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왜 부족할 것이 없는 아네트가 굳이 견제대상도 안 되는 자신을 납치했을까? 그것도 하필이면 자신의 개인 마부를 시켜서. 뭔가 앞뒤가 안 맞는 전개였다. 바이에른 가의 공녀쯤 되면 얼마든지 연고 없는 용병들을 고용해, 더 철저하게 일을 꾸밀 수 있었을 텐데.
‘확실히 뭔가가 이상해.’
셀레스틴은 처음엔 신전에 잠입한 아네트의 말을 믿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을 또 괴롭히나 싶어서 화가 치밀었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머리를 식히고 난 뒤, 아네트가 했던 말들을 되새겨 보니 일리가 있었다. 그녀는 틈만 나면 아네트의 발언들을 곱씹고 있는 자기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셀레스틴은 깨달았다. 자신이 이미 반쯤은 아네트에게 넘어갔다는 사실을.
‘정말로 아네트가 범인이 아닐지도 몰라.’
사실 그편이 오히려 앞뒤 상황은 더 잘 맞아떨어졌다. 셀레스틴은 그 순간, 자신과 아네트를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조종하는 누군가의 그림자를 얼핏 본 것만 같았다. 이 사건으로 그가 대체 무슨 이득을 얻었는진 모르겠지만, 그 덕에 두 여자의 인생은 어그러졌다.
긍지 높은 셀레스틴은 자신의 미래가 누군가의 뜻대로 좌지우지되었단 사실에 화가 치밀었다. 물론 자신이 이런 감정을 느끼는 게 모순일 수도 있었다. 만약 아네트가 함정에 걸리지 않았다면, 자신은 죽었다 깨어나도 왕세자의 약혼녀가 되진 못했을 테니까.
맞은편의 아네트를 흘끗 곁눈질한 셀레스틴이 속으로 생각했다.
‘저런 여자를 어떻게 이기겠어?’
처음 아네트를 보았을 때 느꼈던 충격이 떠올랐다. 셀레스틴은 세상에 뭐 저런 여자가 존재할 수 있는지 의문이었다. 아네트 바이에른은 마치 ‘완벽한 레이디’라는 교양 필수 서적의 표본 같았다. 예쁘고, 우아하고, 영리하고, 심지어 가문까지 좋았다. 미안한 말이지만 인간미가 안 느껴질 지경이었다.
경쟁도 상대를 봐 가며 하는 거지. 셀레스틴은 자신의 주제를 잘 알았다. 안 그래도 불리한 입장인데, 루드비히 왕세자마저 노골적으로 아네트의 뒤만 쫓았다. 한 마디로 가능성은 한없이 제로에 수렴했다.
그래서 셀레스틴은 일찌감치 왕세자비에 대한 꿈을 접었다. 다만 모처럼 후보에 적을 올린 만큼, 이름값이나 쌓아 뒀다가 나중에 시집갈 때 써먹을 작정이었다. 아네트의 경쟁자치곤 대단히 현실적인 목표가 아닐 수 없었다.
‘그랬던 아네트가, 지금은 카네시스 후작 부인이라니.’
셀레스틴은 어쩐지 마음이 불편했다. 후작 부인, 물론 나쁘진 않았다. 하지만 바이에른 공작가 출신인 아네트에겐 사실 좀 격이 떨어지는 혼처였다. 왕의 사생아인 라펠에 대해 떠도는 악소문들을 고려해 보면 더더욱 그러했다.
셀레스틴은 진범이 아네트라고 생각했을 땐 이 또한 자업자득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조차도 자신처럼 희생자에 불과하다고 생각하자, 새삼 발밑이 붕 뜨는 느낌이었다. 자신은 응당 아네트가 차지해야 마땅할 자리에 잘못 서 있었다. 마치 줄을 잘못 선 촌뜨기가 된 기분이었다. 그래서인지 셀레스틴은 저도 모르게 뜬금없는 질문 하나를 던졌다.
“그, 레이디 아네트. 당신은 지금…… 좀 어때요? 행복한가요?”
“네?”
“흠흠, 부군 되시는 분 말이에요. 당신에게 잘 해 주나요?”
