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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화





















아네트는 화장대 속 거울을 바라보며 머리를 빗었다. 숱 많고 부드러운 금발이 허리까지 흘러내렸다. 그러나 정작 그 금발의 소유자인 아네트는 딴생각에 잠겨 있었다. 머리칼을 빗어 내리던 그녀의 손길이 점차 느려졌다.



‘라펠이 늦네.’



아네트는 혹 왕궁에서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지 걱정스러웠다. 이를테면 불필요한 시비가 걸렸다든지, 타인에게 기분 나쁜 소리를 듣는다든지 하는 것들 말이다. 다 라펠이 작위를 얻은 직후, 질리도록 겪었던 일들이었다. 심지어 그 적의의 대부분은 자신의 부친, 알라만드가 조장한 여론이었고 말이다.



아네트는 가만히 한숨을 내쉬었다. 라펠은 자존심이 강했다. 남들에게 우습게 보이느니 차라리 혀 깨물고 죽을 남자였다. 그토록 고고한 남자가 하필 사생아로 태어났으니, 그 속이 오죽할까.



삐걱―



이때, 아네트의 침실문이 갑자기 스르르 열렸다. 어찌나 조용히 열리던지 유령이라도 들어오는 줄 알았다. 흠칫 놀란 아네트가 누군가 싶어 고개를 돌렸다. 역시나, 그녀의 침실에 노크도 없이 침입할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뿐이었다.



“라펠?”



아직 왕궁에 있는 줄 알았던 라펠이 그녀의 침실 문가에 서 있었다. 그의 딱딱하게 굳은 얼굴을 본 순간, 아네트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라펠은 심기가 무척 저조해 보였다. 그의 표정을 금방 읽어낸 아네트가 걱정스레 물었다.



“……왜 그래요, 라펠? 왕궁에서 무슨 일 있었어요?”



무도하게 쳐들어온 자신에게 묻는 아네트의 목소리는 다정하기까지 했다. 이를 들은 라펠이 뭔가를 참는 듯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머리끝까지 치솟은 못된 성질머리를 누르는 기색이 역력했다. 전 같았으면 고함부터 버럭 지르고 시작했을 텐데, 놀라운 발전이었다. 한동안 숨을 고르며 화를 참던 라펠이 불쑥 내뱉었다.



“당신이 나 같은 남자는 싫다고 했다던데. 정말이야?”



“네? 제가요?”



청천벽력 같은 라펠의 말에 아네트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게 대체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자 라펠이 화를 꾹꾹 참는 목소리로 덧붙였다.



“결혼 전, 나 같은 놈의 아내가 되느니 차라리 평생을 혼자 살다 죽겠다며. 그 말이 사실이야? 정말로 그런 말을 했었냐고.”



아네트는 기억을 더듬어 보았지만,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어차피 그녀는 남들에게 사람 흉을 보고 다니는 인종은 못 되었다. 딱히 그럴 만큼 가까운 사람도 없었고 말이다. 아마 라펠이 어디선가 이상한 소리를 듣고 온 모양이었다.



“저는 모르는 일이에요, 라펠. 폐하께서 그런 말씀을 하시던가요?”



아네트는 오늘 라펠이 왕궁에 다녀온 걸 떠올리고 물었다. 그러자 대답 대신 성큼 다가온 라펠이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얼굴 전체에 커다란 그림자가 드리워지면서 본능적으로 솜털이 바짝 곤두섰다. 그처럼 체격이 좋은 남자가 흉흉한 표정으로 자신을 내려다보자 위압감마저 느껴졌다. 고개를 숙인 라펠이 이윽고 내뱉듯이 말했다.



“그 샌님 같은 놈이 그러더군. 그대처럼 고상한 여자가 나 같은 사생아 자식을 좋아할 턱이 없다고. 라펠 카네시스, 그 난폭한 남자와 결혼할 바엔 수녀원에 들어가겠다고. 그대가 예전에 한 말이었다지?”



“제가요? 전 그런 말을 한 적이…… 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던 아네트의 머릿속에 뭔가가 번쩍 떠올랐다. 아마도 라펠에게 이 말을 한 사람은 루드비히일 터였다. 왕궁에 간 라펠과 우연히 마주쳤던지, 아니면 작정하고 기다렸다가 그를 긁은 모양이었다. 아네트는 예전에 루드비히가 했었던 말을 어렴풋이 떠올렸다.



