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좀 부끄러운 말이지만, 레이디 셀레스틴. 난 당신이 이 모든 일의 배후인 줄 알았죠. 이 일로 인해 가장 득을 본 건 당신이었으니까요. 안 그래요? 하지만 그 일 이후…… 다시 마주한 당신의 모습에서 전 깨달았죠. 제가 잘못 짚었다는 사실을.”
아네트는 최대한 진솔하게 자신의 입장을 설명했다. 셀레스틴이 이를 납득하고 마음을 열어주길 바라면서.
“나는 당신과 함께 진짜 범인을 찾고 싶어요. 누가 내 등을 떠밀어 함정에 빠뜨렸는지, 그리고 당신에게 지워지지 않을 끔찍한 악몽을 남겼는지 확인하고 싶은걸요. 그러려면 당신 도움이 반드시 필요해요. 그러니 날 믿어 줄 순 없을까요?”
아네트가 할 수 있는 설득은 여기까지였다. 셀레스틴은 경계심이 담긴 초록색 눈으로 아네트를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아네트의 얼굴에서 혹 거짓말하는 기색은 없는지, 뭔가 숨기는 건 없는지 탐색하는 듯한 눈이었다.
아네트는 과연 그녀가 자신의 얼굴에서 무엇을 보았는지 궁금했다. 그나마 말하는 내내 셀레스틴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마주하는 것만이 최선이었다. 만약 머리가 좀 더 맑았다면, 지금보다 훨씬 설득력 있게 말할 수 있었을 텐데.
아네트는 아쉬워하면서 셀레스틴의 다음 반응을 기다렸다. 한참을 침묵하던 셀레스틴이 무거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맨 처음 내가 왕세자비 후보로 발탁되었을 때, 부모님께선 아주 기뻐하셨죠. 어차피 진짜는 당신이고, 난 그저 구색 맞추기용 후보에 불과했는데도 말이에요. 그 고명한 바이에른 가의 공녀와 나란히 발탁된 것만으로도 대단한 거라고 하셨어요. 아시다시피 제 가문은 상황이 좀…… 좋지 않았으니까요.”
그랬다. 셀레스틴의 가문, 키어스 후작가는 한때 꽤 번성했었던 가문이었다. 물론 200년 전 이야기이긴 했지만 말이다.
키어스 가는 제법 큰 곡창 지대를 소유하고 있었다. 옆에 커다란 강도 흐르고 있어서, 밭에 물을 대는 일도 걱정해 본 적이 없었다. 덕분에 키어스 가문은 늘 풍요로운 쪽에 속했다. 그들은 이 번영이 영원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천재지변은 사람의 힘으로도 어쩔 수 없는 재앙이었다. 어느 날, 그들의 영토 부근에 아주 커다란 대지진이 발생했다. 덕분에 키어스 후작가의 곡창 지대에도 엄청난 인명 피해와 재산 피해가 발생했다. 모든 예산을 다 쏟아붓고도 복구가 어려울 만큼 큰 손해였다.
불행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지진으로 인한 극심한 지각 변동이 일어나, 물줄기의 방향이 바뀌어 버렸다. 덕분에 곡창 지대에 물을 대는 일이 전과는 달리 무척 힘들어졌다. 그들의 작물 생산량은 순식간에 40% 가까이 감소해 버렸다. 그때부터 키어스 가의 몰락이 차근차근 시작되었다.
덕분에 200여 년이 지난 지금은 빛 좋은 개살구가 되어버렸다. 키어스 가는 이름만 후작가일 뿐, 어지간한 백작가보다 위세가 못한 집안이었다. 모처럼 그 여식인 셀레스틴 키어스가 왕세자비로 발탁되기 전까진 말이다.
“하아.”
가족을 떠올린 셀레스틴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고작 들러리 자리일 뿐인데도 좋아하던 부모님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 누구도, 하다못해 셀레스틴 본인조차도 자신이 ‘진짜’ 왕세자비가 될 거라곤 생각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일이 이렇게 될 줄이야.
“제가 감히 이런 말 할 입장은 아니겠지만… 전 사실 왕세자 전하께 이성적인 호감은 없어요. 그분도 아마 마찬가지겠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제가 왕세자비 자리에 관심이 없단 말은 차마 못 하겠네요. 이건 정말로 큰 기회거든요. 저에게도, 그리고 저희 가문에게도요.”
