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한편, 라펠은 왕궁에서 썩 유쾌하지 않은 시간을 보내는 중이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눈앞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남자의 희끗한 눈썹 밑으로 제법 선명하게 잡혀가는 눈가 주름이 보였다. 이 때문에 약간 일그러져 보이는 눈매에는 자신과 똑같은 새파란 눈동자가 자리하고 있었다. 라펠은 그 얼굴을 바라보며 자신의 30년 후도 저런 느낌일까, 하고 무심코 생각했다.
“……난 너를 믿고 있다, 라펠. 넌 델티움의 미래를 이끌어 갈 훌륭한 재목이야. 아직 어린아이였을 때가 엊그제 같은데, 정말로 잘 커 주었어. 너를 거둔 건 후회 없는 선택이었단다. 내 아들아.”
결론은 생색내기로군. 라펠은 속으로 약간 비딱하게 생각했다. 얼핏 들으면 자신을 순수하게 칭찬하는 것 같았지만, 사실은 마음의 빚을 지우는 교묘한 화법이었다. 사생아 나부랭이인 널 거둬서 이렇게 잘 키워줬으니 왕국에 충성하란 소리였다.
라펠은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체한 것처럼 답답했다. 셀그라티스의 사생아는 아마 자신 말고도 두엇쯤 더 있을 터였다. 어쩌면 더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들 대부분은 귀족의 신분조차 갖지 못한 채 그늘에 숨어 약간의 양육비나 받으며 살 터였다. 만약 라펠도 어릴 때 검술에 두각을 보이지 않았다면 지금쯤 그렇게 살고 있을 것이다.
‘쓸모없었다면 나도 진즉에 버려졌을 테지.’
자신의 시궁창 같았던 유년 시절을 떠올린 라펠이 자조적으로 생각했다. 셀그라티스는 자신에게 은혜를 베푼 게 아니었다. 오히려 자신의 재능을 보고 일종의 투자를 한 셈에 가까웠다. 그 투자비는 이미 자신이 르탄의 반란 세력을 진압할 때 다 갚은 것으로 아는데, 셀그라티스가 아직도 빚이 남은 것처럼 구는 게 싫었다. 자신은 그 빌어먹을 전쟁 후유증으로 몇 년간 잠도 제대로 못 잤는데 말이다.
그래도 친부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없는 건 아니었다. 어쨌든 자신에게 재능이 있는 걸 확인한 후부터 그는 본격적으로 라펠의 뒤를 밀어주었다. 말 그대로 아낌없는 투자였다. 그는 사생아를 경시하는 사교계의 귀족들을 권위로 짓눌러 가며 라펠에게 권력을 쥐여주었다. 라펠은 이 모든 것에서 일종의 채무감을 느꼈다.
무엇보다 왕에게 진 가장 큰 빚은 아네트와의 혼사였다. 델티움에서 왕가를 제외한 가장 고귀한 혈통, 바이에른 가의 적녀. 아네트는 정말로 왕비가 되어도 손색없는 여자였다. 라펠 혼자서는 절대 불가능했을 혼사였다.
‘그거 하나만큼은 참 감사할 노릇이지.’
아네트의 예쁜 얼굴을 떠올린 라펠이 무심코 속으로 생각했다. 당시엔 정말 죽도록 하기 싫은 결혼이었는데, 인간이란 이 얼마나 간사한지. 하지만 라펠도 나름대로 변명할 거리가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라펠이 후작위를 받을 때 가장 극렬하게 반대한 이가 바이에른 공작이었다. 그는 사사건건 라펠을 멸시하는 눈으로 바라보았고, 작위를 받은 후엔 아예 노골적으로 그를 무시했다. 가짜 귀족과 한자리에 있는 것조차 싫다며 대놓고 자리를 뜬 적도 많았다. 당연히 라펠은 그때마다 눈앞이 빨개질 정도로 모멸감을 느꼈다.
근데 그런 바이에른 공작의 딸과 결혼하라니! 보나 마나 제 부친과 똑같은 여자일 게 뻔한데, 그녀와 한 지붕 밑에서 산다는 것만으로도 끔찍했다. 라펠은 자신이 정말로 아내를 학대해 버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버티고 또 버텼다. 그런 라펠을 벽력같이 꾸짖어 기어이 이 결혼을 강행시킨 장본인이 바로 셀그라티스였다.
