스틴은 양심이 좀 많이 찔려 헛기침을 했다.



“그, 음. 레이디 아네트. 몸이 많이 불편한가요?”



“아니에요. 그저 감기일 뿐이랍니다. 괜히 귀한 손님에게 옮기는 건 아닐까 싶어 걱정스럽네요.”



아네트가 말갛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 얼굴을 본 셀레스틴은 한층 더 죄책감을 느꼈다. 지금 보니 아네트는 숨도 가빴고, 새하얬던 뺨도 불그레해서 몸이 불편한 게 틀림없었다. 이런 모습을 보고도 뻔뻔하게 계속 버틸 순 없었다. 자신의 패배를 시인한 셀레스틴이 마지못해 몸을 일으켰다.



“아무래도 다음 대화를 기약해야겠네요. 오늘 갑자기 찾아와서 미안했어요. 제가 아까 하려던 ‘그’ 얘기는…… 조금 더 확실해지면 알려줄게요.”



“아, 저런.”



아네트의 눈빛이 아쉬움으로 흐려졌다. 대체 셀레스틴이 뭘 알고 있는지, 그녀가 짐작하는 ‘진짜 범인’은 누구인지 궁금했다. 하지만 그녀의 말마따나 이 상황에서 꺼낼 만한 얘기는 아니었다. 아네트는 미련 가득한 눈으로 셀레스틴을 보내줄 수밖에 없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셀레스틴은 배웅을 극구 사양하고 휙 나가 버렸다. 이제 응접실에 남은 건 라펠과 아네트, 단 둘뿐이었다. 나지막이 한숨을 내쉰 라펠이 그녀의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를 끌어당겨 자신의 어깨에 기대게 했다.



“당신 열 나. 약은 먹었어?”



“네. 아까 유칼리가 지어 줬어요.”



“유칼리? 그게 누구…… 아. 새로 들였다는 주치의인가? 그 음침한 여자?”



라펠다운 소감이었다. 아네트는 어이가 없었지만, 목이 깔깔해서 말을 하는 것도 힘들었다. 확실히 셀레스틴을 보내고 나자, 긴장이 풀려서 그런지 몸이 더 아팠다. 열 때문에 눈앞이 어질어질하고, 목구멍 안쪽이 홧홧하게 타는 느낌이었다.



머리를 기댄 아네트의 몸이 축 늘어지자, 라펠이 혀를 차며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번쩍 안아 들었다.



“하여튼 약하기는. 누가 보면 유리로 된 몸인 줄 알겠군.”



“이렇게 될 때까지 안은 사람이 누군데요.”



아네트는 이번만큼은 지지 않고 대꾸했다. 제멋대로 잘해줬다, 등 돌렸다 하는 라펠의 변덕에 놀아나고 싶지 않았다. 예상치 못한 반박에 라펠이 할 말을 잃고 눈썹을 찌푸렸다. 언뜻 보면 화난 것 같은 표정이었지만, 아네트는 알 수 있었다. 그는 지금 머쓱해서 저러는 것이었다.



사실 아네트가 감기몸살에 걸린 건 발코니에서 낮잠을 잔 탓이 컸지만, 라펠이 그걸 알 리가 없었다. 그의 심각한 표정에선 일종의 책임감마저 느껴졌다. 화난 듯한 얼굴로 손수 아네트를 침대까지 안아다 준 라펠이 머뭇거렸다. 언제나 거침없고 성격 급한 라펠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꼼지락거리며 이불을 덮던 아네트는 의아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라펠이 또 무슨 말을 하려고 저러나, 궁금했다. 아네트와 눈이 마주친 순간, 슬그머니 고개를 돌린 라펠이 툭 내뱉었다.



“미안해.”



“……네?”



뜻밖의 사과에 놀란 아네트가 반사적으로 되물었다. 라펠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묵묵히 그녀의 이불을 마저 덮어주었다. 무뚝뚝한 그의 옆얼굴에는 쑥스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드러난 발끝까지 신경 써서 이불을 덮어주는 라펠의 손길이 무척 세심했다. 이를 본 아네트는 속으로 넘겨짚었다.



‘아아, 내가 아픈 이유를 자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나 봐.’



