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날이 밝았다. 아네트는 평소보다 무겁게 느껴지는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창으로 슬금슬금 기어오는 햇살이 찬란한 금빛이었다. 아무래도 정오에 가까운 시간인 모양이었다.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라펠과 관계를 가진 날이면 제때 일어나는 게 불가능했으니까.
아네트는 몸을 일으켰다. 아니, 일으키려고 했었다. 하지만 무거운 건 눈꺼풀만이 아니었다. 라펠의 건장한 팔이, 다리가 그녀를 끌어안고 단단히 옥죄고 있었다. 이마에 와 닿는 그의 턱선이 날카로우면서도 약간 까칠했다. 밤새 수염이 약간 자란 모양이었다. 라펠의 얼굴을 올려다보던 아네트의 눈빛이 문득 먹먹해졌다.
‘이 남자는 대체 왜 이러는 걸까.’
둘의 관계에서 언제나 밀어내는 쪽은 라펠이었다. 그런 주제에 정작 자신이 밀어내는 건 못 견뎌 하다니, 비겁했다. 어젯밤 자신을 집요하게 안은 것도 아마 애정 때문은 아닐 것이다. 그것보단 다만 자신의 소유물에 남이 관심을 보이는 것 같으니 경계하는 것에 가깝겠지. 이런 행동에 매번 휘둘려 주다간 마음이 다 닳아 없어질 터였다. 이대로 라펠에게 정이 더 들기 전에 하루빨리 오스란드로 떠나는 것만이 상책이었다. 그러려면 얼른 누명부터 벗고, 진범을 찾아야 했다.
아네트는 자신의 몸을 끌어안은 라펠의 팔다리를 밀어버리고 일어났다. 라펠은 설핏 미간을 찌푸리긴 했지만, 깨어나진 않았다. 사실 깨어나면 좀 어떻단 말인가? 삐딱해진 아네트는 그의 체온이 남아 있는 침대를 떠났다.
발을 바닥에 내딛는 순간, 눈앞이 이상하게 어지러웠다. 내뱉는 숨이 뜨겁고 목 안쪽이 까끌한 게 감기 기운이 있는 것 같았다. 역시 어제 발코니에서 찬 바람을 맞으며 잔 게 원인일 터였다. 물론 그 후 이어진 격렬한 관계로 몸을 혹사시킨 것도 있을 테고. 짚이는 게 너무 많아서 민망할 지경이었다.
아네트는 더듬더듬 주위 가구들을 짚으며 테이블로 향했다. 다행히 그곳 의자에 가운이 걸려 있었다. 제법 도톰한 가운으로 몸을 꽁꽁 싸맨 아네트는 아래층으로 향했다. 새로 영입한 주치의의 능력에 기댈 시간이 온 것 같았다.
그리고 역시나, 그녀의 주치의는 기억대로 유능했다.
“감기몸살입니다.”
아네트의 예상대로였다. 특히 편도선이 부은 것 같았다. 목구멍 안쪽에 작은 유리구슬이라도 머금고 있는 것처럼 목젖이 아팠다. 아네트의 열을 재 본 유칼리의 표정이 약간 어두워졌다. 생각보다 열이 꽤 있었다.
“해열제를 달여드리겠습니다. 오늘은 몸을 따뜻하게 하시고, 일찌감치 푹 주무세요. 가급적 물도 많이 드시고요.”
“고마워요, 유칼리.”
“아닙니다, 마님. 괜찮으시다면 가끔 기력을 보하는 약을 하나씩 지어 드리겠습니다. 큰 도움은 안 되겠지만 꾸준히 드시면 훨씬 튼튼해지실 겁니다.”
“그래 주면 나야 고맙죠. 잘 부탁해요.”