‘어리석은 녀석 같으니라고!! 작위만 귀족이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초대 가주가 되었으면 어떤 길이 가문을 번성시킬 수 있을지 생각하고, 또 판단해야 하거늘!! 네 어찌 미련한 치기만으로 이 좋은 혼처를 거부한단 말이냐!!!’
셀그라티스는 비록 라펠을 잘 만나 주진 않았지만, 꽤 관대한 태도를 취하는 편이었다. 그게 연기인지 진짜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적어도 델티움 사교계에선 진실로 통했다. 하지만 혼사 때만큼은 셀그라티스도 무섭게 화를 내며 라펠을 몰아세웠다. 심지어 라펠에게 준 귀족 작위를 다시 생각해 보겠단 최후통첩까지 날렸을 정도였다.
언제나 자신의 뒤를 봐 주던 셀그라티스가 이 정도로 강수를 둔 건 처음이었다. 투자니 뭐니 해도, 셀그라티스에게 받은 게 많은 라펠로선 끝까지 버틸 수가 없었다. 그는 결국 이를 아득바득 갈며 이 혼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말 그대로 울며 양파 먹기로 한 결혼이었다.
‘근데 그 여자를 설마 이렇게까지 ……하게 될 줄이야.’
별생각 없이 생각하던 라펠이 문득 흠칫했다. 자신은 대체 저 공백 사이에 무슨 말을 넣고 싶었던 걸까? 아냐, 아닐 것이다. 라펠은 반듯한 턱에 힘을 주며 애써 딴생각을 하려고 했다. 본능적으로 자신의 가치관에 위협을 주는 생각을 피하려는 것이었다.
이런 라펠의 번뇌를 알 리 없는 델티움의 19대 왕, 셀그라티스가 손을 뻗어 어깨를 두드렸다. 누구와 몸이 닿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 라펠이 그 손길에 눈썹을 약간 찌푸렸다. 하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비단 셀그라티스가 왕이어서 그런 건 아니었다. 굳이 따지자면 그가 마지막 남은 자신의 ‘가족’이었기 때문이었다.
“네 어미도 이런 네 모습을 보았다면 자랑스러워했을 테지. 그녀는 그래도 네게 많은 기대를 갖고 있었으니까. 이토록 훌륭하게 장성해 준 것에 대해 고마워할 게야.”
셀그라티스의 입에서 친모 이야기가 나오는 순간, 라펠의 표정이 노골적으로 차가워졌다. 일종의 경고였다. 그의 얼굴에 떠오른 선명한 거부감을 본 셀그라티스가 혀를 찼다. 조금은 안쓰럽고, 조금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라펠을 바라본 왕이 물었다.
“아직도 네 어미를 원망하느냐?”
“지금 진심으로 그리 물으시는 겁니까?”
라펠은 빈정거림을 여실히 담은 어조로 되물었다. 그는 자신이 다소 건방지게 굴어도 왕이 수용해준단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하물며 친모 얘기를 꺼낸 마당에야, 이런 반응을 보여도 지극히 당연했다. 진심으로 화가 난 라펠의 눈동자를 본 왕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내 너를 그 지경이 되도록 돌아보지 못한 탓도 크구나. 조금만 빨리 손을 썼더라면, 네 어미 또한 그렇게 극단적으로 행동하진 않았을 텐데.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이로다.”
라펠을 바라보는 왕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혈육은 혈육인지, 라펠은 제 친부가 이런 표정을 지을 때마다 마음이 누그러졌다. 그의 눈이 한때 자신과 비슷했던 왕의 흑발 위에 내려앉은 허연 세월을 보았다. 노쇠해 가는 부친을 보고도 계속 화를 내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괜찮습니다, 다 지난 일이니. 지금은 폐하의 은덕 하에 보시다시피 잘 지냅니다.”
결국 짤막하게 대꾸한 라펠이 고개를 돌렸다. 친모에 대해서 더 이상 얘기하고 싶지 않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를 본 셀그라티스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다른 얘기를 꺼냈다.
“그래서, 결혼생활은 좀 어떠한가?”
