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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화





















아네트는 잠시 기다렸다. 당장이라도 라일린이 ‘저런, 눈치채셨군요.’ 하고 걸어 나올 것 같았다. 하지만 뜻밖에도 라일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자신을 방문했다가, 자고 있어서 그냥 간 모양이었다. 어느 쪽이든 불법 침입인 건 마찬가지였으나 당사자가 없어 추궁도 못 했다.



아네트는 난감하게 코트를 내려다보았다. 비싼 물건 같으니, 세탁하여 보관했다가 돌려주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라일린과의 거래도 어느덧 익숙해져 가고 있었다. 그는 상상 밖으로 훨씬 유능했고, 믿을 만한 파트너였다. 그래서 아네트는 차라리 솔직하게 자신의 누명 건에 대해 털어놓고, 도움을 청할까도 고민해 보았다. 효율상으론 그편이 더 좋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아냐, 조급해해선 안 돼. 조금만 더 신중하게 생각해 보고.’



눈을 감고 마음을 가라앉힌 아네트는 방으로 들어왔다. 따뜻한 숄을 걸치니 훨씬 마음이 편안해졌다. 저녁을 먹기엔 늦은 시간이었지만, 상당히 출출한 기분이 들었다. 아무래도 발코니에서 너무 오래 있었던 모양이었다.



아네트는 간단하게 요기라도 할 생각으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그러나 타이밍이 썩 좋지 못했다. 현관 부근에서 때마침 귀가한 라펠과 마주쳤기 때문이었다. 그와 나눈 마지막 대화를 떠올린 아네트는 가슴이 답답해졌다.



‘당신도 날… 조금쯤은 좋아하나요?’



라펠은 끝내 그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 순간 맛봤던 외로움은 지독하리만큼 써서, 아직도 뒷맛이 남아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아네트는 그녀답지 않게 라펠을 외면하고 그 옆을 지나쳤다. 자신의 옆얼굴에 와 닿는 그의 눈빛이, 숨결이 느껴졌다.



‘술 냄새가 나네.’



보아하니 라펠은 어디서 또 술을 마시고 온 모양이었다. 그는 전생엔 거의 알콜 중독에 가까울 만큼 매일같이 술을 마셨다. 그러지 않으면 잠을 이룰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번 생은 아네트가 능력으로 그를 잠재워 주었기 때문에 술을 거의 마시지 않았다. 단, 오늘 같은 날은 빼고 말이다.



아네트는 모른 척하며 라펠의 곁을 지나쳤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하지만 손을 뻗은 그가 아네트의 팔을 움켜쥐고 바짝 끌어당겼다. 그녀를 내려다보는 라펠의 서늘한 눈매가 문득 분노를 머금고 가늘게 좁혀졌다.



“당신에게서 딴 놈의 냄새가 나는군.”



팔목을 붙들린 아네트가 그를 돌아보았다. 성큼 다가온 라펠이 그녀의 양어깨를 붙잡고 고개를 숙였다. 그는 반듯한 콧대로 아네트의 머리칼과 귀 뒤, 목덜미, 쇄골을 오가며 낯선 냄새를 맡았다. 그의 뜨거운 숨결에서 진한 위스키 냄새가 났다.



아네트는 반사적으로 몸을 약간 뺐다. 심리적으로 거리가 멀어진 만큼, 그와 가까이 있는 게 부담스러웠다. 그러나 라펠의 손아귀에 단단히 붙들려 있어서 멀리 떨어질 순 없었다. 그녀의 귓가를 훑고, 뺨을 지난 손이 턱을 움켜쥐고 들어 올렸다. 고개를 숙여 아네트와 눈을 맞춘 라펠이 늑대처럼 새파란 눈으로 캐물었다.



“누구지? 누가 당신에게 손을 댄 건가? 응?”



“그런 사람 없었어요, 라펠. 이 손 놔 줘요.”



