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아, 머리야…… 제가 잠들었었나요, 루이즈 신관님?”
셀레스틴은 바로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녀는 편두통이 있는 듯 왼쪽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엉뚱한 소리를 했다. 눈앞의 아네트를 자신이 몇 분 전까지 상담했던 딴 신관으로 착각한 모양이었다. 아네트가 신관복을 입고 있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아네트는 약간 떨리는 손을 억누르며 침착하게 쓰고 있던 가면을 벗었다. 그러자 아네트를 올려다보는 셀레스틴의 눈이 점점 커졌다. 그녀는 거의 숨 쉬는 것조차 잊고 아네트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충격 받은 얼굴을 보며 아네트는 알 수 없는 희열을 느꼈다. 천천히 셀레스틴의 맞은편에 앉은 아네트가 고개를 기울이며 상냥하게 웃었다.
“오랜만이네요. 레이디 셀레스틴. 아니, 이제는 미래의 왕세자비 전하…라고 불러드려야 할까요?”
“당, 당신이 어떻게 여길…… 이게 대체 무슨 짓이에요?! 나, 나에게 또 무슨 짓을 하려는 거죠?”
아네트는 그녀의 말에 의아함을 느꼈다. ‘또’ 무슨 짓을 하려는 거냐고? 맹세컨대 아네트는 셀레스틴에게 그 어떤 짓도 한 적이 없었다. 그랬기에 오히려 셀레스틴이 납치 자작극을 벌여 자신에게 누명을 씌운 거라고 추측했다. 자신을 피했던 것도 셀레스틴이 양심의 가책을 느꼈거나, 자신의 자작극을 들킬까 봐 두려워서일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눈앞의 셀레스틴은 꼭 자신이 완벽한 피해자라도 되는 것처럼 굴었다. 겁에 잔뜩 질린 눈을 한 셀레스틴이 몸을 덜덜 떨며 정신없이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의자에 앉아 있던 몸인지라 하마터면 뒤로 벌렁 넘어질 뻔했다. 아네트는 미래의 왕세자비 뒤통수를 깨트린 원인이 되는 건 사양이었으므로, 일단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진정해요, 셀레스틴. 이러다 다치겠어요.”
그러나 아네트의 손이 와 닿자, 셀레스틴이 반쯤 경기를 일으키며 이를 뿌리쳤다. 아무래도 역효과인 모양이었다. 다행히 머리가 깨지진 않았지만, 셀레스틴은 그 대신 쾅! 소리가 나게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아픔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처럼 바닥을 기어 도망치려 들었다.
“손, 손대지 말아요!! 나에게서 떨어지란 말이에요!! 대체 왜 이러는 거예요? 예전에 한 짓으로는 모자라요?? 거기 밖에, 밖에 누구 없어요?! 도와줘…… 읍읍!!”
셀레스틴이 고함을 지르려 들자, 아네트는 황급히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 예상치 못한 셀레스틴의 격렬한 거부에 놀라 심장이 쿵쿵 뛰었다. 다행히 셀레스틴의 입을 제때 막은 아네트는 잠시 귀를 기울여 바깥의 동향을 살폈다. 딱히 바깥의 호위들이 깨어난 것 같진 않았다.
“흐으읍!! 읍읍!!”
아네트에게 입을 틀어막힌 셀레스틴이 있는 힘껏 발버둥을 쳤다. 어차피 둘은 몸집이 비슷한지라, 아네트는 그녀를 힘으로 찍어 누를 순 없었다. 여기에 셀레스틴이 너무 흥분해서 이대로라면 대화 자체가 불가능할 것 같았다. 아네트는 최대한 부드러운 어조로 셀레스틴을 진정시키려 노력했다.
“쉿, 난 당신에게 무슨 짓을 하러 온 게 아니에요. 셀레스틴. 그냥 당신과 딱 5분만, 단둘이서 얘기할 시간이 필요했을 뿐이에요. 그러니 진정하고 내 질문 하나에만 대답해 줄래요? 그럼 곧바로 이곳을 떠날게요. 정말이에요.”
“으읍! 읍! 으으읍!!!”
그러나 셀레스틴은 이를 쉬이 믿으려고 하지 않았다. 뭐, 그녀의 입장에선 당연한 일이었다. 옛 납치범이 갑자기 신전에 난입해 딴 사람들을 무력화시키고, 대화만 하자는데 그 누가 믿겠는가? 지능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니고서야 의심하는 게 마땅했다.
