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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화





















아네트는 눈을 가늘게 뜨며 우산 밑에 서 있는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가 왜 저리 어두운 눈빛을 하고 있는지 의아했다. 눈이 마주친 순간,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던 라일린이 별안간 방긋 웃었다. 그의 얼굴이 평소처럼 화사하게 변했다.



‘기분이 안 좋아 보였는데. 내 착각이었나?’



아네트는 고개를 갸웃했다. 장난스럽게 우산을 빙글빙글 돌린 라일린이 그녀에게 다가왔다. 창 하나를 사이에 두고 멈춘 그가 평소와 좀 다른 방식의 인사를 건넸다.



“여신의 은총을 내려 주시길. 신실한 여신의 종이시여.”



방금 라일린이 한 인사는 오데사 여신을 모시는 신관들에게나 하는 인사였다. 그의 농담을 알아들은 아네트가 빙그레 웃으며 같은 방식으로 대꾸했다.



“여신의 숨결이 늘 그대와 함께할 것입니다. 독실한 여신의 어린 양이여.”



아네트가 농담을 받아주자,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인 라일린이 카페 안으로 들어섰다. 비가 이렇게 쏟아지는데도 라일린의 연한 회색 바지에는 물이 튄 흔적조차 없었다. 이를 신기하게 바라보던 아네트가 물었다.



“세크리트 길드 마스터가 되려면 마법도 써야 하나요? 이를테면 물 위를 걷는다든지.”



“글쎄요. 원래 저처럼 아름다운 미인은 비밀이 좀 있어야 하는 법이죠.”



라일린이 속을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으레 잘난 척을 했다. 저러고도 밉지가 않은 게 라일린만의 매력이었다. 하지만 아네트는 농담 따먹기나 하려고 라일린과 만난 게 아니었다.



“그래서, 잠입 날짜는 정해졌나요?”



“물론이지요. 앞으로 일주일 후, 추수 제례가 시작되는 둘째 날입니다. 오데사 르이 신전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서쪽 묘실에서 만나죠. 그곳엔 사람이 거의 오지 않으니까요.”



아네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말이 제례였지 추수를 앞둔 가을은 축제나 다름없는 기간이었다. 그렇게 좋은 날에 굳이 묘실 주위를 얼쩡대는 참배객은 없을 터였다. 아네트는 혹시 모를 가능성을 대비해서 라일린에게 물었다.



“그날, 셀레스틴 키어스가 신전을 찾는 건 확실한가요?”



“제 정보가 언제 잘못된 적 있던가요?”



라일린이 긴 속눈썹 밑으로 아찔한 눈웃음을 날리며 되물었다. 상당히 신뢰성 높은 대답에 아네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에 잠긴 아네트가 따뜻한 찻잔의 테두리를 어루만지며 물었다.



“최근 셀레스틴이 사교활동을 거의 안 한다지요. 이 때문에 왕세자비로서의 자질이 의심받는다고 들었어요.”



“예, 뭐. 그녀의 가문은 그리 힘 있는 곳이 아니니까요. 여기에 요즘 대인기피증 증세를 보인다는 소문이 돌더군요. 덕분에 지인들에게서 꽤 원망을 사는 모양입니다. 하필이면 시기가 왕세자비로 확정된 직후부터니까요. 소위 말하는 ‘너, 성공하더니 변했어…….’ 같은 경우로 보이겠죠.”



라일린이 능청스럽게 목소리 연기까지 하면서 설명해 주었다. 그 말을 들은 아네트는 눈썹을 찌푸렸다. 생각해 보면 셀레스틴은 엘로크 후작가에서 했던 가든파티에도 갑작스레 불참했다. 뭔가가 이상했다.



‘왜 셀레스틴이 이제 와 이토록 허술하게 구는 걸까?’



내심 셀레스틴을 진범으로 의심 중인 아네트는 그 부분이 의아했다. 지금 셀레스틴은 그토록 원했던 왕세자비 자리를 꿰찬 거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근데 마지막 마무리만 남은 이 시점에서 왜 갑자기 다 된 수프에 재를 뿌리려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뭐,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이 모든 건 그녀를 직접 대면하면 알 수 있을 테니까. 누명을 벗고 싶다는 미련은 아네트를 이곳에 붙잡아 두는 마지막 이유였다. 만약 운이 좋다면 셀레스틴과의 대면에서 그 해답을 바로 얻게 될지도 몰랐다. 그리고 그 이후에는…….



미리 세워둔 인생 계획을 떠올린 아네트가 방긋 웃었다. 씁쓸한 기분과 달리, 목소리만큼은 평소처럼 부드럽게 흘러나왔다.



“그리고 라일린 씨, 괜찮다면 슬슬 오스란드로 이주할 준비를 해 주시겠어요? 이번 일이 끝나면 한번 방문해 보고 싶어서요. 앞으로 쭉 살아가야 할 곳인데, 적어도 사전 답사는 가 봐야겠지요.”



