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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화





















아네트는 자신을 경계하는 셀레스틴의 눈에서 여전히 남아있는 반감을 느꼈다. 씁쓸하게 웃은 아네트가 손을 뻗어 셀레스틴의 손을 조심스레 잡았다. 그녀가 흠칫하며 이를 뿌리치려는 순간, 아네트가 중얼거렸다.



“어쨌든 나 때문에 괴로웠다니 마음이 안 좋네요. 그게 설령 오해라 할지라도, 당신이 겪은 힘든 시간들에 대해선 정말 유감이에요. 부디 하루빨리 당신이 그 악몽들을 이겨낼 수 있길 바라요. 당신은 본디 강한 사람이니, 할 수 있을 거예요.”



진심 어린 아네트의 말에 셀레스틴의 눈동자가 떨렸다. 자신의 손을 잡은 아네트의 손등 위엔 아까 깨물어서 빨갛게 남은 이빨 자국이 보였다. 제법 아플 텐데, 아네트는 이를 전혀 신경 쓰는 기색이 아니었다. 다정하게 셀레스틴의 손등을 다독인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약속대로 난 이제 사라져 줄게요. 셀레스틴, 당신은 그냥…… 잠깐 나쁜 꿈을 꾼 것뿐이에요. 그러니 오늘 일은 잊어 주세요. 알겠죠?”



아네트가 꼭 암시라도 걸듯이 낮게 속삭였다. 이를 들은 셀레스틴이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녀가 뭐라고 입을 열기도 전에, 아네트가 재빨리 노래를 시작했다. 그것도 문밖까지 다 들릴 만큼 선명한 음색으로.



아네트의 능력은 거의 즉효성에 가까운 편이었다. 그녀가 첫 구절을 다 부르기도 전에, 셀레스틴의 몸이 천천히 바닥으로 엎어졌다. 아네트는 그녀가 완전히 잠든 걸 확인한 후에도 약 1분간 더 노래를 부르며 주위 동향을 살폈다.



‘좋아. 다들 잠든 것 같아.’



아네트는 구석에서 곧 깨어날 것처럼 꿈틀대던 신관이 도롱도롱 코를 고는 소리를 들었다. 어수선하던 문밖도 다시 조용해진 걸 보니, 호위들 역시 잠든 모양이었다. 약간의 여유를 되찾은 아네트는 잠든 셀레스틴을 다시 의자 위에 앉혀놓았다. 체구가 비슷한 터라 상당히 힘들었지만, 어떻게든 해냈다.



아네트는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소매로 대충 닦았다. 그리고 품 안에서 깨끗한 손수건을 꺼내, 눈물 자국이 남은 셀레스틴의 얼굴을 조심스레 닦아주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괴로움과 눈물로 일그러져 있던 셀레스틴의 얼굴이 잠 때문에 평온해져서 보기 좋았다.



아네트는 등을 돌려 조용히 문을 밀고 나왔다. 그러자 복도 여기저기에 기대어 잠든 호위들이 보였다. 자세나 위치가 아까와 약간씩 달라진 걸 보아하니, 도로 잠재운 타이밍이 꽤 아슬아슬했던 모양이었다.



‘안 깨어나서 천만다행이야.’



아네트는 발뒤꿈치를 들고 호위들 틈새를 조심조심 걸어 빠져나왔다. 사람 몸 위를 넘어 다니는 기분이 생소했다. 드디어 복도의 모퉁이를 돌기 전, 아네트는 가만히 자신의 품속을 뒤졌다. 그녀가 꺼내든 건 수면향이 약간 남아있는 빈 통이었다.



셀레스틴의 호위들이 잠시 후 깨어나면, 가장 먼저 고용주의 안위부터 확인할 게 틀림없었다. 하지만 참회실 안의 셀레스틴이 멀쩡하다면? 그다음으론 아마 상황 파악에 들어갈 터였다. 분명 신관과 얘기했던 것까진 기억하는데, 그 후 자신들이 왜 잠들었었는지 고민하겠지.



아네트가 굳이 빈 수면향 통을 준비해 온 이유는 바로 그것 때문이었다.



‘내 능력을 들키면 안 돼.’



아네트는 자신이 회귀자라는 사실도, 그래서 특수한 능력이 생겼다는 사실도 알려지길 원치 않았다. 이 능력은 매우 유용하긴 했지만 분명 한계가 있었다.



