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다행히 아네트의 지각은 유칼리의 취업 의욕에 별다른 악영향을 미치지 않은 모양이었다. 고개를 끄덕인 유칼리가 품 안에서 서류를 꺼내며 자신의 경력을 소개하기 시작했다.
“저는 프로바트 왕국에서 9년짜리 의료 아카데미 과정을 수료했습니다. 여기, 제 지도 교수님의 추천서와, 이전 직장이었던 왕립 병원 원장의 추천서도 같이 지참해 왔습니다. 가장 전문적으로 공부한 분야는 지병 및 부인병 분야이며…….”
프로바트 억양이 남은 유칼리의 말투는 외모와 달리 조금 딱딱했다. 그래서인지 그녀의 자기소개는 마치 교사가 학생에게 강연하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아네트는 이미 다 알고 있는 유칼리의 경력을 흥미로운 체하며 경청했다. 굳이 여기서 ‘나, 회귀해서 다 알고 있다.’라는 티를 낼 필요는 없었다. 덕분에 유칼리는 아무 의심 없이 자기소개를 끝마쳤다.
“잘 들었어요. 인상적인 경력이네요, 카윤 씨. 과연 듣던 대로 유능하신 것 같아요.”
아네트가 옛날 의원에게서 받았던 소개장을 내보이며 웃었다. 겁이 많았던 그 남자 의원은 특히나 라펠을 무서워했다. 그래서 두 번 다신 카네시스 저택에 불려오지 않도록 유칼리를 대신 소개해 주고 도망갔다. 아네트는 유칼리를 꼭! 반드시! 고용해 달라던 의원의 절박한 호소를 떠올리며 멋쩍은 눈빛을 했다.
“저어, 마님. 그렇다면 제 고용 여부는…….”
아네트가 잠시 말이 없자, 유칼리의 표정이 좀 더 어두워졌다. 자신이 혹 아네트에게 나쁜 인상을 준 게 아닐까 걱정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아네트는 유칼리의 저런 어설픈 모습이 좋았다. 자신보다 연상이었지만, 어쩐지 세상의 때가 묻지 않아서 챙겨주고 싶은 기분이었다.
‘전생에 나를 잘 돌봐주기도 했고.’
전생의 아네트는 오랜 잔병치레 때문에 성격이 예민했었다. 약한 몸이란 건 무서웠다. 멀쩡하던 사람도 매일 병석에만 누워 있으면 정신이 병들었다. 아네트는 몸이 심하게 아플 때마다 유칼리에게 매달리고, 울고, 토했다. 지금 생각하면 온통 미안한 일들뿐이었다.
전생엔 참 외로웠었다. 부친에겐 버림받았고, 혈육인 아르옌과 새언니 클레어는 너무 먼 제국에 있었다. 여기에 남편인 라펠과도 사이가 나빴으니, 의지할 곳이라곤 유칼리뿐이었다. 아마 주치의인 유칼리로선 꽤 부담스러운 상황이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유칼리는 인내심 있게 아네트를 잘 보살펴 주었다. 그 덕에 아네트도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았다. 덕분에 아네트의 몸 상태를 살피러 온 라펠과도 화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때부터 그가 내 병간호를 해주기 시작했어.’
처음에 라펠은 그녀를 전적으로 유칼리에게 맡긴 채 밖으로 나돌았다. 부부 사이가 워낙에 나빴기 때문에 당연한 행동이었다.
하지만 아네트의 죽음이 가까워지던 어느 날이었다. 모처럼 아네트의 상태를 살피러 고개를 내민 라펠은 대단히 충격받은 기색이 역력했다. 늘 그렇듯 가벼운 잔병치레라고 생각했는데, 직접 본 아네트의 병세가 생각보다 너무 안 좋았기 때문이었다.
그 뒤로 라펠은 거짓말같이 그녀의 곁에 머물렀다. 나중엔 유칼리를 대신하여 손수 아네트의 일거수일투족을 보살피며 병간호를 해 줄 지경이었다. 늘 싸우기만 했던 아내일지언정, 그녀가 죽어가니 신경이 쓰였던 모양이었다. 덕분에 임종할 때 즈음엔 유칼리에게 별다른 폐를 끼치지 않을 수 있었다.
‘라펠은 난폭해 보이지만, 사실은 다정한 구석이 있어.’
