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손님이라니. 그딴 게 올 리가 없었다. 라펠은 괜히 해롤드의 장난에 놀아났다는 생각에 미간을 찌푸렸다. 영감이 노망이 났나, 저딴 헛소리를 지껄이다니.
라펠은 사람을 싫어했고, 기본적으로 인간 불신에 가까웠다. 그나마 해롤드가 거의 유일하다시피 한 라펠의 교류 대상이었다. 이런 라펠이 집이라는 개인적인 공간에 누군가를 초대할 리 만무했다. 하지만 해롤드는 그 불신 어린 눈빛 앞에서도 여유만만했다.
“내 정보망에 의하면 샤펠 제국에서 꽤 거물이 움직인다더군. 그것도 극히 개인적인 사유로 델티움에 온다지. 이를테면 휴가, 라고 할까?”
“그게 뭐 어쨌다는 거지?”
라펠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보아하니 샤펠 제국에서 누가 오는 모양인데, 그게 뭐 어쨌단 말인가? 국위 선양 같은 허례허식은 셀그라티스 왕이 알아서 할 문제였다. 라펠이 할 일이라곤 검술이나 잘 수련해서 셀그라티스가 원하는 대로 소드 마스터가 되는 것뿐이었다. 쓸데없는 소리를 들었다고 판단한 라펠이 등을 돌렸다.
“저런. 자네는 어지간히 부인에게 관심이 없는 모양이로군.”
라펠은 뒤에서 들려오는 혀 차는 소리에 발걸음을 우뚝 멈추었다. 여기서 왜 또 아네트 얘기가 나온단 말인가? 고개를 돌린 라펠이 성가신 눈빛으로 해롤드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해롤드가 씩 웃었다.
‘저 급한 성질머리에 부인 얘기가 나오니깐 굳이 기다리는 것 좀 보게나.’
저러고도 사랑이 아니라니, 원. 이쯤 되면 놀라울 지경이었다. 다 큰 줄 알았건만 라펠은 아직도 반편이 고슴도치 같은 측면이 있었다. 가시를 곤두세우고 스스로를 지키는 데 급급해서, 그 밖의 것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는 것이다.
“앞으로는 처가댁에 관심 좀 가져보게나. 그래야 빵 부스러기라도 하나 얻어먹지 않겠나? 잘 생각해 봐. 샤펠 제국에 누가 있지?”
그제야 해롤드의 말뜻을 알아들은 라펠의 눈동자가 조금 움직였다. 아네트는 외동딸이 아니었다. 그녀의 오라비는 한낱 왕국 따위에 귀속되기 아까울 만큼의 천재였다. 그래서 대제국으로 유학을 갔고, 기어이 그곳에서 한 자리를 따냈다.
샤펠 제국처럼 거대한 곳에서 타국의 인재를 그토록 높은 자리에 앉혀준 건 유례없는 경우였다. 그걸 해낸 게 아네트의 오라비였다. 한 마디로 아르옌 바이에른은 성공한 인생 그 자체였다. 그토록 뛰어난 아들을 두었으니, 알라만드가 제 혈통의 우월함을 과시하는 것이리라.
라펠은 오만하기 짝이 없는 알라만드의 얼굴을 떠올리며 잇소리를 냈다. 만약 아르옌이 알라만드와 쏙 빼닮은 인물이라면, 꼴도 보기 싫을 것 같았다. 그게 설령 아네트의 하나뿐인 오라비라도 말이다.
‘결혼식엔 코빼기도 안 보이더니, 왜 지금에서야 방문한다는 거지?’
라펠은 속으로 짜증스럽게 여겼다. 천재께선 어찌나 바쁘신지 제 하나뿐인 여동생의 결혼식에도 불참했다. 근데 이제 와 무슨 볼일이 있다고 방문한단 말인가.
해롤드의 정보는 틀리는 법이 없었으니, 아마도 빠른 시일 내로 아르옌 바이에른과 마주하게 될 것이 틀림없었다. 라펠은 그 사실이 급격히 불편해졌다. 하다못해 결혼식 때 아르옌의 얼굴이라도 봐 놨다면 이토록 거북하진 않았을 터였다.
아르옌 바이에른은 그 유명세와 달리, 알려진 건 별로 없는 인물이었다. 어릴 적부터 샤펠 제국의 아카데미에서 유학한 후, 졸업과 동시에 관료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델티움 귀족들은 그를 대단하다고 칭송할지언정, 정작 아르옌이 어떤 인간인지는 잘 몰랐다. 그건 라펠 또한 마찬가지였다.
희대의 천재. 제국의 고위 관료. 오만한 알라만드의 아들. 그리고…… 아내의 오라비. 라펠은 단 하나도 빠짐없이 이 모든 수식어에서 거부감을 느꼈다. 세상엔 뭐 이리 골치 아픈 문제들이 많은 건지. 그냥 아네트와 단둘이, 그 밖의 모든 것들은 싹 잊고서 살아갈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라펠은 자신의 무의식적인 생각에 흠칫 놀라 몸을 일으켰다. 이제 정말로 집에 돌아갈 시간이었다.
나뭇가지에 걸터앉은 라일린은 한가롭게 다리를 흔들었다. 저 너머로 지고 있는 석양이 아름다워 눈이 부셨다. 라일린은 대체로 저 석양처럼 채도 높고 화려한 컬러들을 좋아했다. 이건 비밀이었지만, 그의 적포도주처럼 화려한 머리칼도 사실 천연은 아니었다.
하지만 겉보기와 달리 나이가 제법 들어서일까? 요즘은 눈이 아플 만큼 화려한 색깔보다, 깊이 있고 우아한 색이 더 좋았다. 마치 저 아래 발코니에 앉은 여자의 머리칼처럼 말이다.
