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아네트는 흐린 눈으로 라펠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왜 자신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는 걸까. 정작 자신을 싫어하는 건 라펠 본인이면서. 자신의 목덜미를 지분대는 입술이, 슈미즈를 끌어 내리는 손길이 난폭하게 와 닿아서 슬펐다.
이런 식으로 상황이 흘러가는 게 싫었던 아네트는 가만히 팔을 뻗어 그의 상반신을 끌어안았다. 어쩐지 라펠을 밀어내는 것보다, 이편이 그의 행동을 멈추기엔 더 효과적일 것 같았다. 과연 아네트의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그녀의 옷을 벗기려던 라펠의 손끝이 멈칫 굳어졌다.
“…이게 뭐 하는 짓이지?”
라펠은 인상을 찌푸리며 몸을 뒤로 빼려고 했다. 꼭 아네트와 이런 긴밀한 포옹을 하는 게 싫은 사람처럼 말이다. 하지만 아네트는 있는 힘껏 그의 커다란 상반신에 팔을 두르고, 그 등을 끌어안았다. 그리고 라펠을 올려다보며 쓸쓸한 목소리로 물었다.
“정말로 내가 당신을 싫어한다고 생각하나요?”
라펠의 눈동자가 말없이 아네트를 훑었다. 입맞춤 때문에 붉어진 입술과 흘러내린 슈미즈 사이로 드러난 흰 어깨, 그리고 처연하게 젖은 눈동자까지. 어쩐지 자신이 그녀를 괴롭히고 있는 것 같아 마음이 불편해졌다.
때마침 눈을 내리감은 아네트의 작은 얼굴 위로 눈물 한 방울이 천천히 흘러내렸다. 연약한 턱을 타고 뚝 떨어진 그 눈물이 라펠의 심장 위로 떨어져 술렁이는 파문을 일으켰다. 라펠은 저도 모르게 그 뺨으로 손을 뻗었다. 당장이라도 저 눈물을 닦아주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바로 그때, 슬픈 눈동자를 한 아네트가 중얼거렸다.
“내가 싫다고 했던 건 바로 당신이었으면서.”
“……뭐?”
아네트의 말을 한발 늦게 이해한 라펠이 뻣뻣하게 굳어졌다. 어쩐지 목이 졸리는 듯한 느낌이 들어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아네트의 말을 듣고 생각해 보니, 자신 또한 그녀를 싫다고 말한 적이 여러 번 있었다. 같은 입장이 되어 본 지금에서야 라펠은 새삼 가슴이 섬뜩해졌다.
하지만 아네트는 이미 단단히 마음이 상한 후였다. 매번 변덕스럽고 뒤틀린 라펠의 심기를 달래주는 것도 지쳤다. 본인은 면전에서 대놓고 ‘네가 싫어.’라고 한 주제에, 이제 와 옛날얘기로 사람을 추궁하다니. 아네트는 억울하고 서럽고 무엇보다도 비참했다.
고개를 든 아네트가 라펠의 목덜미에 팔을 감았다. 언젠가 이런 대화를 하게 될 날이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자신이 솔직한 마음을 묻는 순간, 라펠과의 관계도 끝나리란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젠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었다. 그의 차가운 푸른 눈을 똑바로 올려다본 아네트가 지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꼭 떨어지기 직전의 꽃송이처럼 처연하게.
“말했잖아요. 난 당신을 싫어하지 않아요, 라펠. 항상 그렇게 말했는걸요. 당신은 내 하나뿐인 남편이고, 그러니까 난…… 당신밖에 없는걸요. 근데 왜 자꾸 그런 식으로 말해요?”
아네트의 말은 대단히 직설적이었다.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한 순간, 라펠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그는 입술을 꽉 깨물며 붉어진 얼굴을 감추려고 습관처럼 몸을 돌렸다. 아네트의 말이 꼭 사랑 고백처럼 들려서 심장이 쿵쿵 뛰었다. 그럴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바로 그때, 라펠의 단단한 어깨에 이마를 기댄 아네트가 한숨처럼 내뱉었다.
“하지만 당신은 어떤가요? 당신도 날 조금쯤은 좋아하나요?”
라펠은 그 질문에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러자 쓸쓸하게 웃은 아네트가 손을 내려 그의 어깨를 쓸어내렸다. 그녀의 꽃잎 같은 입술이 생기를 잃고 허무하게 중얼거렸다.