‘어쩌면 아바마마의 말씀이 옳을지도 몰라, 아네트. 그자가 내 친형이었다면…… 나보다 더 나은 왕세자가 되었겠지. 하지만 아네트, 그렇게 되면 당신이 그와 결혼하게 되겠지? 그건 싫어! 아니, 당신도 차라리 그편이 더 행복할까? 그가 훨씬 더 남자다우니까 말이야.’



아마도 몇 년 전이었을 것이다. 그날도 부왕에게 비교를 당한 루드비히는 깊은 마음의 상처를 입었다. 그가 자신에게 기대어 눈물을 흘렸던 순간을 기억했다. 루드비히의 은빛 속눈썹 밑으로 흘러내린 눈물은 그의 우아한 턱선을 타고 뚝 떨어져 내렸다. 그 투명한 눈물방울이 햇빛을 받아 거미줄처럼 반짝였던 게 떠올랐다.



당시에도 아네트는 루드비히의 고민 상담 역할이었다. 그녀는 매번 부왕의 비교와 폭언에 상처받는 루드비히가 가엾게 느껴졌다. 누구보다 고귀하게 태어난 루드비히는 정작 자존감이 땅바닥을 치고 있었다. 이러다간 예민한 감수성의 그가 자결하겠답시고 언제 혀를 깨물지 모를 노릇이었다.



‘차라리 이럴 바엔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텐데.’



그렇게 중얼거리는 루드비히의 눈동자는 시리도록 아파 보였다. 그래서 아네트는 그의 기운을 좀 북돋아 줄 필요성을 느꼈다.



구체적으로 자신이 뭐라고 말했었는진 기억이 나지 않았다. 벌써 몇 년 전 일이었고, 회귀한 시간까지 합치면 더 오래전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마 라펠이 언급했던 말들과 비슷한 위로를 건넸겠지. 이를테면 자신은 라펠과 결혼하길 원치 않는다, 당신이 아니라면 그 누구와도 결혼하기 싫다는 식으로 말이다.



아네트의 위로는 늘 그렇듯 효과가 있었다. 그녀의 말에 루드비히가 젖은 눈가를 닦으며 비로소 웃었던 것이 기억났다. 그는 당시 꼭 구원이라도 받은 사람처럼 자신을 바라보았었다.



‘근데 그 얘기를 라펠에게 해 버리다니…….’



아네트는 말없이 자신의 이마를 손으로 짚었다. 골치가 다 아파졌다. 평소 섬세하고 예민한 루드비히는 화가 나면 라펠만큼 격렬해졌다. 그래서 서로 할 말 못 할 말 쏟아붓던 와중에 자신의 얘기마저 꺼낸 모양이었다. 그것도 아네트가 미처 라펠이란 사람을 알기 전, 의미 없이 한 위로까지 들먹여 가며.



상황을 대충 알 것 같긴 했지만, 아네트는 내심 루드비히에게 실망했다. 그가 미련을 버리질 못해서 자꾸만 라펠과 불필요한 갈등이 생기는 것 같아 불유쾌했다. 루드비히와는 어릴 적부터 함께 했던 오랜 관계인데, 이러다 좋은 추억마저도 다 날아갈 것 같았다.



“당신 표정을 보아하니 사실인 모양이군. 그 새끼의 말이 다 맞았어.”



눈썹을 찌푸린 라펠의 눈빛이 더 어두워졌다. 그의 새파란 눈동자에 한기가 돌기 시작했다. 아네트가 익히 잘 아는 서릿발 같은 눈빛이었다. 이를 본 아네트는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전생에 질리도록 겪어서 잘 아는, 아주 익숙한 패턴이었다.



“아주 옛날얘기에요, 라펠. 그땐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도 잘 몰랐는걸요. 폐하께서 자꾸 루드비히 전하를 당신과 비교하시니까, 전하가 가엾어서 위로차 했던 말…….”