라일린은 속을 알 수 없는 눈빛으로 흔들의자에 앉아 잠든 아네트를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머리칼은 석양을 받아 아주 아름다운 로지 블론드 색상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문득 저 머리칼을 만져 보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 자신은 반짝이는 걸 좋아하는 까마귀 기질이 있었으니까.
라일린은 망설임 없이 밑으로 훌쩍 뛰어내렸다. 발소리조차 내지 않고 사뿐하게 발코니에 착지한 라일린이 허리를 폈다. 흔들의자로 가까이 다가서자, 아네트의 얼굴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러나 아네트는 아무 위기도 느끼지 못한 채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잠기운에 발그레해진 뺨 위로 흘러내린 금발이 유독 눈에 띄었다.
‘예쁜 머리카락.’
손을 뻗은 라일린이 그녀의 금발을 귀 뒤로 쓸어넘겨 주었다. 그러자 아네트가 잠결에 으응, 하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돌렸다. 라일린은 그녀가 깨어나길 기다렸으나, 그게 전부였다. 약간 뒤척인 아네트는 다시 잠 속으로 깊이 빠져들었다. 겉보기엔 잠귀가 밝고 예민할 것 같았으나, 아네트는 의외로 둔한 편이었다.
“이런. 이래서야 ‘일’을 못 하겠는데요.”
라일린이 쓴웃음을 머금었다. 오늘 그가 아네트를 찾은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저번 아네트가 부탁한 ‘오스란드 밀입국을 위한 사전 답사’ 일정을 보고하기 위해서. 그리고 다른 하나는 곧 아네트에게 방문할 ‘뜻밖의 손님’에 대한 정보를 팔기 위해서였다.
라일린은 매번 불쑥불쑥 나타나는 것 같았지만, 다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그는 이래 봬도 꽤 바쁜 몸이었다. 하지만 이번엔 시기를 잘못 잡은 모양이었다. 저렇게 잘 자고 있는 아네트를 깨울 순 없었으니까.
저번엔 우는 얼굴을 보여주더니, 이번엔 자는 얼굴이라니. 참 의외성이 있는 여자였다. 그녀는 신전에 몰래 잠입할 만큼 대담한가 싶다가도, 고작 조각상 분장을 한 자신을 보고 소스라칠 만큼 겁이 많았다. 눈물을 뚝뚝 떨어트리며 놀라던 아네트의 얼굴을 떠올리자,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맺혔다.
‘참 질리지 않는 사람이란 말이지.’
라일린은 고개를 기울이며 잠든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긴 속눈썹을 내리감고, 잠에 취해 발그레한 뺨을 한 아네트는 꼭 도자기 인형처럼 보였다. 심지어 숨소리마저도 작아서 거의 들리지 않을 지경이었다.
라일린은 그녀가 살아있는 게 맞는지 궁금해져서 손을 내뻗었다. 그 순간, 아네트가 읽던 책이 바닥에 툭 하고 떨어졌다. 무심결에 그 책을 주운 라일린이 제목을 살폈다. 우아해 보이는 아네트가 대체 무슨 책을 읽는지 궁금했다. 책등을 훑던 라일린의 붉은 눈동자가 커졌다.
― 거짓말하는 범인을 자백시키는 취조법
심지어 밑에 작은 글씨로 ‘쉽고 효과적인 고문법 포함’이라는 무시무시한 부제까지 달려있었다. 라일린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아네트의 얌전한 얼굴과 살벌한 책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잠시 후, 끝이 약간 올라가 있는 그의 입꼬리에서 약간의 웃음이 터져 나왔다.
“푸훗.”
정말로 재미있는 여자였다. 그녀가 남편을 떠나, 오스란드로 갈 마음이 생겨서 천만다행이었다. 그때가 되면 자신에게도 기회가 오겠지. 라일린의 아름다운 얼굴에 모처럼 진심 어린 웃음이 번졌다.
아네트는 설핏 잠에서 깼다. 발코니의 흔들의자에 앉아 책을 읽다가 그대로 잠든 모양이었다. 최근 아네트는 신전에서 셀레스틴을 만났던 일 때문에 제법 고민하고 있었다. 그녀의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알 수가 없어서였다. 자신도 범인이 아니고, 셀레스틴도 범인이 아니라면…… 그렇다면 대체 누가 꾸민 짓일까?
머리가 복잡하다 보니 자연히 읽는 책도 험악해져만 갔다. 이러다 만약 마부 이반을, 아니…… 벤 마치를 만나게 된다면 정말로 심문이라도 할 것 같았다. 그렇게 해서라도 진짜 배후를 알아낼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어차피 지금은 고민해 봐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밖은 깜깜해졌고, 정원 너머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제법 차가웠다. 이러다간 감기에 걸릴지도 몰랐다. 무심코 의자에서 일어나려던 아네트는 자신의 몸 위에서 툭 떨어지는 겉옷을 발견했다. 그것을 주워든 아네트의 눈이 약간 커졌다.
‘남자 코트잖아?’
처음엔 라펠이 덮어주고 간 걸까 싶었다. 하지만 라펠의 것이라기엔 코트가 지나치게 화려했다. 짙은 와인 컬러의 코트는 금빛 술과 테두리로 장식되어 있어서 어둠 속에서도 반짝거렸다. 라펠이 이런 코트를 입을 리 없었다.
아네트는 코트에서 풍기는 향수 냄새에 고개를 갸웃했다. 묘하게 관능적이면서도 퇴폐적인 향기가 났다. 머리보다 후각이 먼저 이 코트의 주인을 알아차렸다. 아직 잠기운이 남아 있던 아네트의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라일린 씨. 혹시 여기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