아네트가 차분하게 대꾸했다. 처음엔 라펠이 술에 취해 생트집을 잡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의 머릿속에 곧 스쳐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발코니에서 낮잠을 잘 때 라일린이 덮어주고 간 코트. 그곳에 배어 있던 짙은 향수 냄새. 아마도 잠든 동안, 그 코트에서 향수 냄새가 자신에게 옮아온 게 틀림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라펠에게 사실대로 말할 순 없었다. 라일린의 존재도, 세크리트 길드도 전부 비밀이었으니까. 아네트는 자신의 어깨를 움켜쥔 라펠의 손을 조심스레 잡았다. 그리고 최대한 그를 자극하지 않으려고 애쓰며 답변했다.



“오늘 새 향수를 사려고 몇 가지 시향해 봤었는데, 그때 향이 옮았나 봐요. 당신 말고 누가 저에게 손을 댈 수 있겠어요? 애초에 전 오늘 저택 밖으로 나가지도 않았는걸요. 그러니 이 손 좀 놔 줘요, 라펠. 정말 아파서 그래요.”



다른 건 몰라도 라펠은 늘 그녀의 ‘아프다’는 말에 약했다. 이번에도 아네트의 입에서 그 말이 나오자, 반사적으로 라펠의 손힘이 탁 풀렸다. 아네트는 그 틈을 타 라펠의 손에서 스르르 빠져나갔다. 재빨리 안전거리를 확보한 아네트가 등 너머로 고개를 돌려 짧게 인사했다.



“취한 것 같은데 이만 올라가서 쉬어요. 잘 자요, 라펠.”



이걸로 된 거였다. 아네트는 그가 자신을 도로 붙잡기 전, 얼른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세 걸음도 걷기 전에 등 뒤에서 불쑥 튀어나온 손이 그녀를 끌어당겼다. 아네트는 순식간에 그의 품 안으로 파묻히다시피 뒤로 안겼다.



“라펠?”



“거짓말쟁이. 당신은 늘 내게 거짓말만 하지.”



대답 대신 머리 위쪽에서 낮은 타박이 들려왔다. 아네트는 그를 돌아보려 했으나, 품에 너무 바짝 안겨 있어서 그럴 수 없었다. 가까스로 위를 올려다보자 그의 턱이 시야에 들어왔다. 날카로운 턱선 위에 자리한 붉은 입술이 남자답지 않은 퇴폐미를 풍겼다. 그 입술이 아네트의 머리 위를 꾹 내리누르고, 귓바퀴를 깨물다 이윽고 울 것처럼 일그러졌다.



“당신을 어찌하면 좋을까, 아네트.”



그의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온 뜨거운 한숨이 머리칼을 흔들고 이마를 간지럽혔다. 어쩐지 그 목소리가 슬퍼 보였지만, 아마도 기분 탓일 것이다. 아네트는 가만히 눈을 내리떴다가, 이윽고 그를 향해 웃었다. 마치 사교장에서 하듯 우아하게, 그리고 공허하게.



“갑자기 왜 이러는 거예요, 라펠? 어차피 당신은 날 좋아하지도 않잖아요. 그러니 우리 그냥 이렇게 살아요. 당신은 당신대로, 나는 나대로 서로 의무만 다하는 그런 관계. 이게 당신이 원하는 결혼생활 아니었나요?”



아네트의 예쁜 목소리가 미운 말들만 골라 읊어댔다. 이를 묵묵히 듣던 라펠이 그녀를 조금 더 세게 끌어안았다. 그녀가 바로 자신의 품 안에 있는데도, 너무나 멀게 느껴졌다. 그 괴리감에 허탈한 듯 웃은 라펠이 고개를 숙여 그녀의 새하얀 목덜미에 입을 맞췄다. 그 입술은 분명히 어떤 의도를 품고 있었다.



“그래, 아네트. 말 한번 잘했군. 어디 서로에게 그 의무란 걸 다해 보자고.”



