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인파에 둘러싸인 아네트는 두리번거리며 라일린을 찾았다. 그라면 자신을 어떻게든 이 곤경에서 빼내 줄 것 같았다. 하지만 라일린은 어느새 시야에서 사라져 버리고 없었다. 그를 놓쳐버렸나 싶어 불안감에 가슴이 선뜩했다. 바로 그때, 누군가가 아네트의 팔을 턱! 하고 움켜쥐었다.
“여기 있었군요! 한참 찾았잖아요. 제례가 곧 시작되는데 아직까지 여기 있으면 어떡해요?”
……뉘신지? 아네트의 동공이 지진을 일으켰다. 그녀와 같은 신관복을 입은 사람이 자신을 아는 체하고 있었다. 처음엔 라일린인가 싶었으나, 가면 너머로 들려오는 신관의 목소리는 중년의 여인이었다. 아네트는 그녀가 자신을 다른 신관과 혼동한 게 틀림없다는 생각을 했다.
‘말을 하면 안 돼. 목소리를 들으면 들킬 거야.’
아네트는 일부러 죄송하다는 듯 고개를 푹 숙이고 그녀가 이끄는 대로 따라갔다. 여신관 덕분에 바글바글 몰려든 인파에게서 벗어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녀는 아무래도 오데사 르이 신전에서 제법 높은 신관인 모양이었다. 그녀가 가는 곳마다 신도들뿐 아니라, 일반 참배객들마저도 양옆으로 갈라져 길을 터 주었다.
아네트는 그녀가 자신에게 말을 걸까 봐 심장이 쿵쿵 뛰었다. 자신의 팔을 잡은 그녀의 손에 심장박동이 들리는 게 아닐까, 싶어 걱정될 지경이었다. 다행히 신관은 아네트에게 그 어떤 질문도 던지지 않았다. 언제 친근하게 말을 걸었냐는 듯, 그녀의 가면 안쪽으론 침묵만이 흘렀다.
아네트는 그녀 덕에 손쉽게 신전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내부에도 사람은 제법 많았지만, 그나마 ‘선택받은 신도’들만 들어올 수 있는 모양이었다. 모퉁이를 돌아 사람이 없는 곳까지 온 신관이 아네트의 팔을 놓아주었다.
‘이제 어떡하지?’
아네트는 그녀를 마주 본 채 긴장했다. 제례를 올려야 한다며 자신을 끌고 왔는데, 아네트는 신관이 아니었다. 당연히 제례 따윈 할 줄 몰랐다. 여기서 정체가 들통난다면 아네트의 인생은 말 그대로 끝이었다. 그녀가 바짝 긴장하여 쳐다보자, 신관이 갑자기 손을 들어 올렸다.
아네트는 혹 맞는 건가 싶어 움찔했다. 몰래 잠입한 죄가 있었기에 당연한 행동이었다. 하지만 신관이 손을 든 건 그저 자신이 낀 반지를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아네트는 처음엔 어리둥절했지만, 곧 그녀가 낀 반지를 알아볼 수 있었다.
“당신……!”
최고급 자수정에 금박으로 ‘S’라는 알파벳이 새겨진 반지는 아네트도 갖고 있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눈앞의 신관 또한 세크리트 길드 소속인 모양이었다. 주위를 둘러본 신관이 목소리를 낮춰 아네트에게 속삭였다.
“쉿, 고객님께서 요청하신 내용은 어디까지나 ‘신전에 잠입하게 해 달라.’였지요? 이걸로 의뢰 내용은 완료되었습니다. 그 후의 일들은 오롯이 고객님의 손에 달렸습니다. 아무쪼록 몸조심하시길.”
여자의 말투는 몹시 사무적이었다. 아네트는 그녀가 정말로 이중 직업을 병행하는 신관인지, 아니면 자신처럼 신관인 체하는 세크리트 길드원인지 궁금해졌다. 하지만 여자는 아네트가 질문할 겨를도 없이 등을 돌리고 가 버렸다.
