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꺄아아악!!!”
아네트는 말 그대로 기절할 듯이 놀랐다. 묘실 안 조각상이 움직이다니! 불법 침입에 분노한 여신님께서 천벌을 내린 게 틀림없었다. 비명을 지른 아네트가 뒷걸음질을 치다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너무 놀라서 눈앞이 새하얘지고, 다리에 힘이 풀려 서 있을 수가 없었다.
이 와중에도 뻣뻣한 걸음걸이로 다가온 조각상이 아네트를 향해 허리를 굽혔다. 머리 위로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듯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아네트는 너무 놀라 눈물을 뚝뚝 흘리며 겁에 질린 눈으로 조각상을 올려다보았다. 그 순간, 그녀를 굽어보던 조각상의 입에서 맑은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하하핫! 미안합니다, 고객님. 제가 그만 장난이 과했나 보군요.”
약간 허스키하면서도 색정적인 그 목소리는 색으로 따지면 루비처럼 붉은 느낌이었다. 이제 제법 익숙해진 목소리를 못 알아들을 리가 없었다. 아네트는 얼떨떨한 눈으로 조각상을 바라보았다.
“라, 라일린 씨?”
처음엔 어두워서 잘 몰랐는데, 지금 보니 라일린의 얼굴이 확실했다. 아네트는 진심으로 그의 화려한 머리통 속에 무슨 생각이 담겨있는지 궁금했다. 아니, 대체 누가 이런 음산한 묘실에서 조각상으로 분장해 기다린단 말인가? 아네트는 진심으로 간 떨어지는 줄 알았다. 그녀가 자신을 알아보자, 라일린이 청동색 안료를 잔뜩 칠한 얼굴로 씩 웃었다.
“이거 죄송합니다. 제 딴에는 꽤 의욕적으로 분장한 건데, 그렇게까지 놀라실 줄은 몰랐군요.”
“당연히 죄송해야지요! 진짜로 심장 마비 오는 줄 알았다고요.”
놀람이 가라앉자 그 빈자리를 채운 건 화였다. 태어나서 이렇게 놀라 본 적이 없었던 아네트는 그녀답지 않게 뾰족한 눈빛을 했다. 하지만 그 눈꼬리에선 아직도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어서 별다른 위협이 되진 않았다. 처음으로 아네트의 이런 모습을 본 라일린의 미소가 짙어졌다.
‘귀여운데.’
라일린이 아는 그녀는 늘 차분하고 귀족적인 모습이었다. 흠잡을 데 없는 고상함. 속을 알 수 없는 모호한 미소. 아마도 그게 아네트의 대외용 얼굴일 터였다. 라일린은 그녀의 우아한 가면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비록 뒷세계에서 위험한 길드를 운영하는 입장이었지만, 그의 취향 자체는 대단히 고급스러웠으니까.
하지만 지금, 바닥에 주저앉아 울먹이는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는 아네트의 얼굴도 자극적이었다. 좀 더 날것에 가까운 본질적인 느낌. 라일린은 괜스레 그녀의 본성을 엿본 듯한 느낌에 오싹오싹해지는 걸 느끼며 웃었다. 역시 자신은 어찌할 도리 없는 변태인 모양이었다.
태연하게 신사의 가면을 뒤집어쓴 라일린이 손을 내밀었다.
“사과는 나중에 드리도록 하죠. 시간이 얼마 없어서요. 자, 이제 일어나시지요. 고객님.”
그의 손을 잡고 일어난 아네트가 얼른 뺨에 남은 눈물을 닦았다. 순식간에 그녀의 얼굴이 평상시의 차분함을 되찾았다. 그러나 아네트의 목소리는 아직까지 뾰로통한 질책을 담고 있었다.
“두 번 다신 그러지 마세요, 라일린 씨. 저는 간이 작다고요. 한 번만 더 이런 짓을 하셨다간, 이 묘실에 제 시체도 같이 묻고서 나가셔야 할 거예요. 아시겠어요?”
“저런, 그건 정말로 곤란하겠군요. 전 몸 쓰는 일에는 별로 소질이 없거든요.”
아네트는 화사하게 웃는 라일린의 얼굴이 얄밉다고 생각했다. 애초에 안료만 칠한 그를 조각상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것도 저 외모 때문이었다. 라일린이 머리가 조금 더 컸다든지, 다리가 짧았다든지, 인간적인 배둘레햄의 소유자였다면 분명 위화감을 느꼈을 텐데. 그런 게 전혀 없어서 더 감쪽같이 속아 넘어갔다.
“장난은 이쯤 하고, 약속한 의복은 준비되었나요?”
“물론이지요. 자, 여기 있습니다. 고객님.”