잔뜩 흥분한 셀레스틴이 소매 너머로 아네트의 손을 깨물며 버둥거렸다. 비록 장갑을 끼고 있긴 했지만, 이렇게 꽉 깨물리면 아팠다. 셀레스틴이 이렇게까지 발작에 가까운 반응을 보일 줄 몰랐던 아네트는 내심 당황했다. 그녀는 얼른 머리를 굴려 셀레스틴을 진정시킬 만한 미끼를 떠올렸다.
“잠시만 내 얘길 들어줘요, 레이디 셀레스틴. 오데사 여신님의 이름에 걸고 맹세할게요. 난 당신에게 어떠한 해도 끼치지 않을 거예요. 자, 보세요. 저 또한 당신처럼 여신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이랍니다.”
아네트가 속으로 ‘빛나라!’라고 생각한 후, 뱅글을 이용해 손에서 환한 빛을 내뿜었다. 오늘 이래저래 잘 써먹고 있는 아티팩트였다. 그 신성한 빛을 본 셀레스틴의 버둥거림이 멈추었다. 역시나 모태 신앙인인 셀레스틴에겐 이런 방법이 가장 효과적이었다. 그녀는 반신반의하는 눈빛으로 고심하더니, 꽉 깨물었던 아네트의 손을 놓아주었다.
“고마워요, 레이디 셀레스틴. 그럼 이제 손을 뗄게요. 당신을 절대로 해치지 않을 테니까 소리 지르지 말아줘요. 질문 하나만 하고서 전 곧바로 돌아갈 거에요.”
셀레스틴이 덜덜 떨면서도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네트는 여차하면 그녀의 입을 다시 틀어막을 작정으로 천천히 자신의 손을 치웠다. 그 바람에 셀레스틴의 이에 걸린 장갑 한쪽이 벗겨졌다. 아네트는 이를 흘끗 쳐다보긴 했지만, 굳이 줍진 않았다. 일부러 출처를 특정할 수 없는 양산형 장갑을 끼고 왔으니 버려도 상관없었다.
손을 뗀 아네트는 주의 깊게 셀레스틴의 반응을 살폈다. 그녀는 비명을 지르는 대신, 파랗게 질린 얼굴로 이를 꽉 악물었다. 두려움을 애써 참으려는 기색이 역력한 표정은 꾸며낸 것 같지 않았다. 이를 본 아네트는 정말로 혼란스러워졌다.
“……알고 싶은 게 뭔데요?”
셀레스틴이 쉰 목소리로 말했다. 얼른 그 질문인지 뭔지에 답한 후, 아네트를 보내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이를 본 아네트가 조심스레 말문을 열었다.
“고마워요. 음…… 당신에게 꼭 확인하고 싶은 게 있어요. 그날, 당신이 납치되었던 그 사건 말이에요. 전 사실 당신이 제 마부를 매수해서 자작극을 꾸민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지금 당신의 행동을 보니 생각이 좀…….”
“뭐라고요? 지금, 내 자작극이라고 했어요?!”
아네트의 조곤조곤한 말소리를 듣던 셀레스틴이 도중에 말을 끊었다. 그녀는 어찌나 기가 막혔던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지고 있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무서워서 덜덜 떨더니, 그 공포심이 죄 분노로 변한 모양이었다. 잔뜩 흥분한 셀레스틴의 가녀린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내가 그날 이후로……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요? 바람결에 낯선 남자의 목소리만 들려도 심장이 쿵 내려앉는 기분, 알기나 해요? 그토록 익숙한 집에 있는데도 난 가끔 소스라치게 놀라며 주위 가구들을 뒤져보곤 하죠. 혹시 누군가가 숨어있을까 봐. 하물며 밖에 나가는 일조차도 힘들어서, 난… 정말이지 너무 힘들어서…….”
격양된 어조로 빠르게 쏘아붙이던 셀레스틴의 목소리에 불현듯 흐느낌이 섞였다. 그녀의 얇은 입술이 울음을 참기 위해 잔뜩 일그러졌다. 덕분에 연한 분홍색의 루즈가 앞니에 약간 묻어서 보기 흉했다. 그러나 셀레스틴은 전혀 개의치 않고 눈물이 고인 눈을 부릅뜨며 쏘아붙였다.