드디어! 라일린의 루비처럼 붉은 눈동자가 희열로 반짝였다.









라일린과의 대화를 끝낸 아네트는 별생각 없이 마차로 향했다. 이제 저택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안 그래도 비까지 오는 날인데, 더 늦어지면 라펠이 걱정할 터였다. 아네트는 어느새 ‘라펠은 날 걱정한다.’라는 전제를 당연하게 여기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웃었다. 언제부터 이렇게 된 건지 모를 노릇이었다.



발걸음을 재촉한 아네트가 드디어 마차 앞까지 이르렀다. 비 오는 날씨인지라 모처럼 신은 가죽 부츠가 흠뻑 젖어버렸다. 발가락 사이에서 찰박거리는 습기가 불쾌했다. 그녀가 막 마차에 오르려는 순간, 뒤에서 누군가가 그녀를 불렀다.



“아가씨…… 아니, 후작 부인.”



외국 악센트가 섞인 청년의 억양은 대단히 귀족적이었다. 제법 오랫동안 그녀를 기다렸는지, 남자는 비에 흠뻑 젖어 있었다. 아네트는 놀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새하얀 이마에 달라붙은 금발을 쓸어 넘기는 청년은 예상 밖의 인물이었다.



“제라드? 세상에, 우산 없어? 비가 이렇게 많이 오는데 이 무슨 꼴이야?”



그랬다.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건 친정인 바이에른 가의 집사, 제라드였다. 젖은 생쥐 같은 제라드의 몰골에 놀란 아네트가 그의 손을 잡아끌었다. 비에 흠뻑 젖은 제라드의 손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체온이 더 떨어지기 전에 마차 안에 태울 생각이었으나, 제라드 쪽에서 이를 거부했다.



“가죽 시트를 망칠 겁니다, 부인. 괜찮으니 저는 이대로…….”



“그게 무슨 바보 같은 소리야! 내가 시트 살 돈도 없어 보여? 됐으니 빨리 타.”



핀잔을 준 아네트가 단호한 태도로 그의 손을 끌어당겨 기어이 마차에 태웠다. 지금은 좀 멀어지긴 했지만, 제라드는 그녀를 오랫동안 보살펴 준 친정의 집사였다. 아네트는 적어도 그를 먼 사촌 오빠처럼은 생각하고 있었다. 근데 제라드를 이 빗속에 내버려두고, 자신만 마차에 타서 대화하라니! 그 무슨 몰인정한 소리란 말인가.



얼떨결에 아네트의 손에 이끌려 마차에 탄 제라드가 결국 웃었다. 자신의 옷 밑에서 최고급 가죽 시트가 젖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비를 맞아서 좀 춥긴 했지만, 제라드의 마음만큼은 따뜻했다. 그의 아가씨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상냥했다.



“무슨 일 있어, 제라드? 여기까지 다 오고. 아버지께서 시키셨어?”



제라드의 몸 위에 담요를 덮어 준 아네트가 물었다. 혹 부친인 알라만드가 또 경고장이라도 보내려는 건가, 싶어서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러나 제라드는 고개를 젓고서 가만히 아네트를 바라보았다. 그의 우아한 얼굴에 약간의 그림자가 스쳐 지나갔다.



“아가씨, 아니…… 부인.”



“그냥 좋을 대로 불러. 무슨 일인데?”



“죄송합니다만, 우연찮게 전해 들었습니다. 그…… 부군 되시는 분의 광산에 대해서 말입니다. 광산 관리인을 내쫓으셨다지요.”



아네트는 가슴이 뜨끔했다. 아버지의 수하인 토머스 브래들리를 처리한 일이 벌써 알려진 모양이었다. 예상은 했지만 이건 생각보다 너무 빨랐다.



또한 아네트는 과연 아버지의 수하인 제라드를 어디까지 믿을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그는 어릴 때부터 돌봐 온 자신에겐 그 어떤 해도 끼치지 않을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남편인 라펠에겐 달랐다. 경계 어린 표정을 한 아네트가 제라드에게 물었다.



“맞아. 그건 왜? 토머스는 이중장부를 만들어서 광산 사업의 수익을 착복하려고 들었어. 사업주 입장에선 해고하는 게 당연한 일이야.”



“그것 때문만은 아니잖습니까, 아가씨. 영리하신 분이니 이미 내막을 다 짐작하고 계시겠지요.”



제라드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는 아네트가 토머스를 내쫓은 진짜 이유를 알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아네트는 과연 제라드가 어찌 나올지 몰라 그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러자 한숨을 푹 내쉰 제라드가 마차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저는 오늘 아가씨나, 부군 되시는 분께 해를 끼치러 온 게 아닙니다. 사실은 이 일을 그만두고 내일 고향으로 귀국할 예정입니다. 그 전에 아가씨께 마지막 인사를 꼭 하고 싶어서 이렇듯 불쑥 찾아오게 된 점, 사과드립니다.”



“고향으로 돌아간다고? 어째서?”