만약 아네트가 노래를 시작하기 전, 누군가가 재빨리 달려들어 그녀의 입을 틀어막는다면? 굳이 그럴 필요 없이 자신의 귀를 스스로 막아버리기만 해도 아네트의 능력은 통하지 않았다. 고로 이 능력은 오직 ‘상대방이 모를 경우’를 전제로 해야만 효과적으로 쓸 수 있었다.



모처럼 얻은 능력을 세상에 까발려서 무용지물로 만드는 건 멍청한 짓이었다. 그래서 아네트는 자신의 범죄 현장을 약간 위조하기로 했다.



‘바닥에서 이 빈 통을 발견한다면…… 자신들이 수면향을 들이마셨다고 생각하겠지.’



참회실 복도 귀퉁이에 슬그머니 빈 병을 굴려 넣은 아네트가 신전 밖으로 나왔다. 해가 기울어져 감에 따라, 신전의 가을 제례는 흥이 잔뜩 올라있었다. 신관들이 직접 담근 포도주를 마신 참배객들은 모두 얼큰하게 취해 있었다.



아네트는 별 어려움 없이 그들 사이를 지나, 아무도 없는 묘지까지 다다를 수 있었다. 역시 들어가는 게 어렵지 나오는 건 쉬웠다. 처음에 라일린과 만났던 묘실로 들어가자, 그 안에 아네트의 옷가지들이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이를 갈아입은 아네트는 벗은 신관복과 가면을 잘 챙겨 천으로 둘둘 말아서 집어 들었다. 이제 집에 가 이것들을 태워버리기만 하면 완전 범죄였다.



이제 라펠이 기다리고 있는 저택으로 되돌아갈 시간이었다. 묘지를 떠난 아네트는 미리 대기하고 있던 마차를 탔다. 비록 생각해 봐야 할 것들은 많았지만, 셀레스틴을 만난다는 목적 자체는 달성했다. 아네트는 그것만으로도 한결 마음이 가벼워진 느낌이었다.



‘내가 이렇게 간이 클 줄은 미처 몰랐는데.’



아네트는 자신의 낯선 모습을 발견하고 약간 생소함을 느꼈다. 그녀라고 아무 생각 없이 무모하게 잠입한 게 아니었다. 좋든 싫든 아네트 또한 ‘푸른 피의 바이에른’이었다. 알라만드의 딸로 자란 이상, 아네트에게도 냉정하게 사고하고 철저하게 계획을 짜는 능력이 있단 뜻이었다.



어차피 셀레스틴의 호위들은 가면을 쓴 아네트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고로 자신들이 잠들기 전 만났던 신관을 의심하겠지만, 오늘은 하필 가을 제례날이었다. 오데사 르이 신전은 제법 규모가 큰 곳이었고, 성스러운 제례를 위해 가면을 쓴 신관만 열댓 명이 족히 넘어갔다. 그러니 그들은 절대 아네트를 찾지 못할 것이다. 애초에 그녀는 신관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셀레스틴이 내 얘길 꺼낸다면 일이 좀 복잡해지겠지.’



최악의 경우, 셀레스틴이 자신을 침입자로 고발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 경우까지도 이미 계획에 넣어놓았다. 아네트의 얼굴을 본 유일한 사람은 셀레스틴 뿐이었다. 설령 그녀의 고발에 의거하여 조사가 들어온다 해도 상관없었다. 아네트는 이미 라일린을 통해 완벽한 ‘알리바이’를 준비해 놨으니 말이다.



라일린이 미리 찾아 놓은 아네트의 대역은 제법 그럴싸했다. 그녀와 체형도, 분위기도 꽤 많이 닮아서 가발만 씌워놓으면 여지없는 아네트였다. 물론 아네트를 잘 아는 사람이 가까이에서 본다면 금방 들통나겠지만…… 그럴 일은 없을 터였다. 아네트는 오늘 ‘뱃놀이’를 한 거로 되어있으니 말이다. 그 누가 호수 위의 배에 앉아 있는 아네트를 가까이에서 살펴볼 수 있겠는가?