그 순간, 손을 뻗은 라펠이 그녀의 턱을 붙들었다. 그리고 엄지손가락으로 마치 꽃잎을 뭉개듯 그녀의 입술을 문질렀다. 훈련 때문에 굳은살이 박힌 손끝이 여린 살점을 거칠게 쓸어서 자극적이었다. 이에 아네트가 말끝을 흐리자, 고개를 숙인 라펠이 그녀의 귓가에 다정하게 속삭였다.



“그대는 거짓말을 잘하는군. 언제는 나와 결혼한 게 왕세자비가 되는 것보다 더 좋다더니, 하마터면 그 말을 믿을 뻔했어. 간교한 바이에른 같으니라고.”



라펠은 심기가 단단히 틀어져 있었다. 하필이면 왕에게 ‘아내를 믿지 말라.’라는 경고를 들은 직후라 그런지 더욱 불안정했다. 라펠 또한 이게 아네트를 추궁할만한 일은 아니라는 걸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그녀의 말마따나 결혼 전 서로를 몰랐을 때의 얘기였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 말을 전달한 타이밍이, 그리고 대상이 너무 나빴다. 하필이면 루드비히였기 때문이다. 배다른 형제에게 열등감을 품고 있는 건 비단 루드비히뿐만은 아니었다.



자신과 달리 완벽한 혈통의 수컷. 최고로 우아하고 아름다운 아네트의 곁에 당당히 설 자격이 있는 경쟁자. 라펠은 루드비히에 대한 열등감과 질투로 돌아버릴 것 같았다. 할 수만 있다면 그 왕자님다운 낯짝을 곤죽이 되도록 뭉개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라펠을 진짜 미치게 하는 것은…… 자신이 루드비히의 그 치졸한 공격에 실제로 충격을 받았단 사실이었다.



‘대체 내가 왜? 이 여자가 뭐라고. 고작 아네트가 날 싫어했었다는 게 뭐 그리 대수라고.’



라펠은 저택으로 돌아오는 길에 수도 없이 스스로에게 되물었다. 하지만 답은 나오지 않았고, 쇳물이라도 삼킨 것처럼 속이 제멋대로 들끓었다. 핏줄에 대한 그의 오랜 열등감이, 아네트 같은 여자가 자신을 좋아하지 않을 거라는 불안감이 야금야금 누적되었다가 끝내 폭발했다. 하필이면 그가 가장 눈엣가시처럼 여겼던 루드비히에 의해서.



“그래, 끔찍할 테지. 나 같은 사생아 놈이 남편이라니. 심지어 당신에게 누명을 씌운 마부와 같은 피가 내 몸에도 흐르고 있는데. 그대는 내가 아주 진절머리가 날 테지.”



손끝으로 아네트의 뺨을 쓸어내린 라펠이 자조적으로 중얼거렸다. 아네트는 그의 일그러진 얼굴이 이상하게 울 것처럼 보인다고 생각했다. 화가 날 때면 좀 더 짙어지는 그의 새파란 눈동자는 오늘따라 시린 빛을 머금고 있었다. 꼭 깊이 상처받은 사람처럼 말이다. 그래서 아네트는 그가 더 부정적인 방향으로 생각하기 전에 얼른 입을 열었다.



“아니에요, 라펠. 정말로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게…….”



“쉿, 아네트.”



라펠의 한쪽 입꼬리가 비틀린 웃음을 만들어냈다. 어느새 아네트를 번쩍 안아 화장대 위에 올려놓은 그가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양손으로 아네트의 등과 허리를 쓸어내리며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뜨거운 혀가 입술 위를 핥는가 싶더니 이내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그리고 아네트의 혀를 휘감아 강하게 빨아들였다.



아네트는 몸을 비틀었지만 허리를 휘감은 그의 팔을 떼어낼 순 없었다. 여린 혀끝을 당장이라도 물어뜯을 듯 잘근대는 그의 치아가 두려우면서도 짜릿했다. 입술을 뗀 라펠이 품 안의 아네트를 내려다보며 잔인하게 속삭였다.



“그래도 상관없어. 당신이 내 아내란 사실은 변치 않으니까. 그걸 당신이 좋아하든, 싫어하든 말이지.”



말을 마친 라펠이 그녀의 가녀린 쇄골을 콱 깨물었다. 마치 아네트에게 벌을 주기라도 하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