유칼리가 약을 지으러 나가자, 아네트는 홀로 응접실의 소파에 남겨졌다. 그녀는 눈을 감고 몸을 뒤로 기대었다. 유칼리는 일찌감치 자라고 했지만, 지금 그녀의 침실에는 라펠이 누워 있었다. 그의 곁으로 기어들어 가면 비록 몸은 따뜻하겠지만, 마음은 지금보다 더 춥겠지.
그렇다고 주인 없는 라펠의 침실에 가 누워 있는 것도 싫었다. 어디 가서 쉬어야 할까? 아네트는 고민하며 무심코 자신의 머리칼을 쓸어올리다, 이마에서 느껴지는 열기에 흠칫했다. 확실히 열이 나긴 하는 모양이었다.
똑똑―
이때, 메이드가 난처한 표정으로 다가와 아네트에게 뭔가를 속삭였다. 그녀의 말을 들은 아네트가 어리둥절한 눈으로 되물었다.
“손님이라고? 하지만 사전에 아무 소식도 못 받았는데…….”
타 귀족의 저택을 방문하기 위해선 사전에 ‘방문 요청’이란 걸 보내는 게 일반적이었다. 간략히 몇월 며칠, 몇 시쯤 어떠한 용건으로 방문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이를 본 집주인이 허락하는 답신을 보내면 방문하는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할 수 없었다. 이것이 델티움 사교계의 기본적인 방문 예절이었다.
물론 아주 가까운 사이라면 굳이 이런 절차는 필요 없었다. 하지만 아네트가 알기로, 자신에게 이런 절차를 무시해도 될 만큼 가까운 사람은 몇 없었다. 대체 누가 무례하게 이런 식으로 방문한단 말인가? 열 때문에 약간 멍한 이마를 짚은 아네트가 되물었다.
“그래서, 손님이 누구시라고?”
“그게요, 마님……. 귀족인 건 확실한데, 가문은 밝히지 않으셨습니다. 마님과 단둘이 대화를 하고 싶으시다는데, 이걸 보여드리면 아마… 반드시 승낙하실 거라고 하셨습니다.”
메이드가 내민 물건을 본 아네트의 눈이 커졌다. 그것은 어디에서나 팔 법한 평범한 장갑 한 짝이었다. 다만 좀 이상한 점이 있다면, 장갑의 손등 부분을 누가 문 것처럼 루즈 자국이 남아 있다는 것이었다.
아네트는 자신이 그 장갑을 어디서 꼈었는지 기억했다. 그리고 이 루즈 자국을 남긴 게 누구인지도.
‘셀레스틴 키어스?’
아네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녀가 여기까지 찾아왔다는 건 많은 것을 의미했다. 그녀는 아네트의 신전 무단침입을 고발하며, 증거로 이 장갑을 제출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며칠을 기다려도 셀레스틴이 자신을 고발했단 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그녀는 그 대신 은밀히 아네트를 찾아와 이것을 내밀며 대화를 요청했다. 문득 짚이는 게 있었던 아네트의 눈동자가 빛났다.
‘내 말을 들어 볼 생각이 있나 봐.’
저번에 마주쳤을 때만 해도, 셀레스틴은 자신을 극도로 경계하고 두려워했다. 그녀는 납치 피해자로서의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리고 진범이 아네트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얼굴이었다.
물론 아네트는 자신이 아니라고 해명했지만, 그게 먹힐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세상의 그 어떤 범인이 자신의 죄를 시인하겠는가? 셀레스틴이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자신을 계속 의심하는 게 당연했다. 적어도 아네트가 다른 범인에 대한 증거를 잡아내기 전까진 말이다. 하지만 아무래도 자신의 생각이 틀린 모양이었다.
아네트는 하필 오늘 자신의 몸 상태가 썩 좋지 않은 걸 안타깝게 여겼다. 하지만 집 앞까지 찾아온 셀레스틴을 이대로 돌려보낼 순 없었다. 그녀는 아마 대단히 큰 결심을 하고 온 것일 터였다. 만약 이대로 대화를 거절하면, 셀레스틴은 두 번 다신 이러한 시도를 하지 않을 터였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마음을 정한 아네트는 눈을 뜨고 메이드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혹 혼나진 않을까 싶어 안절부절못하는 얼굴로 자신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그런 메이드를 향해 빙긋이 웃은 아네트가 태연한 체 지시했다.