잠시 숨을 돌린 셀레스틴의 시선이 자신의 왼손 약지에 낀 반지로 향했다. 커다란 다이아몬드가 중앙에 박힌 반지는 가장자리가 에메랄드, 루비와 사파이어로 자잘하게 장식된 귀물이었다. 왕가에서 받은 약혼반지가 틀림없었다. 장갑을 낀 손끝으로 다이아몬드 표면을 쓰다듬은 셀레스틴이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뒤에서 못된 계략까지 써 가면서까지 비겁하게 왕세자비가 되고 싶은 마음은 없어요. 비록 바이에른에 비하면 미약한 집안이지만, 저에게도 가문의 긍지라는 게 있답니다. 자랑스러운 키어스 가의 이름을 걸고 맹세할 수 있어요. 저는 순수한 피해자이고, 자작극 따윈 벌인 적 없다고요!!”
말을 하는 셀레스틴의 목소리가 점차 격양되었다. 아무래도 말을 하면 할수록 새삼스레 억울해진 모양이었다. 아네트는 예상 밖으로 흘러가는 대화의 방향에 조금 놀랐다.
그녀는 사실 셀레스틴이 자신을 추궁하기 위해 온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네트가 정말로 범인이 아닌지, 혹 거짓말을 한 건 아닌지 확인하기 위해서 말이다. 근데 막상 온 셀레스틴은 아네트를 추궁하는 대신,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다. 아무래도 아네트가 저번에 ‘당신의 납치 자작극인 줄 알았어요.’라고 했던 게 무척 억울했던 모양이었다.
할 말을 모두 끝마친 셀레스틴이 숨을 헐떡이며 아네트를 바라보았다. 자신의 반응을 기다리는 눈빛이었다. 그 짙은 초록색 눈동자와 마주친 아네트가 부드럽게 대꾸했다.
“그렇군요. 잘 알겠어요.”
“……무슨 소리예요? 잘 알겠다뇨?”
“말 그대로 레이디 셀레스틴을 믿는단 뜻이에요. 사실 처음부터 좀 이상하다고 생각하긴 했어요. 제가 본 당신은 그런 교활한 술책과는 거리가 먼 사람 같았거든요.”
“당신이 본 저는 어떤 사람이었는데요?”
셀레스틴이 지지 않고 말꼬리를 붙들며 아네트의 심중을 캐물었다. 그녀는 어떤 것을 믿어야 할지 혼란스러운 나머지, 공격적인 태도를 취하는 듯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이런 셀레스틴의 불안감에 동화되어 같이 적대적으로 나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상대는 무려 아네트였다. 분노 조절 장애 남편을 둔 그녀는 익숙하기까지 한 평온함으로 빙그레 웃었다.
“긍지 높은 사람이요.”
“네?”
“레이디 셀레스틴을 처음 봤을 때 생각했었죠. 아, 자기 자신에게 자부심이 있는 사람이구나, 하고요. 그러니 스스로의 가치를 떨어트리는 짓은 하지 않을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물론 절 보는 표정이 가끔은 무서울 때도 있었지만, 당신은 기본적으로 솔직한 사람이에요. 아닌가요?”
“무, 무슨 소리를…….”
셀레스틴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물론 화가 나서 그런 건 아니었다. 의도한 건진 모르겠지만, 아네트의 말은 어쩐지 칭찬처럼 들렸다. 그래서 부끄러움을 감추느라 표정이 자연히 화난 것처럼 되어버렸다. 그런 셀레스틴을 보며 미소한 아네트가 말을 이어갔다.
“그래서 사실 그 사건이 일어났을 때… 어쩌면 당신의 자작극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참 실망했었어요. 당신은 그럴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었거든요. 하지만 레이디 셀레스틴이 범인이 아니라면…… 도무지 짚이는 곳이 없었으니까요. 도대체 누가 그런 짓을 꾸몄겠어요?”
“그건…… 그렇죠. 나도 그래서 당연히 아네트, 당신의 짓이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이상하단 생각은 했었죠.”
드디어 셀레스틴이 처음으로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아네트는 눈을 크게 뜨고 그녀의 말을 경청했다. 그 시선에 쑥스러운 듯 눈을 내리깐 셀레스틴이 말을 마저 이어갔다.
“내 말은, 당신이 굳이 나에게 그럴 이유가 없었잖아요? 누가 봐도 당신이 왕세자비가 될 것이 자명했는데! 왜 굳이 경쟁력도 없는 날 제거하겠답시고 그딴 위험한 짓을 벌이겠어요? 아무리 생각해도 이득보단 손해가 훨씬 더 큰 행동인데! 당신은 그렇게 멍청한 사람이 아니잖아요?”
“어머, 그 말은…… 지금 절 믿어주시는 건가요?”
