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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화





















창밖으로 동이 트고 있었다. 아직은 온기를 머금지 못한, 새하얀 햇살이 어슴푸레 기어 들어왔다. 테이블 위에 비딱하게 걸터앉은 라펠은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침대 위에서 곤히 잠든 아네트의 얼굴이 보였다. 한숨이 나올 정도로 무방비한, 그리고 사랑스러운 얼굴이었다.



소리도 없이 몸을 일으킨 라펠이 그녀의 숨겨진 보석함을 이리저리 살피기 시작했다. 큰 체격에 비해, 그의 움직임은 꼭 야생의 맹수처럼 민첩하고 조용했다. 아네트를 깨우지 않고 원하는 걸 찾아낸 라펠이 그것을 집어 들었다.



물건은 기억 속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최고급 자수정으로 만들어진 반지는 어둑한 새벽빛에도 그윽하게 반짝였다. 그 표면에 금박으로 새겨진 ‘S’라는 알파벳이 유독 눈길을 끌었다. 전에는 이게 무슨 뜻인지 몰랐지만, 지금의 라펠은 알고 있었다. 이것은 아네트가 특수한 정보 길드의 고객이란 뜻이었다.



‘세크리트 길드.’



라펠의 하나뿐인 지인, 해롤드 에반스도 이 반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한때 왕의 은밀한 심부름을 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네트는? 그녀는 그 고운 손으로 수를 놓고, 책을 읽는 평온한 일상을 누리는 여자였다. 그리고 서랍 속에 남몰래 세크리트의 증표를 숨기고 있는 여자이기도 했다.



라펠은 무표정한 얼굴로 손바닥 위에 놓인 자수정 반지를 바라보았다. 딱 보기에도 사이즈가 제법 큰 반지는 아네트의 손가락에 맞지 않는 치수였다. 그렇다는 말은, 애초에 끼는 용도로 제작된 반지가 아니란 뜻이었다. 문득 라펠의 머릿속으로 해롤드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말 그대로 암살 빼고 다 해 주는 길드지. 정보 거래부터 시작해서 독약이나 미약 등의 각종 불법적인 상품 판매, 사람 빼돌리기, 사채업 등등… 아! 최근엔 밀입국이나 밀출국 쪽에도 손을 댔다고 들었어. 제법 비싼 서비스이긴 하지만 뭐, 현실에서 도망치고 싶은 사람이라면 돈이 아깝지 않겠지.’



반지를 움켜쥔 라펠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래, 아네트는 그저 정보만 거래하는 것뿐일 것이다. 그녀는 불법적인 범죄 따위에 발을 들일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밀출국만큼은…… 확신할 수 없었다. 잠든 아네트를 내려다보는 라펠의 얼굴에 언뜻 괴로운 기색이 감돌았다.



그래, 아직은 아무것도 확실하지 않았다. 아네트의 소유물에 멋대로 손을 댄 것도 모자라 이를 부술 순 없는 노릇이었다. 라펠은 이를 악물며 반지를 제자리에 돌려놓았다. 하지만 서랍을 닫는 순간 감정이 조금 격해졌던지, 탁! 하는 소리가 나고 말았다. 라펠의 기민한 감각이 침대에서 나는 인기척을 감지했다.



“으음…… 라펠?”



아니나 다를까, 아네트가 잠기운 가득한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몽롱한 분홍색 눈동자가 그의 얼굴을 훑더니 걱정스러운 눈빛을 했다. 손을 뻗은 아네트가 조심스레 그의 뺨을 어루만졌다. 자다 깨서 평소보다 높아진 체온이 따뜻하게 다가왔다.



“또 악몽을 꿨어요? 이리 와요.”



이불 한 귀퉁이를 들어 올린 아네트가 그의 목을 끌어당겼다. 그녀를 내려다보는 라펠의 새파란 눈동자가 조금 더 짙어졌다. 이런 유혹을 거절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는 순순히 아네트가 이끄는 대로 그녀의 옆에 누웠다. 그러자 양팔을 뻗어 라펠의 머리를 끌어안은 아네트가 다정하게 그를 얼렀다.