아네트는 자신의 침대에서 게으른 사자처럼 잠들어 있을 라펠을 떠올리며 웃었다. 두 번째 삶도 전처럼 헛되이 스러지지 않으려면, 지금 아네트가 최우선으로 해야 할 일은 건강 관리였다. 그러기 위해 전보다 잠도 많이 자고, 최대한 스트레스를 덜 받는 방향으로 노력하고 있었다. 여기에 자신을 세심하게 케어해 줄 주치의까지 고용한다면 더더욱 좋을 터였다.
마음을 정한 아네트가 유칼리를 향해 따뜻하게 웃었다.
“카네시스 가의 주치의가 된 걸 환영해요, 카윤 씨.”
그 말에 지금까지 한 번도 아네트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던 유칼리가 처음으로 고개를 들었다. 내내 어두웠던 유칼리의 표정이 약간 밝아졌다. 제자리에서 우물쭈물하던 그녀가 숨을 크게 들이쉬더니 아네트에게 머리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마님. 유칼리라고 불러주세요.”
“좋아요, 유칼리 씨. 앞으로 잘 부탁해요.”
아네트는 아까보다 훨씬 좋아 보이는 유칼리의 표정을 바라보며 웃었다. 고향에서 멀리 떠나 온 입장인지라 일자리가 절박했던 유칼리였다. 머무를 곳조차 없는 그녀를 무려 귀족가의 주치의로 고용했으니, 유칼리가 안도하는 것도 당연했다.
아네트는 누명을 벗은 뒤 이곳을 떠날 작정이었다. 하지만 자신이 떠난 후에도 유칼리는 이곳에 계속 남아 근무할 수 있을 터였다. 귀족가에 한번 고용된 주치의를 내쫓는 경우는 거의 없었으니 말이다. 거기다 라펠의 성격상, 본인이 건강하다 보니 자신의 저택에 주치의가 있다는 것조차 잊고 살 터였다. 아네트는 전생에 신세를 많이 진 유칼리에게 그나마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게 기뻤다.
‘그래도 이번 생에는 유칼리에게 신세를 덜 지도록 노력해야겠어.’
그녀뿐 아니라 라펠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이번 생엔 그에게 병간호를 시킬 일은 없겠지만, 또 모를 노릇이었다. 전생엔 그 욱하는 성질에 어떻게 자신의 병수발을 든 건지, 지금 생각해도 신기할 따름이었다.
물론 라펠의 병간호가 그리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그러기엔 부부 사이에 패인 골이 너무 깊었다. 라펠은 툭하면 간호하다 성질을 부렸고, 신경질적인 아네트의 반응에 발끈해서 방을 뛰쳐나가기도 했다. 하지만 채 하루도 넘기지 못하고 다시 아네트에게 되돌아와 주었다.
그리고 자신이 집어던졌던 수프를 다시 끓여서 떠먹이고, 몸도 못 가누는 아네트를 번쩍 안아 올려 시트를 갈아주었다. 마지막 임종의 순간에는 심지어…….
‘그가 날 위해 울어줬었던가? 기억이 잘 안 나.’
아네트는 죽음이 자신의 몸에 드리워지던 순간을 기억했다. 처음엔 시야가 점멸하며 어두워지고, 그다음엔 청각이 사라졌다. 놀라고 당황해서 손을 움직이려 했지만, 팔다리마저도 이미 마비된 후였다. 그리고 얼음에 오래 닿은 피부처럼 온몸이 저릿하면서도 서서히 차가워졌다. 그게 아네트가 기억하는 죽음의 느낌이었다.
가장 처음에 사라진 게 시각인지라, 아네트는 그때 라펠이 어떤 얼굴을 했었는지 잘 보지 못했다. 하지만 가물거리는 시야 속에서 라펠의 얼굴이 울 것처럼 잔뜩 일그러졌었던 건 기억했다. 두 번 다시 라펠이 그런 얼굴을 하게 만들 순 없었다. 그러려면 아네트가 지금 해야 할 일은 자명했다.
“그럼 유칼리 씨. 주치의가 된 기념으로 같이 식사라도 하시겠어요?”
밥이 보약이라지. 늦게 일어나 아무것도 먹지 못한 아네트가 꼬르륵거리는 배를 슬쩍 누르며 웃었다. 그녀의 어조는 고용인에게 묻는 것이라곤 믿기지 않을 만큼 다정했다. 당연히 유칼리의 대답은 예스였다.