“그럴 줄 알았어요.”
* * *
“그래서 도망쳤냐? 못난 놈.”
술잔을 비운 해롤드가 대놓고 비웃었다. 불끈한 라펠이 그를 쏘아보았지만, 의외로 그 입에선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정확하겐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자신의 잔을 가득 채운 라펠이 이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만약 술잔에 코를 박고 자살할 수 있다면 기꺼이 그러고 싶은 심정이었다.
‘당신도 날 조금쯤은 좋아하나요?’
그렇게 묻던 아네트의 목소리가 귓가에 달라붙어 떨어지질 않았다. 외롭고 지친, 그리고 슬픈 목소리. 라펠은 짜증스럽게 자신의 흑발을 쓸어넘겼다. 왜 그때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던 걸까? 사랑하냐고 물은 것도 아니고, 까짓것 좋아하냐고 물었을 뿐인데. 그쯤은 얼마든지…… 아니다. 역시 대답하지 못할 것 같았다.
“그녀를 사랑하나?”
때마침 소파에 비스듬히 기대앉은 해롤드가 물었다. 라펠은 대답 대신 술잔을 하나 더 비웠다. 독한 술이 넘어가면서 식도가 얼얼했지만, 그래서인지 꽉 막혔던 말문이 트였다. 젖은 입술을 손등으로 문지른 라펠이 툭 내뱉었다.
“그걸 모르겠어.”
“모르겠다고?”
“해 본 적이 있어야 알지, 빌어먹을.”
라펠은 아무도 사랑하지 않았다. 가족도, 여자도. 지금껏 살아오면서 타인을 사랑해 본 적이 없었다. 그가 아는 세상은 냉혹하고 잔인한 곳이었다. 그래서 약한 부분을 필사적으로 죽이고, 자신의 폭력성을 검술이라는 포장으로 뒤덮어 꾸역꾸역 기어 올라왔다. 그 대가로 권력과 부를 움켜쥐고, 드디어 남들보다 위에 서게 되었다.
근데 이제 와 누군가를 사랑하라니. 라펠이 보기에 그건 자신의 심장을 타인의 손에 쥐여주는 자살 행위였다. 더군다나 그처럼 감추는 게 많고, 자존심 강한 남자에겐 더더욱 불가능한 것이기도 했다. 라펠은 자신의 치부를 들키느니 차라리 목을 그을 인간이었다.
‘그럼 차라리 놓아주면 될 텐데.’
라펠은 아네트의 보석함 안에 숨겨져 있던 세크리트 길드의 반지를 떠올렸다. 아네트가 정확히 그 길드의 어떤 서비스를 이용하는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의 짐승 같은 본능은 일종의 불길함을 감지했다. 라펠의 날카로운 눈초리에 흉흉한 집착의 기색이 감돌았다.
맞은편에서 그를 바라보던 해롤드는 어깨를 으쓱했다. 누가 봐도 저건 사랑이었다. 다만 좀 위험한 부류에 속해서 그렇지. 해롤드는 우아하고 영리한 아네트의 얼굴을 떠올렸다. 보기 드물게 좋은 아가씨던데, 하필이면 저런 놈에게 잡히다니. 마음고생 할 게 뻔했다.
그래서 해롤드는 가엾은 어떤 아가씨를 위해 힘 좀 써 보기로 마음먹었다. 입가에 유들유들한 미소를 띤 해롤드가 슬슬 라펠을 부추기기 시작했다.
“에잉, 쯧쯧. 사랑과 질투는 본디 주머니 속 송곳과도 같은 법. 아무리 감추려고 애써도 감출 수가 없는 법이지. 근데 자네가 잘 모른다니 이건 아마도… 내 생각엔…….”
“아마도, 뭐?”
교묘하게 말을 끊은 해롤드가 뜸을 들였다. 그러자 눈썹을 찌푸린 라펠이 짜증스레 물었다. 해롤드는 대답 대신 느긋하게 자신의 턱수염을 어루만졌다. 이를 지켜보는 라펠의 눈이 점점 더 날카로워졌다. 그의 짜증이 폭발하기 일보 직전에서야 해롤드가 명쾌하게 단언했다.
“간단해! 본인도 모를 정도로 가벼운 감정이라면, 그게 어디 사랑이겠나? 자넨 그녀를 사랑하지 않아.”