“한데 날 이렇게 만든 당신은 정작 결혼해서 잘 산다죠? 난 이렇게 힘든데, 이렇게 하루하루가 불안한데… 왜 당신이 잘 살아? 그 얘길 들으며 내가 얼마나…… 얼마나 힘들었는데!!! 얘기해 봐야 내 얼굴에 침 뱉는 꼴이라 누구에게 말도 못 하고, 여신님께 기도하면서 마음을 좀 가라앉히려 했더니… 당신은 여기까지 찾아와서, 기어이 날……!!”
감정이 폭발한 셀레스틴이 끝내 오열하며 무너져 내렸다. 자신의 가슴을 쥐어뜯고, 머리를 흔들며 우는 그녀의 모습은 너무나 고통스러워 보였다. 이를 본 아네트는 충격 때문에 머리가 멍해지는 기분이었다.
물론 셀레스틴이 작정하고 자신을 속이려는 것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보이는 모습은 도저히 그런 것 같지 않았다. 그녀가 토해내는 감정들은 너무도 생생한 날것이어서, 지켜보는 아네트 쪽이 기가 다 질리는 느낌이었다.
뭔가가 잘못된 게 확실했다. 아네트는 자신의 가설들을 차근차근 되짚어 보았다. 그녀는 최근 이상했던 셀레스틴의 행보가 자신을 피하기 위함이라고 생각했었다. 만약 셀레스틴이 왕세자비가 되려고 납치 자작극을 벌인 게 사실이라면, 누명을 씌운 자신과 마주하기 껄끄러울 테니까. 죄책감과 찜찜함 때문에라도 자신을 피하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그게 사실…… 납치 트라우마 때문이었나?’
셀레스틴을 진범으로 가정하고 있던 아네트로선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셀레스틴의 지난 행적들을 충분히 설명 가능한 사유이기도 했다.
셀레스틴이 기껏 왕세자비 자리에 낙점되고도 사교 활동을 기피했던 이유. 그리고 종교에 더욱더 의존하며 신전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었던 이유. 이 모든 게 납치 트라우마로 인한 후유증 때문이라면 그럴싸했다.
아네트는 너무 혼란스러워서 발밑이 다 아득해지는 느낌이었다. 셀레스틴이 무고하다는 선택지도, 그녀가 범인인데 뻔뻔스레 연기를 한다는 선택지도 다 정황상의 가설일 뿐이었다. 불행히도 아네트에겐 어느 쪽이 사실인지를 가릴 ‘진짜’ 증거가 없었다. 그래서 섣불리 이 자리에서 판단을 내릴 수가 없었다.
‘좀 더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
어차피 지금은 한가롭게 판결 놀이나 할 때가 아니었다. 아네트는 의자에서 쿨쿨 잠들어 있던 신관이 꿈틀거리는 것을 발견했다. 아마 셀레스틴의 울음소리를 듣고서 깨어나려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밖의 호위들도 비슷한 상황일 터였다. 안 그래도 문밖이 조금씩 어수선해지는 듯해 초조해졌다.
아네트는 바닥에 웅크려 흐느끼는 셀레스틴의 정수리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그녀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가까이 다가온 아네트에게 놀란 셀레스틴이 눈물범벅이 된 얼굴을 들었다. 그 순간, 두 여자의 눈이 처음으로 마주쳤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아네트가 진심을 담아 작게 속삭였다.
“미안해요, 셀레스틴. 난 당신이 그렇게 괴로워하는 줄도 모르고…… 이 모든 게 당신이 꾸민 일이라고 의심했어요. 하지만 당신이 결백하듯, 나 또한 결백해요. 여신의 이름으로 맹세컨대, 난 절대로 당신의 납치를 사주한 적 없어요. 만약 내가 한 짓이었다면 이렇게 위험을 무릅쓰고 당신을 만나러 숨어들어오진 않았을 테죠. 안 그래요?”
말을 마친 아네트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생각나는 말은 다 했는데, 셀레스틴에게 제대로 전달되었을 진 의문이었다. 셀레스틴은 불안정한 호흡을 내쉬며 젖은 눈으로 아네트를 노려볼 따름이었다. 아네트의 말을 믿을지, 말지 갈등하는 기색이 역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