* * *
드디어 대망의 날이 밝았다. 오데사 르이 신전에서 주최하는 가을 추수 제례가 시작된 것이다. 말이 제례지, 사실상 신전에서 벌이는 축제나 다름없었다. 이날은 남녀노소 관계없이 모두가 신전에 내방하여 맛있는 양젖 치즈와 포도주를 마실 수 있었다.
덕분에 델티움 수도 근처에 사는 귀족들부터 부르주아, 평민들까지 모두 오데사 르이 신전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심지어 곧 왕세자비가 될 셀레스틴 키어스까지도 말이다. 사실 그런 점에선 아네트도 셀레스틴과 마찬가지였다. 다만 신전을 방문하는 방식이 조금 달랐을 뿐.
“어디 보자, 서쪽 묘실이 아마 이 근처에…….”
아네트는 라일린이 미리 보내준 약도를 참고하여, 오데사 르이 신전의 묘지로 향했다. 남들의 눈을 피하려고 산을 약간 타긴 했지만, 이 정도는 괜찮았다. 회귀한 그녀는 아직 아픈 곳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고 신전의 묘지에 들어올 수 있었다.
지금이 축제 기간이라 천만다행이었다. 원래 축제처럼 흥겨운 날엔 그 누구도 묘지 쪽으로 관심을 두지 않았다. 즐거운 날에 괜히 부정을 탈까 봐 본능적으로 무덤을 꺼리는 것이었다. 덕분에 아네트는 개미 한 마리 얼씬대지 않는 묘지에서 주위를 둘러볼 수 있었다.
라일린과 약속한 곳은 서쪽 묘실이었지만, 워낙에 넓은 묘지인지라 길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길을 더듬던 아네트는 귀를 쫑긋 세웠다. 저 멀리 보이는 신전에서 왁자지껄한 목소리들이 여기까지 실려 왔다. 다들 신전에서 만드는 포도주를 잔뜩 마시고서 취한 모양이었다. 이렇게 번잡한 분위기라면 그 누구도 아네트를 주목하지 않으리라.
‘역시 라일린 씨는 대단해. 이번 잠입은 아무래도 성공할 것 같아.’
아네트는 조금 안도했다. 그녀는 거사를 앞두고 잔뜩 긴장해 있었다. 회귀한 이래, 아네트는 전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엄청난 도전들을 계속하고 있었다. 아네트는 이런 자신의 모습이 생소하면서도 놀라웠다. 역시 죽다 살아나면 사람이 180도 달라질 수도 있는 모양이었다.
다행히 아네트는 곧 약속 장소인 서쪽 묘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처음엔 동쪽 묘실로 잘못 가는 바람에 일이 틀어진 줄 알고 철렁했었다. 그곳엔 라일린도, 그가 준비하기로 한 신관의 의복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신관들이 친절하게도 묘실 바닥에 ‘동쪽.’하고 양각해 놓아서 다행이었다.
‘역시 신에게 가장 가까운 분들. 이런 배려심까지 있다니.’
아네트는 깊은 감명을 받았다. 비록 셀레스틴이 먼저 이 신전에 다니고 있어서 신도가 될 순 없겠지만, 마음만이라도 오데사 여신님을 믿기로 다짐했다. 어쨌든 길을 바로잡은 아네트는 주위를 둘러보며 조심스레 서쪽 묘실에 들어섰다.
“……이곳이 맞나?”
묵직한 돌문을 열고 들어서자 바닥에 양각된 ‘서쪽.’이란 표시가 보였다. 맞게 잘 찾아온 모양이었다. 먼지 섞인 쿰쿰한 묘실의 공기가 코끝에 와 닿았다. 대낮인데도 꽤 어두컴컴한 실내는 온통 회색조로 이루어져 음산한 분위기를 풍겼다. 망자들을 위해 지어진 건물에서 들리는 소리라곤 오직 아네트의 발소리뿐이었다.
아네트는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아직까지 라일린은 보이지 않았다. 그 대신 묘실 중앙에 서 있는 조각상이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것 같았다. 어두워서 얼굴이 잘 안 보여서 그런지 조각상은 더더욱 음산한 느낌이었다.
안 그래도 ‘나쁜 짓’을 하는 중이던 아네트는 괜히 가슴이 떨렸다. 그녀는 슬그머니 눈을 감고 조각상 앞에 손을 모아 빌었다.
‘죄송해요, 오데사 여신님. 셀레스틴 키어스만 만나고 곧바로 나갈게요.’
바로 그 순간이었다. 아네트의 눈앞에 서 있던 조각상이 갑자기 손을 뻗어 그녀의 어깨를 움켜쥔 것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