“델티움에서의 삶은 참 좋았지만, 이제는 본국으로 돌아갈 때인 것 같습니다. 마침 영지를 이어받은 제 형도 도움을 필요로 하고요.”



제라드는 비록 떠나는 이유를 솔직히 밝히진 않았다. 어쩌면 판이 너무 커져서 위기감을 느꼈기 때문일 수도 있고, 자신과 자꾸 맞서게 되는 상황이 불편해서일 수도 있었다. 물론 아네트의 경계를 풀기 위한 거짓말일 가능성도 있긴 했다. 하지만 그의 허심탄회한 어조와 초연한 얼굴에선 진심이 느껴졌다.



그가 아네트를 잘 알듯, 아네트 또한 그를 잘 알았다. 비록 중간에 갈등이 좀 있긴 했지만, 제라드와 보낸 시간은 무척이나 길었다. 과장을 좀 보태자면 부친인 알라만드와 보낸 시간보다, 제라드와 보낸 시간이 훨씬 길었다. 그리고 그 시간 동안 제라드는 한결같이 좋은 집사였다. 이제 떠난다는 그를 앞에 두고 계속 매정하게 굴 순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구나. 부디 가는 길 조심하고, 또 만날 수 있길 바랄게. 제라드.”



아네트는 아쉬움을 감추며 부드러운 어조로 인사를 건넸다. 하지만 제라드가 그녀를 찾은 건 단순히 작별인사만을 위한 게 아니었다. 아네트를 앞에 둔 그가 별안간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반쯤 열린 마차의 창문을 힘주어 닫았다. 목소리를 잔뜩 낮춘 제라드가 아주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아가씨, 제가 비록 모든 걸 다 아는 건 아닙니다만…… 그래도 한 가지 알아낸 사실이 있습니다.”



“뭐? 갑자기 무슨 소리야, 제라드?”



“이번 광산 건 말입니다. 단순히 주인님뿐 아니라, 그분을 돕는 자가 따로 있습니다. 이 일은 아가씨의 생각보다 더 위험하고, 더 거대한 음모입니다.”



뜻밖의 말에 아네트의 눈이 커졌다. 바이에른 공작인 알라만드는 그 혼자만으로도 대단한 권력가였다. 독선적인 성향의 그는 그 누구의 도움도 필요치 않았다. 그런 알라만드가 누군가와 손을 잡고 이 일을 계획했다니.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이런 얘길 내게 해 줘도 괜찮겠어, 제라드? 나야 고맙긴 하지만, 만약 들통나면…….”



아네트가 불안함에 떠는 와중에도 제라드를 걱정했다. 비록 라펠을 지키기 위해서였지만, 그에게 너무 박정했던 것 같아 미안했다. 그러자 제라드가 슬픈 눈으로 웃으면서 어깨를 으쓱했다.



“뭐, 이미 떠난 사람을 어쩌겠습니까? 그것보다 아가씨께 꼭 드리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마차 바닥에 무릎을 꿇은 제라드가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비에 젖은 아네트의 부츠에 거리낌 없이 입을 맞췄다. 일견 경건하기까지 한 그의 태도에 아네트가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무릎을 꿇은 채 아네트를 올려다본 제라드가 처연하게 웃었다.



“일전에 부군을 모욕한 점, 진심으로 사죄드립니다. 제가 소중히 기른 아가씨를 빼앗긴 느낌인지라 치졸한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래선 안 됐었는데…….”



“괜찮아, 제라드. 그때 내 남편에게 사과했었잖아. 이제 다 지난 일인걸.”



아네트의 말에 제라드가 고개를 숙였다. 어두워진 눈앞으로 아네트의 남편, 라펠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제라드는 부디 그가 아네트의 옆에 당당히 설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큰 권리인지 깨닫길 바랐다. 그는 그런 기회조차 얻지 못한 일개 집사였을 뿐이므로. 눈을 꾹 감으며 미련을 떨친 제라드가 일부러 밝은 어조로 마지막 작별 인사를 남겼다.



“아가씨를 모셨던 시간은 제 인생에서 가장 소중하고, 따뜻한 추억들이었습니다. 고국에 돌아간다 한들, 저는 늘 아가씨를 생각하겠습니다. 부디 행복하십시오.”



할 말을 끝낸 제라드가 개운한 얼굴로 미소 지었다. 그의 눈가에 어느덧 약간의 눈물이 맺혔다. 아네트가 뭐라고 말할 새도 없이, 그대로 등을 돌린 제라드가 마차에서 뛰어내렸다. 그리고 성큼성큼 걸어 어둠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제라드…….”



창문 너머로 제라드의 뒷모습을 안타깝게 바라보던 아네트가 한숨을 쉬었다. 그가 과연 먼 고향길을 잘 찾아갈 수 있을지 걱정스러웠다. 하지만 이제는 정말로 집에 돌아가 봐야 할 시간이었다. 깜깜해진 창밖을 바라본 아네트가 마차를 출발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