아네트는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숙이는 라펠의 어깨를 밀어냈다. 하지만 라펠은 그 가녀린 손목마저 낚아채고, 손을 뻗어 그녀의 턱을 움켜쥐었다. 일견 괴로워 보이기까지 하는 그의 새파란 눈동자가 아네트를 똑바로 내려다보았다. 술을 마셔서 약간 충혈된 그 눈이 뜻밖에도 정욕 대신 애절함을 품고 그녀에게 간청했다.



“제발 날 그렇게 밀어내지 마, 아네트. 당신이 그럴 때마다…… 정말로 돌아버릴 것 같으니까.”



귓가에 울리는 라펠의 목소리는 꼭 상처 입은 짐승의 울부짖음 같았다. 이를 듣는 순간, 아네트의 팔에 저절로 힘이 빠졌다. 아까부터 자꾸만 아파 보이는 라펠의 모습이 그녀의 태도를 약간 누그러트렸다.



그러자 라펠이 마치 기다렸다는 듯 그녀의 허리를 휘감고, 몸을 번쩍 들어 올려 침실로 향했다. 몸이 눕혀지기 무섭게 그의 입술이 아네트를 속박하듯 덮쳐 왔다. 도무지 뿌리칠 수 없을 만큼 다급하고 절박한 입맞춤이었다.



아네트는 그를 몇 번 밀어내려다, 결국엔 그 품 안에서 눈을 감았다. 이러고도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다니. 대체 어떻게 되먹은 남자인지 알 수가 없었다.









슈미즈가 벗겨진 몸에 차가운 밤공기가 와 닿았다. 사슴처럼 곧게 뻗은 두 다리를 벌리고 그 안쪽으로 헤쳐 들어오는 몸짓은 난폭했다. 아네트는 고운 등불 아래로 훤히 드러나는 자신의 치부가 부끄러워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라펠은 사정 봐 주지 않고 그녀의 다리 사이에 자신의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아!”



아네트의 입에서 짧은 고통의 소리가 흘러나왔다. 아직 젖지 않은 그곳이 뻑뻑하게 손가락을 깨물었다. 그러자 마음이 급해진 라펠이 손가락을 빼고 허리를 굽혔다. 예민한 그곳에 남자의 숨결이 훅 와 닿는가 싶더니, 뜨거운 입술이 클리토리스를 덮고 빨아들였다. 탄력 있는 혀끝이 클리토리스를 핥고, 입안에서 굴릴 때마다 눈앞이 번쩍번쩍했다.



“아, 흐윽! 그거, 싫어요. 하지 말아요.”



아네트가 다리를 떨며 그의 머리칼을 움켜쥐었다. 새하얀 손가락에 밤의 어둠처럼 짙은 흑발이 뒤엉켰다. 닫힌 마음과 달리, 몸은 익숙한 열락에 솔직하게 반응했다. 라펠은 꿀이 솟아 나오는 그녀의 음부를 말 그대로 짐승처럼 게걸스럽게 핥았다.



매끄러운 입술이 꽃잎 같은 음순을 문지르고, 단단한 혀가 질구를 파고들어 안쪽까지 후벼팠다. 탄력 있는 혀가 입구를 드나들 때마다 방 안에 젖은 소리가 울려 퍼졌다. 뜨거운 타액이 다리 사이를 적시고, 머리 안쪽까지 흐물거리게 만드는 듯했다.



입구가 어느 정도 젖어들자, 라펠이 손가락을 들이밀었다. 상당히 마음이 급했는지 처음부터 두 개씩 쑤셔 넣었다. 아네트는 소리 없이 숨을 헐떡이며 그곳에 느껴지는 이질감을 꾹 참았다. 질구가 너무 조여서 처음엔 집어넣는 것조차 힘들었는데, 몇 번 드나들고 나니 타액에 젖은 손가락들이 안쪽을 부드럽게 파고들었다. 그것들이 능숙하게 아네트의 약한 부분을 찾아내어 잔뜩 문질러댔다.



아네트는 순식간에 더운술이라도 마신 것처럼 몸에 열기가 확 번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본격적으로 관능에 불이 붙는 시간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