어쨌든 ‘그’ 라펠의 입에서 사과가 나온 것 자체로도 굉장한 일이었다. 고집이 센 라펠은 남에게 사과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그는 아군과 적의 경계가 지나치게 뚜렷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한번 다툰 사람은 ‘적’으로 인식되기 때문에, 구태여 사과를 할 필요가 없었다. 그게 라펠의 이분법적인 사고방식이었다.



그런데 그런 라펠이, 나에게 사과를 다 하다니. 아네트는 마치 눈앞에서 천지가 개벽하는 기적을 본 것 같아 감개무량해졌다. 자연히 그녀의 목소리가 부드러워졌다.



“이건 그냥…… 환절기라 그래요. 계절이 바뀔 때마다 한 번씩 이러더라고요. 당신 탓이 아니니 신경 쓰지 말아요.”



아네트의 다정한 말에 라펠의 표정이 한층 더 딱딱해졌다. 그런 의미로 한 말이 아니었다. 철없던 어린 시절 이후, 타인에게 딱히 사과해 본 기억이 없는 라펠은 망설였다. 자존심이 상하고 어색해서 당장이라도 이 상황을 얼버무린 후 도망치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해 버리면, 지금까지와 다를 게 없었다. 두 주먹을 불끈 쥔 라펠이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내 말은, 그게 아니라… 저번에 내가 했던 말 말야. 난 당신을 그러니까, 어떻게 생각하냐면…….”



“마님, 약을 더 달여 왔습니다. 들어가도 될까요?”



그러나 불행히도 라펠은 끝까지 말할 수 없었다. 아네트를 안고 들어오느라, 그녀의 침실 문을 활짝 열어둔 게 실수였다. 어리둥절한 눈으로 약그릇을 든 채 문지방에 선 유칼리가 안쪽을 바라보다 흠칫 놀랐다. 일단 문이 열려있어서 아네트를 부르긴 했는데, 설마 그 안에 라펠도 있을 줄 몰랐다는 표정이었다.



“라펠? 하려던 말이 뭐예요?”



“됐어. 다음에 얘기해.”



이런 걸 인과응보라고 하는 걸까? 아까 셀레스틴의 말을 끊으며 난입했던 벌을 지금 받는 느낌이었다. 불퉁한 표정을 지은 라펠이 방을 휙 나가버렸다. 아네트는 고개를 갸웃했지만, 굳이 그런 라펠을 잡진 않았다.



“송구합니다, 마님. 문이 열려있길래 그만…….”



한편, 약그릇을 든 유칼리가 어쩔 줄 몰라 하며 난처한 얼굴을 했다. 아네트는 오늘따라 자꾸 중요한 대목에서 대화가 끊기는 게 아쉬웠다. 궁금한데 왜 끝까지 듣질 못하니. 그래도 이건 유칼리의 잘못이 아니었다. 아쉬운 마음을 감춘 아네트가 그녀에게 손짓했다.



“괜찮아요, 유칼리. 내가 걱정되어 약을 더 달여 준 건가요? 고마워요.”



“네, 마님. 다음번부턴 종종 기력을 보해 드리는 약을 지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딱히 아픈 곳이 없으시더라도 예방 차원에서 드셔 주세요.”



“물론이죠.”



아네트는 유칼리가 내민 약그릇을 받아 쭉 들이켰다. 전생과 다를 바 없이 그녀의 약은 씁쓸했다. 그래서인지 확실히 건강해지는 맛이긴 했다. 아네트는 부디 이번 생에는 아프지 않고 오래오래 살 수 있길 기원했다.



확실히 유칼리 카윤은 전생과 마찬가지로 유능한 의원이었다. 며칠 사이에 감기를 훌훌 털고 일어난 아네트는 모처럼 몸이 개운했다. 그래서인지 도자기처럼 새하얬던 얼굴에도 생기가 맴돌았다. 덕분에 최상의 컨디션으로 손님을 맞이할 수 있게 되었다.



이번엔 뜻밖의 손님이 아닌, 진즉부터 예정된 손님이었다. 그것도 무려 샤펠 제국에서 온 귀하디귀한 손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