고로 셀레스틴이 자신을 고발한다 한들, 증거 부족으로 망신만 당할 터였다. 작은 배 위에서 양산을 쓰고 하루종일 뱃놀이를 한 ‘아네트’를 본 사람은 꽤 많을 테니까. 오히려 이 고발을 역으로 받아치면 셀레스틴 쪽이 더 큰 피해를 볼 게 뻔했다. 그녀는 최근 사교계에서 평판이 썩 좋지 않았으니 말이다.



‘이렇게 보니 나도…… 바이에른 가 사람이 맞나 봐.’



아네트는 허허롭게 웃었다. 지금 자신이 갈아입은 옷도 대역이 뱃놀이를 하며 입었던 복장과 똑같았다. 이로써 아네트의 알리바이는 말 그대로 완벽해졌다. 만약 라펠이 자신의 이런 모습을 보면 진저리를 칠 게 틀림없었다. 그는 바이에른 가 특유의 계략을 소름 끼치도록 싫어했으니 말이다.



생각에 잠긴 아네트는 문득 라펠의 눈동자를 떠올렸다. 매처럼 날카롭고 우아한 눈썹 밑에 자리한 그 눈동자는 꼭 겨울 바다처럼 새파랬다. 그래서 그 눈이 자신을 차갑게 바라볼 때면 살갗이 베이는 것처럼 아팠다. 바이에른이 싫다, 그래서 네가 싫다고 말하던 라펠의 눈빛을 떠올리자 가슴이 싸하게 아려왔다.



마차의 벽에 머리를 기댄 아네트는 가만히 눈을 내리감았다. 하루빨리 오스란드로 가서 자신이 이주하게 될 마을을 직접 눈으로 보고 싶었다. 서로 원하는 부부 관계가 극명하게 다르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자신을 싫어하는 남자가 있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쓸쓸했다.









저택에 들어선 아네트는 1층의 응접실과 식당 쪽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하지만 라펠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고개를 갸웃한 아네트가 마침 지나가는 하녀를 붙잡고 물었다.



“혹시 그이를 보았니?”



“주인님께선 아직 왕궁에서 돌아오시지 않으셨습니다, 마님.”



공손하게 허리를 숙인 하녀가 대꾸했다. 이에 아네트는 고개를 끄덕이며 위층으로 올라갔다. 라펠이 오늘 왕의 부름을 받고 왕궁에 갔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 덕분에 아네트의 신전 잠입 계획도 라펠의 눈치를 볼 필요 없이 원활하게 잘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이 시간까지 아직 돌아오지 않았을 줄이야.



아네트는 왕이 대체 라펠과 무슨 대화를 하는지 궁금했다. 그가 자신의 사생아인 라펠을 아끼는 건 좋은 일이었다. 왕의 총애란 그 자체만으로도 권력이나 다름없었으니 말이다. 덕분에 혈통을 중시하는 델티움 귀족들도 쉬이 라펠을 무시하지 못했다. 하지만 아네트는 왕의 애정 방식이 이상하다고 느꼈다.



‘그래도 루드비히 전하와 라펠을 비교하는 건 그만두셨으면 좋겠는데.’



아네트는 아직도 상처받은 루드비히의 비참한 얼굴을 기억했다. 섬세한 구석이 있는 그는 배다른 형제인 라펠과 비교당하는 걸 견디지 못했다. 특히나 루드비히 본인이 몸 쓰는 일과 거리가 먼 몸치였기 때문에 더욱 상처받곤 했다.



하지만 셀그라티스 왕은 그런 루드비히의 나약함마저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는 혀를 쯧쯧 차며 루드비히의 앞에서 대놓고 ‘라펠이 적자였어야 했는데.’ 따위의 말을 내뱉곤 했다. 덕분에 라펠을 향한 루드비히의 감정은 꽤 복잡했다.



여기에 그의 약혼녀였던 아네트가 하필 라펠과 결혼하게 되었으니…… 감정이 악화되는 건 당연했다. 아네트는 이제 루드비히에겐 아무 감정도 없었지만, 그의 울 것처럼 일그러진 얼굴만큼은 생생히 기억했다. 그는 분명 라펠을 증오하고 있었다.



‘그럼 라펠은…… 루드비히 전하를, 그리고 셀그라티스 폐하를 어찌 생각할까?’



아네트는 문득 남편의 입장이 궁금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