라일린이 묘실에 놓인 석관 중 하나의 뚜껑을 열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오데사 르이 신관복과 제례용 가면을 꺼내 주었다. 이곳의 신관복은 그 자수가 매우 복잡하여, 모조품을 만든다 해도 쉽지 않았을 터였다. 아네트는 그가 어찌 이렇게 빨리 신관복을 준비했는지 신기하게 생각하며 그것들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곧 표정이 떨떠름하게 변했다.
“아. 관 속에 보관해놨던지라 냄새가 좀 날 겁니다. 양해 부탁드리지요.”
“……네. 괜찮아요.”
아네트는 떨떠름한 얼굴로 대꾸했다. 라일린이 준 신관복은 겉보기엔 깨끗해 보였지만, 옷감에서 묘한 곰팡이 냄새가 났다. 하지만 지금은 투정이나 부릴 때가 아니었다. 아네트는 이 곰팡이가 무엇을 먹고 자랐는지 굳이 생각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묘실 안쪽 방에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저, 어때 보이나요?”
제례용 후드를 쓴 아네트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새하얀 신관복을 입은 그녀의 고아한 얼굴이 어둠 속에서도 별처럼 빛났다. 한발 물러서서 아네트의 모습을 훑어보던 라일린이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가면을 쓰지 않아도 외모 자체만으로 신관보다 더 신관다워 보였다.
“아참, 라일린 씨. 제가 부탁드렸던 ‘알리바이’는 혹시 준비되었나요?”
손에 가면을 든 아네트가 걱정스레 물었다. 그녀는 혹 일이 잘못되어 도망칠 경우를 대비해, 라일린에게 약간의 알리바이 조작을 부탁해 놓았다. 물론 라일린은 그녀의 꼼꼼한 계획성에 감탄하면서 기꺼이 세팅을 해 주었다. 마지막까지 확인을 잊지 않는 아네트의 모습에 라일린이 눈웃음을 치며 대꾸했다.
“물론이지요. 그 누구도 고객님이 이 시간에 이곳에 계시리라곤 생각지 못할 겁니다. 모든 준비는 완벽하답니다.”
“다행이네요. 역시 일 처리가 훌륭하세요, 라일린 씨.”
“이쯤은 해 드려야 델티움 최고의 ‘심부름꾼’이 아니겠습니까? 자, 그럼 이제 출발할까요?”
“네. 전 준비됐어요.”
드디어 쇼 타임이었다. 바짝 긴장한 얼굴을 한 아네트가 제례용 가면을 썼다. 이로써 분장은 감쪽같이 완성되었다. 그러자 라일린이 앞장서서 묘실 밖으로 그녀를 이끌었다. 아네트는 성큼성큼 걷는 라일린의 모습을 뒤에서 바라보았다.
‘저런 모습으로 나와도 괜찮은 걸까?’
얼굴과 몸에 청동색 안료를 듬뿍 칠하고, 고대의 신들처럼 짙은 색 키톤을 입은 라일린의 모습은 눈에 잘 띄었다. 지금이 아직 훤한 오후였기 때문에 더더욱 그랬다.
아네트는 미심쩍은 얼굴로 라일린과 약간 거리를 둔 채 그를 뒤따라 갔다. 괜히 그 때문에 자신도 덩달아 발각될까 봐 두려웠다. 하지만 신전이 가까워지자, 그 두려움도 자연히 옅어졌다.
“뭐죠, 저 사람들은? 왜 저런…… 모습을 하고 있는 거예요?”
아네트는 두리번거리지 않으려고 애쓰며 라일린에게 물었다. 신전 주위는 온통 사람들로 붐비며 왁자지껄했다. 그 사이에 라일린과 비슷한 모습을 한 남자들이 여럿 눈에 띄었다. 아니, 사실 더한 몰골을 한 사람들도 보였다.
고대의 악마들처럼 염소 뿔을 머리에 매달고 눈가를 새카맣게 칠한 남자라든지, 닭 깃털로 만든 새하얀 날개를 가방처럼 멘 여자도 있었다. 그 사이에 있자니 라일린은 일견 평범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녀의 질문을 받은 라일린이 고개를 갸웃하며 되물었다.
“저런. 아까도 절 보고 너무 놀라시길래 생각했었지만, 고객님께선 혹 가을 제례가 처음이신지요?”
“아, 네. 신전과는 딱히 가까운 편이 아니라서요.”
아네트가 솔직하게 고백했다. 델티움 왕국은 딱히 독실한 종교 국가는 아니었다. 물론 신의 존재는 인정하고, 신관 또한 존중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개개인의 신앙 문제로 가면 얘기가 좀 달라졌다.