홀로 남겨진 아네트는 조심스레 주위를 살폈다. 복도의 모퉁이 너머로 눈을 빼꼼 내밀자, 저 멀리 ‘제2 예배실’이라는 팻말이 보였다. 미리 챙겨온 오데사 르이 신전의 약도를 꺼낸 아네트가 길을 되짚어 보았다.
‘이곳에서 오른쪽으로 꺾고… 복도를 두 개쯤 가로질러…… 왼쪽에서 세 번째 방이구나.’
라일린이 알려 준 정보에 의하면, 셀레스틴 키어스는 모태 신앙인이었다. 그녀는 신전을 찾을 때마다 ‘루이즈’라는 신관과 독대를 하곤 했다. 자신을 어릴 적부터 이끌어 준 신관에게 참회도 하고, 고민도 털어놓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 장소는 최근 귀빈용 참회실로 바뀌었다. 왕족에 준하는 귀한 신분만이 사용할 수 있는 곳이었다.
‘하긴, 자신의 신도 중 왕세자비가 나오게 생겼으니. 오데사 르이 신전에선 응당 셀레스틴을 잘 대접해야겠지.’
아네트는 그녀가 훗날 왕비가 되면, 오데사 여신을 모시는 신전들에 꽤 특혜가 주어질 것이라 예상했다. 하지만 이는 아네트가 알 바는 아니었다. 그녀가 알고 싶은 건 오직 하나뿐이었다. 바로 진실. 셀레스틴은 과연 납치 자작극을 벌여 자신을 몰락시킨 장본인일까, 아닐까.
아네트는 남들의 눈에 띄지 않게 조심스레 복도를 지났다. 중간중간 지도를 보며 길을 나아가자, 어느덧 원하는 곳까지 도달했다. 하지만 왼쪽으로 꺾는 순간, 아네트의 눈이 커졌다. 참회실들이 죽 늘어선 복도 전체가 봉쇄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무려 셀레스틴의 호위들로 말이다.
“누구냐!”
딱 보기에도 열댓 명은 족히 되어 보이는 호위들이 날 선 눈빛으로 이쪽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신관복을 입은 아네트를 본 순간, 그들의 살기가 조금 누그러졌다. 책임자로 보이는 중년의 남자가 앞으로 나오더니 아네트에게 물었다.
“오데사 여신님을 모시는 신관이시군요. 이곳엔 무슨 용무로 오셨습니까?”
“아, 죄송합니다. 저는 신도분과 이곳에서 만나기로 약속이 되어있어서…… 실례지만 여기가 참회실 구역 아닌가요?”
가면 너머로 들려오는 아네트의 목소리는 꼭 카나리아처럼 가냘팠다. 실제로 신관복 너머로 드러난 체형도 아담하고 마른 편이었기 때문에, 여차하면 힘으로 제압하기 쉬울 것 같았다. 하지만 호위는 경계심을 늦추지 않고 웃는 얼굴로 아네트를 추궁했다.
“저런. 이 구역은 늘 일정한 날, 일정한 시간대에 사용이 금지되어 있습니다만. 가면까지 쓰신 걸 보니 제례에 참여하는 사제님이시로군요. 근데도 관련 내용에 대해 전혀 들으신 바가 없습니까?”
아무래도 셀레스틴의 안위를 위해 그녀가 방문하는 시간대엔 참회실 전체를 봉쇄하는 모양이었다. 가면에 가려진 아네트의 얼굴에 낭패감이 떠올랐다. 하지만 여기에서 물러설 순 없었다. 마음을 굳힌 아네트가 차분한 목소리로 거짓말을 했다.
“아, 저런. 아직 시간이 다 지나지 않은 모양이지요? 제가 신도분을 걱정하는 마음이 앞서다 보니, 너무 일찍 도착한 모양입니다. 귀하신 분의 일정에 방해가 된 듯하여 죄송합니다.”
아네트가 금방이라도 돌아서서 갈 것처럼 머리를 꾸벅 숙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위는 한 발짝 다가서며 그녀를 이리저리 살폈다. 눈으로 아네트의 가면을 훑는 걸 보니, 아무래도 벗어 보라고 할 것 같았다. 얼굴을 들킬 수 없었던 아네트는 재빨리 임기응변을 발휘하기로 했다. 속으로 ‘빛나라!’라고 생각한 아네트가 뱅글의 힘으로 성력 비슷한 빛을 만들어냈다.