“무슨……!!”
발끈한 라펠이 뭐라고 반박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하지만 할 말이 있을 리 없었다. 아니, 애초에 자신이 왜 발끈한단 말인가? 자신이 사랑 같은 시시한 감정놀음에 휘둘리지 않는 인간이란 소린데. 기분이 나쁠 턱이 없었다. 근데도 이상하게 불쾌했다.
하지만 해롤드의 말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술을 한 모금 들이키고, 시가를 입에 문 해롤드가 본격적으로 라펠을 긁었다.
“사랑이 아니면 뭐 어떻단 말인가? 어차피 귀족 간의 결혼이란 게 그런 건데. 내가 아는 쇼 윈도우 부부만 열 쌍이 훌쩍 넘어. 그러니 자네도 그렇게 살면 그만이야. 맘에 드는 여자가 생기면 그 여자와 불장난도 하고, 그러다 질리면 다시 집으로 돌아가고. 편리하지 않은가?”
연기를 훅 내뱉은 해롤드가 씩 웃었다. 그러다 깜빡했다는 듯 이마를 탁 치며 능청스럽게 덧붙였다.
“아, 물론 그대의 부인도 마찬가지겠지만. 사랑해 주지도 않는 남편이 뭐 그리 대단하다고 젊은 날의 순정을 바치겠는가? 신경 쓰지 말게나. 지금은 그냥 외로워서 저러는 거겠지. 계속 혼자 내버려 두면 알아서 새 남자를 찾고, 그 남자와 실컷 배를 맞추다가 질릴 때쯤 돌아올 게야. 그때쯤 되면 자네를 성가시게 굴지도 않을 테지.”
라펠은 진심으로 쌍욕이 나올 뻔했다. 자신만 아는 그 예쁜 몸이 딴 남자의 품에 안겨서 헐떡이는 모습을 상상만 해도 피가 거꾸로 치솟았다. 그 꼴을 보는 즉시 상대 놈의 사지를 조각조각 내서 불살라버리고, 그 재까지 짓밟을 게 틀림없었다.
심지어 더 엿 같은 사실은, 지금 당장이라도 아네트와 배를 맞추고 싶어하는 새끼의 얼굴이 최소 세 명쯤은 떠오른다는 사실이었다.
‘한 놈도 남김없이 다 죽여버리고 싶군.’
한때 전쟁터를 휩쓸었던 잔혹성이 라펠의 핏줄을 타고 솟구쳤다. 그는 자신의 암컷을 지키려는 짐승처럼 살벌하게 이를 갈았다. 대체 이 거지 같은 감정은 무엇인지, 자신은 아네트를 어떻게 하고 싶은 건지. 이 모든 게 너무나 생소하고 복잡해서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그래서 머리가 돌아버릴 것 같았다.
마음이 급해진 라펠은 술을 들이켠 후, 빈 잔을 아무렇게나 던져버렸다. 소파를 박차고 일어난 그가 겉옷을 집어 들었다. 어쩐지 자신이 집을 비운 지금, 당장이라도 딴 놈이 달려와 아네트의 주위를 얼쩡대고 있을 것 같았다.
취했음에도 불구하고 아까보다 날이 선 라펠이 작별인사를 던졌다.
“간다, 영감.”
“아참, 하마터면 자네에게 일러주는 걸 깜박할 뻔했군. 어디 보자…… 내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더라? 나이가 드니 자꾸 깜박깜박하는군, 이거 원.”
소파에 몸을 깊이 파묻은 해롤드가 한가롭게 발끝을 까딱거렸다. 라펠은 아까부터 늦장을 부리는 해롤드의 음흉한 화법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해롤드가 저런 식으로 말할 땐 무시하고 그냥 가 버릴 수 없었다. 그만큼 중요한 정보이기 때문이었다.
경험상 이를 잘 알고 있는 라펠은 잇소리를 내면서도 해롤드가 입을 열 때까지 기다렸다. 묘하게 히죽대며 그런 라펠을 바라보던 해롤드가 선심 쓴다는 듯 조언을 던졌다.
“조만간 귀한 손님이 올 테니 집 청소나 잘 해두게. 혹시 아는가? 자네가 손님 대접을 잘하면, 부인이 기뻐할지도 모르지.”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