델티움에선 종교의 자유를 존중했다. 오히려 종교에 너무 의존하면 왕권이 위협받을까 봐 약간 견제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 때문에 믿는 자들은 믿고, 그렇지 않은 자들은 종교에 별 관심 없는 식이었다. 참고로 아네트의 부친인 알라만드는 ‘그렇지 않은 자’에 속했다.
‘오직 나약한 자들만이 신에게 기대는 법이지.’
아네트는 경멸스럽게 말하던 알라만드의 차디찬 입술 움직임을 기억했다. 그가 그렇게 말한다면, 순종적인 딸인 아네트는 이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한 명의 인격체라기보단 알라만드에게 속한 재산에 가까웠으니까.
과거를 회상한 아네트의 표정이 조금 쓸쓸해졌다. 이를 본 라일린이 재빠르게 그녀의 주의를 돌렸다. 다름 아닌 아네트의 손을 덥석 움켜쥐는 방식으로.
“……?”
놀란 아네트가 고개를 들어 라일린을 바라보았다. 그렇게나 몸에 함부로 손대지 말랬는데, 또 이러다니. 아네트가 미간을 찌푸리며 막 뭐라고 나무라려던 찰나였다. 라일린이 그녀의 손목에 웬 은색의 가느다란 뱅글을 하나 끼워주었다.
“이건 눈속임용 팔찌랍니다. 마음속으로 한번 ‘빛나라.’라고 생각해 보세요.”
눈을 초승달처럼 가늘게 뜬 라일린이 그녀를 재촉했다. 아네트는 얼떨떨한 눈으로 손목에 채워진 뱅글을 바라보다, 속는 셈 치고 ‘빛나라!’라고 생각했다. 그러자 놀랍게도 그녀의 손바닥에서 반딧불처럼 은은한 빛이 흘러나오는 게 아닌가! 얼핏 보면 아네트가 꼭 성력을 발현하는 것 같았다.
“잘 사용하셨다가 돌려주십시오. 귀한 거랍니다. 원래 빌려 드리는 물건이 아닌데, 고객님께선 특별한 분이니까요.”
“아, 고마워요. 정말 신기한 팔찌네요. 잘 간수할게요.”
아네트는 고개를 끄덕이며 혹 잃어버릴까 봐 뱅글의 고리를 더 단단히 조였다. 이런 신비한 마법 물품까지 갖고 있다니, 라일린은 가끔 보면 꼭 마법사 같았다. 물론 고대의 마법이 거의 다 사라진 지금에 와서 이런 생각은 말도 안 되는 것이었지만 말이다.
때마침 아네트가 팔찌를 차기 무섭게, 신전 앞마당에 모여있던 사람 몇몇이 그녀에게 다가왔다. 아까부터 아네트를 줄곧 흘끗대던 사람들이었다. 혹 자신이 수상쩍게 보였나 싶어 아네트는 바짝 긴장했다. 하지만 그녀의 부친과 비슷한 연배로 보이는 남자는 공손하게 머리를 조아려 왔다.
“부디 성스러운 여신의 은총을 내려 주시길. 신실한 여신의 종이시여.”
그 순간, 아네트는 이 뱅글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 깨달았다. 목을 가다듬은 아네트가 평소보다 낮은 목소리로 축언을 읊었다. 마치 신관들이 하는 것처럼 엄숙하게 말이다.
“여신의 숨결이 늘 그대와 함께할 것입니다. 독실한 여신의 어린 양이여.”
말을 마친 아네트가 남자의 머리에 손을 얹고 ‘빛나라!’라고 생각했다. 아, 물론 남자가 대머리가 되길 바란다는 뜻은 아니었다. 다행히 아네트의 손에선 아까처럼 빛이 흘러나왔고, 이를 본 주위 사람들이 ‘오오!’ 하는 감탄사를 냈다.
아네트는 축복을 마치고 슬쩍 눈을 굴렸다. 가면을 쓰고 있었기 때문에 마음 놓고 사람들의 반응을 살필 수 있었다. 그럴싸한 연기 덕분에 아네트를 의심하는 자는 딱히 없어 보였다. 그러나 연기를 너무 잘한 나머지 약간의 부작용이 발생했다.
“저도, 저도 축복을 내려 주십시오!”
“내가 먼저야, 비켜!!”
“거 참 줄들 좀 서세요! 새치기하지 말고!!”
순식간에 아네트의 앞으로 긴 줄이 만들어졌다. 아네트는 황망한 눈으로 신전 앞마당을 가로지르는 줄을 바라보았다. 저 사람들에게 하나하나 일일이 축복을 내려줘야 하나? 그랬다간 해가 지도록 이 자리를 못 떠날 기세였다. 거기다 사람들이 이렇게 몰려들어서야, 다른 신관들 눈에 띌까 봐 걱정스러웠다.
한마디로 아네트는 지금 곤경에 빠져버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