“폐하께서 주관한 결혼이니만큼 체면치레는 하고 있습니다.”
라펠이 적당히 무심하게 대꾸했다. 그 대답을 들은 셀그라티스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라펠이 정말로 잘 지내는지, 아니면 형식적으로 이렇게 대꾸하는 건지 살피는 듯한 눈이었다. 하지만 라펠의 심드렁한 얼굴에선 아무것도 읽어낼 수 없었다.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던 왕이 묵직하게 경고했다.
“아내가 되었다 해도 근본은 서로 다른 두 사람. 그러니 안사람을 섣불리 믿고서, 지나치게 많은 걸 알려주진 말거라. 아네트는 겉으론 유해 보이지만, 그 또한 바이에른의 여식이지. 그러니 제 가문을 최우선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도다. 네가 스스로 쥐여준 약점으로 훗날 어떤 간계를 꾸밀진 모르는 노릇이지. 내 말 이해하겠느냐?”
라펠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예전 같았으면 저 말을 굳게 믿고서 마음에 새겼겠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문득 뇌리에 아네트의 가냘픈 목소리가 떠올랐다. 그 어느 날, 그녀가 간특하게도 속삭였던, 하지만 가슴에 기어이 와 닿았던 말.
‘라펠, 당신은 내 소중한 가족이에요. 그러니 난…… 당신을 지키고 싶어요.’
실로 어처구니없는 소리였다. 지키긴 누가 뭘 지킨단 말인가. 자신의 가슴팍에나 닿을 자그마한 여자가. 그 가느다란 손목으로 티 스푼이나 제대로 들면 다행이었다. 근데도 왜 그 목소리를 떠올리면 가슴이 저미는 느낌이 드는 건지. 침잠해진 눈동자를 내리깐 라펠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만 가 보겠습니다. 건강 유념하십시오, 폐하.”
셀그라티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라펠은 묵묵히 자신을 일별하는 왕을 뒤로하고 알현실을 걸어 나왔다. 왕궁은 아름답고 우아했지만, 언제 와도 답답한 느낌이었다. 도무지 자신이 있을 곳 같지가 않았다. 이것도 핏줄에 더러운 피가 섞였기 때문일까.
라펠은 자택으로 돌아가기 위해 발걸음을 떼었다. 낮에 뱃놀이를 갔다던 아네트는 지금쯤 돌아와서 자신을 기다릴 터였다. 금발에 둘러싸인 새하얀 얼굴이 고개를 갸웃하며 ‘왔어요, 라펠?’ 하고 인사를 건네겠지.
그 상냥한 목소리를 떠올린 라펠의 발걸음이 조금 더 빨라졌다. 하지만 그의 앞을 가로막는 누군가가 있었다.
‘이건 또 뭐야?’
상대를 확인한 라펠의 얼굴에 대뜸 불쾌한 기색이 떠올랐다. 방금 본 셀그라티스 왕 외에도, 라펠과 비슷한 눈동자를 가진 남자가 왕궁에 한 명 더 있었다. 찬 빛을 머금은 새파란 눈. 여기에 한술 더 떠서 얼음처럼 투명한 은발을 가진 미남자는 꼭 겨울의 숨결로 빚은 사람처럼 보였다. 유일하게 혈색을 머금은 그의 입술이 도전적으로 움직였다.
“잠시 대화 좀 하지. 남자 대 남자로서 말이야.”
델티움의 왕세자, 루드비히가 그늘 속에서 성큼 걸어 나왔다. 감수성이 풍부했던 얼굴은 예전과 달리 음울한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아마도 크나큰 상실감과 질투, 소유욕 같은 어두운 감정들을 깨우쳤기 때문이리라. 라펠은 자신을 상처 주고 싶어 안달 난 그 잔인한 눈을 마주하며 이를 드러냈다.
“바라던 바입니다.”
그는 남이 걸어온 싸움을 피해 본 적이 없는 남자였다. 까짓것 루드비히가 뭐라 짖어대든, 그건 싸움에 진 개의 발악에 불과할 따름이었다. 지금 아네트의 남편은 바로 자신이었으니까. 따라서 루드비히의 뒤를 따르는 라펠의 발걸음은 느긋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