“괜찮아요, 라펠. 당신은 좋은 사람이에요. 내가…… 당신을 지켜 줄게요. 그러니 마음 놓고 푹 자요.”



잠기운이 남아 약간 허스키해진 아네트의 목소리가 듣기 좋았다. 늘 지적이고 우아한 말투가 어눌해지는 것도 귀여웠다. 꼭 누군가가 달콤한 메이플 시럽을 통째로 귓가에 들이붓는 듯한 느낌이었다.



라펠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연약한 두 팔에 끌어안겨 있는 감촉이 좋았다. 아네트에게선 깨끗한 화이트 머스크 냄새와 약간의 꽃향기가 났다. 그녀는 어느새 도로 잠들었는지 규칙적인 호흡을 내쉬고 있었다. 소리가 거의 나지 않는, 작고 평화로운 숨소리가 그의 이마를 간지럽혔다.



‘이렇게 다정하게 굴면서. 날 버리고 갈 작정은 아니겠지?’



라펠의 턱에 힘이 꽉 들어갔다. 그렇지 않으면 어쩐지 얼굴이 흉하게 일그러질 것만 같았다. 그는 아네트가 깨지 않도록 느릿하게 상반신을 일으켰다. 그리고 이번엔 자신이 잠든 그녀를 품속에 단단히 가둬버렸다. 고개를 숙인 라펠이 아네트의 귓가에 대고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당신은 아무 데도 못 가, 아네트.”



흘러내린 라펠의 흑발이 아네트의 작은 얼굴 주위를 감쌌다. 본의 아니게 그 모습은 꼭 창살에 갇힌 가련한 죄수처럼 보였다. 이에 만족한 라펠이 그녀의 몸을 끌어안은 팔에 좀 더 힘을 주었다. 그러자 아네트가 답답한지 잠결에도 항의 어린 신음을 흘렸다.



라펠은 그녀의 찌푸려진 이마에 가만히 입을 맞추었다. 안쓰럽긴 하지만, 팔을 놓아줄 마음은 들지 않았다. 만약 자신의 속박이 갑갑하다면, 그녀 쪽에서 이 압박감에 익숙해지는 편이 좋을 것이다. 그는 절대로 아네트를 놓아 줄 마음이 없었으니까.









부스스하게 일어난 아네트는 반사적으로 시계를 확인했다. 몸이 평소보다 늘어지는 것 같더라니, 역시나 늦잠을 잤다. 그것도 무려 두 시간이나. 아무래도 요즘 신경 쓸 일들이 많다 보니, 정신적으로 많이 피곤했던 모양이었다.



아네트는 자신의 허리를 끌어안은 라펠의 팔을 조심스레 치웠다. 그는 좀 더 자게 놔둘 생각이었다. 아네트는 오랜 수면장애에 시달렸던 라펠이 늘 안쓰러웠고, 가능한 그의 잠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만약 내가 떠나면 그는 어떡하지?’



아네트는 최근 이 고민 때문에 머리가 아팠다. 모처럼 라펠이 잠을 잘 자기 시작했는데, 자신이 사라져서 수면장애가 원래대로 돌아온다면 더 힘들 터였다. 시름 어린 눈빛을 한 아네트는 잠든 라펠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흐트러진 흑발 사이로 드러난 그의 옆모습은 꼭 고대의 남신처럼 아름다웠다. 매일같이 검술 훈련을 하는데도 왜 피부가 그을리질 않는지 신기했다. 라펠의 반듯한 이마와 우뚝한 콧대, 관능적인 입술 위까지 손끝으로 쓸어 본 아네트가 침대에서 내려왔다.



“하암…….”