갑작스러운 질문에 눈물을 닦던 아네트의 눈이 동그래졌다. 약간 커진 눈으로 셀레스틴을 바라보던 아네트가 이윽고 사르르 웃으며 대꾸했다.
“네. 타고난 성정이 좀 무뚝뚝하긴 하지만, 좋은 사람이에요. 저에게도 잘 해 주고요.”
거짓말. 눈을 피하는 아네트를 본 순간, 셀레스틴은 생각했다. 언제나 속을 알 수 없었던 아네트의 진심을 이제야 좀 알 것 같았다. 그녀는 바이에른 출신답게 거짓말을 잘했다. 하지만 남에게 해가 되는 거짓말을 하진 않았다. 지금 아무렇지 않은 척 웃는 것도 아마 남편의 흠을 덮어주기 위함이리라.
긴장이 풀린 셀레스틴은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지금까지 과분한 왕관을 쓰고 주위를 경계하느라 잔뜩 힘이 들어가 있었다. 하지만 아네트의 앞에서 서로 진솔한 얘기들을 주고받고 나니, 어쩐지 몸이 좀 이완되는 느낌이었다. 자신의 손가락에 낀 약혼반지를 만지작거리던 셀레스틴이 슬쩍 물었다.
“그날 보여준 성력 말이에요. 진짜였어요? 솔직히 말해줘요.”
“미안해요. 눈속임이었어요. 그렇게 해서라도 당신과 꼭 대화를 하고 싶었거든요.”
아네트가 멋쩍게 웃으며 사실대로 고백했다. 원래대로라면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에 분노해야 했지만, 셀레스틴은 오히려 안도했다. 역시 신은 공평했다. 저런 여자가 심지어 성력까지 쓸 줄 안다면 밸런스가 너무 안 맞았다. 줄곧 궁금했던 답을 얻은 셀레스틴이 다시 본론으로 돌아왔다.
“그, 당신도 아니고. 나도 아니라면 진범은 따로 있단 얘기잖아요. 그게 대체 누굴까요?”
“글쎄요. 저도 여러 후보를 고려해 봤지만… … 도무지 짚이는 구석이 없네요. 아직까지는요. 그래서 제 마부를 도와 제게 불리한 증언을 했었던 왕궁 시종들도 찾아봤었어요. 하지만 이미 산 사람이 아닌 것 같더군요. 처음부터 그럴 작정으로 일부러 연고 없는 시종들만 골라 써먹은 것 같아요.”
아네트는 생각에 잠겨 대꾸했다. 누군진 몰라도 제법 뒤처리가 치밀했다. 아네트는 이 사건의 진범이 셀레스틴일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모든 가정이 결국 무위로 돌아가 버렸다.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려면 처음부터 또다시 시작해야 했다. 아네트의 눈썹이 자연히 아래로 축 처졌다.
이때, 셀레스틴이 아주 신중하게 입을 열었다.
“저, 사실 짚이는 구석이 하나 있어요. 아직은 섣불리 말을 꺼내기 조심스럽지만…….”
“그게 뭔가요? 혹 짐작 가는 사람이라도 있나요?”
아네트가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자 셀레스틴이 선뜻 말을 잇지 못하고 입술만 달싹였다. 아직 완전히 입 밖으로 꺼내기엔 확신이 없었던 까닭이었다. 그만큼 엄청난 일이기도 했고 말이다.
아네트는 대체 셀레스틴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궁금했다. 어쩌면 그녀가 진짜 배후를 알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가슴이 떨렸다. 하지만 재촉한다고 될 일은 아니었다. 아네트는 그녀가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도록 인내심 있게 기다렸다. 그러자 셀레스틴의 초록색 눈동자에 약간의 이채가 스쳐 지나갔다. 자신을 재촉하지 않는 아네트의 배려에 오히려 마음이 움직인 듯했다.
드디어 결심을 굳힌 셀레스틴이 입을 막 열려던 찰나였다. 갑자기 응접실의 문이 벌컥 열리며 누군가가 들이닥쳤다.