“몸치장을 좀 도와주겠니? 손님을 만나야겠어.”
오늘따라 코르셋이 갈비뼈를 파고드는 느낌이었다. 그래서인지 숨을 쉬는 게 갑갑해서 자꾸만 말소리에 가쁜 숨결이 섞였다. 아네트는 따뜻한 차를 한 모금 삼키며 깔깔한 목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눈앞의 상대에게 부드럽게 말을 건넸다.
“이렇게 와줄 줄은 몰랐어요. 다시 만나서 반가워요, 레이디 셀레스틴.”
셀레스틴은 말이 없었다. 그녀는 여기까지 대뜸 찾아온 기세가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긴장한 모습이었다. 아네트는 그녀의 풍성한 드레스 자락 위로 내려앉은 두 손이 긴장 때문에 파들파들 떨리는 걸 보았다. 지금 셀레스틴은 자기 자신의 공포심과 필사적으로 싸우고 있는 것 같았다.
아네트는 말없이 찻잔을 어루만지며 셀레스틴이 마음의 준비가 될 때까지 기다렸다. 자신이 해 줄 수 있는 건 이런 것뿐이었다. 그나마 따뜻한 차를 마시니까 감기몸살이 조금 누그러지는 느낌이었다. 잠시 후, 비장한 얼굴을 한 셀레스틴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최근에 이상한 꿈을 꿨어요. 당신이 나오는 꿈이었죠.”
“아…… 그랬나요?”
물론 셀레스틴이 뜻하는 건 진짜 꿈을 의미하는 게 아니었다. 그날의 신전 침입을 에둘러 표현하는 거겠지. 이를 잘 아는 아네트는 애매한 미소를 지었다. 아직 셀레스틴이 무슨 의도로 찾아왔는지 잘 몰랐기 때문에, 아네트는 경각심을 느꼈다.
‘말을 신중하게 해야겠는데. 안 그럼 내 입으로 죄를 자백하는 꼴이 될 거야.’
찔리는 게 많은 아네트는 내심 식은땀을 흘렸다. 셀레스틴이 찾아와 준 건 희소식이었지만, 아직 그녀를 온전히 믿을 순 없었다. 아네트는 최근 오데사 르이 신전에 무단침입을 한데다, 신관까지 사칭했던 자신의 행태를 떠올렸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떻게 그런 대담한 짓을 했는지 스스로도 놀라울 지경이었다. 그래서 아네트는 넌지시 돌려서 말문을 열었다.
“오늘 이렇게 절 찾아준 건, 제 결백을 믿기 때문이라고 생각해도 될까요?”
“당신의…… 결백?”
셀레스틴이 반신반의하는 눈을 들어 아네트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결백’이란 단어에 몹시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 같았다. 비록 여기까지 오긴 하지만, 아직 아네트를 확실하게 신뢰하진 않는 모양이었다. 이를 본 아네트가 한숨을 내쉬며 조곤조곤한 어조로 설명했다.
“셀레스틴. 난 정말로 당신의 납치를 사주하지 않았어요. 내 마부, 이안은…… 철저하게 신분이 위조된 상태에서 고용되었죠. 그리고 결정적일 때 당신을 납치한 후, 나에게 누명을 씌웠어요. 이 모든 게 잘 짜인 각본이라고밖에 볼 수 없어요. 분명히 누군가가 나와 당신을 음해하려고 이런 수작을 부린 걸 거예요.”
셀레스틴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네트는 내친김에 좀 더 솔직해지기로 했다. 아직 완전히 마음을 열지 않은 상대를 설득하려면 그래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