고민은 아직 안 끝났지만, 새로운 하루는 시작되어야 했다. 기지개를 쭉쭉 켠 아네트가 실내용 가운을 걸치고 침실 밖으로 나왔다. 아침을 먹기엔 늦은 시간이었고, 브런치나 간단히 챙겨 먹을 작정이었다. 하지만 그 계획은 예정대로 되지 않았다. 개인 응접실로 나간 아네트는 곧 난처한 표정을 지은 메이드와 마주쳤다.



“마님, 송구하오나 손님께서 두 시간 전부터 기다리고 계십니다.”



“손님? 무슨…… 어머! 내 정신 좀 봐!!”



의아한 얼굴로 되묻던 아네트가 뒤늦게 약속을 떠올리고 소스라쳤다. 오늘은 유칼리를 만나 간단하게 면접을 보기로 한 날이었다. 전생에 아네트의 주치의였던 유칼리는 이번 생에도 신비한 인연으로 또 만나게 되었다. 근데 자신의 첫인상을 아주 최악으로 심어주게 생겼다. 허둥지둥하는 아네트를 본 메이드가 면목 없다는 듯 머리를 조아렸다.



“어떻게든 깨워드렸어야 했는데, 주인님께서 안에 계시는 듯하여…… 도저히 방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죄송합니다, 마님.”



“아냐, 괜찮아. 그보다 나 좀 도와주련? 최대한 구색만 갖추고 얼른 내려가야겠어.”



아네트가 손사래를 치며 현실적인 대안을 내밀었다. 메이드의 말마따나 남편과 같이 부부간의 오붓한 시간을 보내는데, 고용인이 함부로 방해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이건 전적으로 아네트의 잘못이었다. 그녀는 고용인에게 자신의 잘못을 떠넘기는 못된 안주인은 아니었다.



아네트의 용서를 받은 메이드의 표정이 조금 밝아졌다. 그녀는 감사의 의미로 머리를 조금 숙인 게 전부였지만, 그 대신 아네트를 누구보다 빠르게 준비시켜 주었다. 덕분에 아네트는 딱 십오 분 만에 그럴싸한 모습이 되어 아래층으로 향할 수 있었다.



손님 접대용 응접실의 문을 열자, 소파에 다소곳이 앉아 있는 유칼리가 보였다. 아네트의 기억 속 얼굴 그대로였다. 동대륙의 피가 섞인 유칼리는 꽤 동안이었지만, 사실은 경험 풍부한 의원이었다. 다만 이목구비가 수수하고 표정이 없어 좀 음침해 보인다는 게 단점이었다. 하지만 의원이라는 직업에 있어서 외모나 사교성 따윈 중요치 않았다.



“늦어서 미안해요. 오래 기다렸죠?”



아네트는 자신을 보고 일어나는 유칼리에게 정중히 사과부터 건넸다. 빈말이 아니라 정말로 미안해하는 기색이 역력한 얼굴이었다. 귀족도 아닌 한낱 고용인에게 진심 어린 사과를 하는 주인마님이라니. 이를 본 유칼리가 숫기 없는 태도로나마 확실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유칼리 카윤이라고 합니다.”



“반가워요, 카윤 씨. 제가 어제 일이 많아서 깜박 잊었었나 봐요. 정말 미안해요.”



하마터면 전생처럼 친근하게 유칼리라고 불러버릴 뻔했다. 아네트는 이국적인 느낌이 나는 유칼리의 성을 부르며 겸연쩍은 미소를 지었다. 항상 약속에 철저했던 아네트답지 않은 실수였다. 미안한 얼굴로 자리에 앉은 아네트가 슬쩍 눈을 굴려 유칼리 쪽을 바라보았다.



다행스럽게도 유칼리의 앞엔 차와 쿠키가 준비되어 있었다. 두 시간이나 기다렸는데도 차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걸 보면, 메이드들이 신경을 써준 게 틀림없었다. 아네트는 속으로 메이드들의 봉급 인상을 다짐하며 상냥하게 웃었다. 그리고 시치미를 딱 뗀 채 질문을 던졌다.



“그래서, 카윤 씨. 우리 가문의 주치의가 되고 싶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