“당신, 감기 기운이 있다며? 사실이야?”
남자다운 눈썹을 잔뜩 찌푸린 라펠이 방안으로 성큼 걸어들어왔다. 그는 언제 서먹했냐는 듯, 곧바로 아네트에게 다가와 큼지막한 손을 뻗어 그녀의 이마를 짚었다. 이상하게도 그는 유독 아네트의 건강에 신경 쓰는 경향이 있었다. 언제나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못된 성질머리조차도 그녀의 병 앞에선 한 수 접어주곤 했다.
아네트가 만류할 새도 없이, 그녀의 상태를 꼼꼼히 살피던 라펠이 혀를 찼다.
“열이 있잖아. 눈가도 빨갛고. 어제 무리해서 그런 거 아냐? 몸이 아픈데 침대에 누워 있지 않고 뭐 하는…….”
무심코 허리를 펴던 라펠이 드디어 맞은편 소파에 앉아 있는 셀레스틴을 발견했다. 그녀가 일개 하녀 나부랭이인 줄 알았던 라펠이 흠칫하며 입을 다물었다. 예상치 못한 손님의 존재에 당황한 건 사실이었지만, 그렇다고 라펠의 안하무인이 어디 가진 않았다. 그는 곧 평정심을 되찾고 뻔뻔하게 생각했다.
‘어차피 내 집인데 뭘.’
라펠은 심지어 자신의 이복동생의 약혼녀인 셀레스틴조차 못 알아봤다. 워낙에 사교계랑 거리가 멀고, 루드비히와는 더더욱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었다. 자연히 라펠이 기억하는 건 고작 셀레스틴의 이름 정도가 다였다.
라펠은 이 카네시스 저택의 주인이었고, 모든 방문객에 대한 보고를 받곤 했다. 하지만 오늘은 딱히 손님이 온다는 전갈을 받은 기억이 없었다. 고로 저 여자는 아마 정식 방문이 아니라, 일종의 불청객에 가까울 터였다.
경계심을 느낀 라펠의 눈빛이 뾰족해졌다. 딱히 불청객을 존중할 필요성을 못 느낀 라펠은 한쪽 눈썹을 치켜 올리며 인사치레만 했다.
“아, 손님이 계셨군. 실례.”
대놓고 무례하게 나오는 라펠의 태도에 셀레스틴의 눈꼬리도 같이 올라갔다. 뭐 이런 남자가 다 있담?
셀레스틴은 첫눈에 라펠이 마음에 안 들었다. 그는 흑표범처럼 관능적인 미남인 데다, 몸까지 좋았다. 그리고 스스로도 자기가 잘난 수컷임을 아주 잘 아는 표정이었다. 한 마디로 섹시하고 재수 없는 유형이었다.
저런 남자는 눈으로 보기엔 좋았지만, 살을 맞대고 살기엔 나빴다. 한 마디로 예쁜 독초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저런 남자와 결혼한 아네트가 얼마나 맘고생을 할지 안 봐도 알 것 같았다.
‘이러니 아네트의 표정이 썩어 있었던 거겠지.’
셀레스틴은 남편이 잘 해주냐는 질문에 얼버무리던 아네트의 미소를 떠올렸다. 손님이 있는데도 불쑥불쑥 들어와 뻔뻔하게 주저앉는 저 꼴이라니! 하물며 단둘이 있을 땐 얼마나 안하무인으로 굴겠는가? 눈으로 욕하는 셀레스틴의 표정을 본 라펠이 못마땅한 얼굴을 했다.
‘저건 뭐 하는 여자길래 내 집에서 저러고 있어?’
안 그래도 몸이 약한 아네트인데, 열이 있는 상태에서 손님 접대를 하다니. 라펠은 괜히 셀레스틴의 존재 자체가 못마땅해졌다. 지금도 열 때문에 아네트의 뺨과 눈가에 미약한 홍조가 돌고 있었다. 근데 마주 앉아서 대화를 하면서도 저걸 못 봤나? 하여튼 눈치 없는 여자였다.
라펠과 셀레스틴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히며 불똥이 확 튀었다. 하필이면 아네트를 사이에 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