“그러고 보니 추수 제례인데도 불구하고, 독실한 여신의 양들께 축언 한 마디 못 내려드렸군요. 괜찮다면 고개를 숙여 주시겠습니까?”
아네트의 손에 어린 빛을 본 호위가 경계심을 약간 누그러트렸다. 저런 성력은 아무나 만들어 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는 아네트가 꽤 높은 지위의 신관일 거라 추측했고, 당연히 그 신원 또한 확실하리라 믿었다. 그렇다면 굳이 가면을 벗어 보라고 할 필요까진 없었다.
“감사하지만 다음 기회로 미루겠습니다. 보시다시피 지금은 근무 중이라서요. 시간을 착각하신 것 같은데, 이만 돌아가 주십시오. 신관님.”
말을 끝마친 호위가 팔짱을 끼고 아네트를 내려다보았다. 그녀가 복도 너머로 사라질 때까지 눈을 떼지 않을 기세였다. 하지만 아네트는 이대로 곱게 꺼져 줄 마음이 없었다. 고작 이러려고 위험을 무릅써 가며 이곳까지 온 게 아니었다. 최근 대외활동을 기피하는 셀레스틴과 어떻게든 단둘이 마주하려면 이 방법밖에 없었다.
“잠깐만요. 축언을 받을 수 없다면, 여신님을 위한 찬가라도 들어 주세요. 모처럼의 가을 제례니까요.”
말을 마친 아네트는 호위가 거절할 틈조차 없이 노래를 시작했다. 이렇게 많은 사람을 재우는 건 처음인지라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그나마 장소가 좋아서 다행이었다. 그녀의 맑고 고운 목소리는 좁은 복도에 가득히 울려 퍼졌다.
곧이어 열댓 명에 달하는 호위들이 하나둘 눈을 감고서 바닥에 엎어졌다. 노래를 끝마친 아네트가 슬그머니 발로 쓰러진 호위의 몸을 툭 건드려 보았다. 능력이 발휘된 직후라 그런지, 호위는 끙 소리를 내면서도 계속 잠들어 있었다.
아네트는 서둘러 그들의 몸 위를 조심조심 타 넘으며 참회실로 향했다. 멀쩡한 사람을 억지로 재웠을 경우, 그 효과는 약 5분 정도밖에 유지되지 않았다. 시간이 얼마 없었다.
‘여기야. 셀레스틴은 아마 이 안에 있을 거야.’
특별한 귀빈을 위해 마련된 세 번째 참회실은 문고리부터 화려한 금박이었다. 아네트는 신의 사자인 독수리 모양으로 조각된 손잡이를 잡아당겨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자 방 중앙에 원목으로 된 테이블이 눈에 들어왔다. 그 위엔 두 명의 여인이 엎드린 채 잠들어 있었다. 혹 참회실 안에 있는 사람들에겐 능력이 안 들었을까 봐 걱정했는데, 다행히 방음이 그리 완벽하진 못한 모양이었다.
아네트는 어렵지 않게 셀레스틴 키어스의 다갈색 머리카락을 알아보았다. 아마 그녀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다른 여자는 ‘루이즈’라는 신관일 터였다. 아네트는 신관이 앉아 있는 의자를 질질 끌어 구석에 떨어트려 놓았다. 능력을 쓰긴 했지만, 바로 옆에서 큰 소리가 나면 깰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루이즈란 신관은 비쩍 마른 편이라서 아네트의 힘으로도 옮길 수 있었다. 이로써 모든 ‘대화 준비’를 끝마친 아네트가 손을 뻗어 셀레스틴의 어깨를 흔들었다.
“으으음…….”
셀레스틴의 눈꺼풀이 파르르 경련하는가 싶더니, 갈색 속눈썹 밑으로 진녹색 눈동자가 조금씩 그 모습을 드러냈다. 이를 본 아네트가 상냥하게 웃었다. 드디어 본격적인 대화의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