셀레스틴의 말을 듣던 아네트가 기쁜 듯 입을 가리며 웃었다. 물론 셀레스틴이 여기까지 온 것으로 보아, 자신의 결백을 어느 정도 믿을 거라곤 추측했었다. 하지만 셀레스틴이 본인 입으로 이를 시인한 건 처음이었다. 아네트의 웃는 얼굴과 마주한 순간, 셀레스틴이 얼굴을 확 붉혔다.
“착, 착각하지 말아요! 아직 당신을 완전히 신뢰하는 건 아니라고요!!”
도도하게 얼굴을 홱 돌린 셀레스틴은 속으로 아차 싶었다. 긴장이 풀려서 그런지 평소의 성격이 나와버리고 말았다. 아니나 다를까, 자신이 고함을 쳐서 그런지 아네트의 눈가에 약간의 눈물이 맺혔다.
‘설마 나 때문에 우는 거야?!’
이를 본 셀레스틴은 내심 충격을 받았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셀레스틴이 사과의 말을 막 꺼내려는 찰나였다. 속눈썹에 맺힌 눈물을 닦은 아네트가 수줍게 말했다.
“아, 미안해요. 타인이 제 결백을 믿어 준 건 처음이라……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네요. 정말 고마워요, 셀레스틴. 당신이 날 믿어 준 건 정말로 내겐 큰 의미에요.”
아네트가 붉어진 눈가를 꾹 누르며 애틋하게 웃었다. 그걸 본 순간, 셀레스틴은 심장이 꽉 죄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지금까지 자신의 고통에 파묻혀 있느라 미처 아네트의 입장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아니, 여기서 한술 더 떠 아네트가 범인일 거라고 생각하고 그녀를 증오하기까지 했었다.
아직도 눈을 감으면 납치되었던 그 날의 공포가 떠올랐다. 자신의 입을 틀어막고 손발을 묶던 낯선 남자들의 손길. 머리 위로 쏟아져 내리던 거친 숨결과 음담패설들. 일단은 손을 대지 않았지만, 그들의 변덕 여부에 따라 당장이라도 강간당할 것 같아 숨이 막혔다. 차가운 어둠 속에 몸을 웅크리고 자신이 앞으로 어떻게 될지 상상하며 덜덜 떨었다.
다행히 아무 일 없이 구출되긴 했지만, 그날의 악몽은 여전히 셀레스틴을 휘감고 놓아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자다가도 몇 번이나 소스라치며 일어나고, 머리맡의 대야에 구토를 했다. 왕세자비 대관식을 앞두고 휘황찬란한 보석과 실크에 둘러싸여 있어도 기쁘지 않았다. 자신에게 이런 트라우마를 남긴 아네트가 미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바이에른 공녀의 결혼식 봤어요? 정말로 아름다웠죠! 신랑의 출신이 좀 그렇긴 하지만… 그쯤은 괜찮아요. 카네시스 후작은 정말 근사한 남자니까요. 그래서인지 공녀도 참 행복해 보이더라고요. 굳이 왕세자비가 되지 않아도 그런 남자와 살 수 있다면 뭐, 나쁠 것 없겠죠. 역시 똑똑한 레이디라니까요!’
셀레스틴은 자신에게 들으란 듯 비아냥대는 다른 사람들의 수군거림을 들었다. 한미한 가문의 영애가 아네트를 밀어내고 왕세자비 자리를 대신 꿰찼다. 타인들의 질시 어린 눈빛을 받기엔 딱 좋은 입장이었다. 심지어 그 장본인인 셀레스틴은 딱히 사교와는 거리가 먼, 고집 센 여자였다. 그러니 다들 어떻게든 셀레스틴을 물어뜯지 못해 안달이었다.
‘저런. 미래의 왕세자비가 저토록 사람 다룰 줄을 몰라서야… 차라리 레이디 아네트가 예정대로 왕세자비가 되었더라면 훨씬 더…….’
달콤한 루즈를 바른 입술들은 지독한 말만 뱉어내었다. 안 그래도 납치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셀레스틴은 이제 대인기피증까지 왔다. 집을 나서면 세상은 온통 적, 적, 적뿐이었다. 심지어 절친이었던 다이애나 맥클레어마저 넌지시 자신의 신분 상승을 질시해왔다.
그러니 셀레스틴이 도망칠 곳은 오직 신의 품밖에 없었다. 그곳만이 지친 마음을 기대고, 안전하다고 느낄 수 있는 유일한 곳이었다. 물론 그 믿음마저도 며칠 전 박살이 났지만 말이다.
그래서 셀레스틴은 아네트를 찾아왔다. 반쯤은 오기였고, 반쯤은 ‘혹시나’ 하는 마음 때문이었다. 사실 셀레스틴도 이번 납치사건에 대해 몇 가지 의문을 품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