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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화





















약속대로 먼저 집에 간 라펠은 수련장에서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흘리는 땀방울에 비해서, 수련의 효율은 그닥 잘 나오고 있진 않았다. 지금 그의 머릿속은 온통 아네트에 대한 걱정으로 꽉 차 있었다. 그녀는 조심성이 많은 성격이니까 위험한 짓은 절대 하지 않을 터였다. 그래도 걱정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라펠은 한숨을 쉬며 쥐고 있던 검을 내려놓았다. 이렇게 잡생각이 가득한 상태에서 검을 휘두르는 건 위험했다. 자칫 잘못하면 제 발등을 찍을 수도 있었다. 하루라도 빨리 소드 마스터가 되어야 하는데, 왜 이리 진전이 더딘 건지. 답답할 따름이었다.



‘요즘은 몸 상태도 꽤 좋은데 말이지.’



만성적인 수면 부족에 시달렸을 때가 먼 옛날 같았다. 매일 밤 아네트의 곁에서 잠드는 건 더할 나위 없이 평온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녀의 침실에서 잠들면 더는 몽유병이 발동하지 않았다.



라펠은 자신이 수면 장애에 시달릴 때마다 아네트가 노래를 불러 재워준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는 그저 철석같이 자신의 병이 나았다고 믿었다. 아네트는 그의 신비한 불면증 치료제였다. 아마 자신은 그녀와의 관계에서 마음의 안정을 얻는 게 틀림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아네트와 사이가 좋을 땐 숙면하고, 나쁠 땐 불면증이 오는 기묘한 상황을 설명할 수 없었으니까.



‘그나저나 아네트가 너무 늦는데…….’



라펠은 자신이 같은 자리를 빙빙 돌며 배회하고 있단 사실을 깨달았다. 비록 광산 관리인인 토머스는 힘쓰는 것과 거리가 먼 인간이었지만, 그래도 남자였다. 어쩌면 아네트에게 치부를 들킬까 봐 그녀에게 손을 올릴지도 몰랐다. 역시 아네트를 혼자 보내는 건 어리석은 행동이었을지도 몰랐다. 불안해진 라펠이 결국 이곳을 떠나려던 순간이었다.



“라펠!”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기쁨에 찬 종달새처럼 경쾌했다. 고개를 돌리자 저 멀리 아네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평소 늘 우아하게 걷던 그녀는 지금 자신을 향해 전력으로 뛰어오고 있었다. 잘 땋아 올렸던 금발이 흐트러지고, 긴 드레스 자락이 허공에 꽃잎처럼 나풀거렸다. 그러나 발갛게 상기된 아네트의 뺨과 눈동자는 이를 전혀 개의치 않는 듯했다.



그런 아네트의 얼굴을 홀린 듯 바라보던 라펠이 저도 모르게 두 팔을 벌렸다. 그러자 멀리서부터 전력 질주를 했던 아네트가 숨을 헐떡이며 그의 품에 뛰어들어왔다. 기분 좋은 충격이 몸을 강타하고, 그녀의 부드러운 팔이 덩굴처럼 휘감기는 게 느껴졌다. 그 상태로 고개를 든 아네트가 활짝 웃으며 외쳤다.



“나 성공했어요, 라펠!!”



잔뜩 들뜬 아네트가 자신의 풍성한 드레스 자락 밑에서 서류 뭉치를 꺼냈다. 얼떨결에 그것을 받아 든 라펠이 서류에 남은 아네트의 체온을 느끼고 얼굴이 약간 붉어졌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네트가 성공했다는 고양감에 높아진 목소리로 설명했다.



“이건 토머스 브래들리가 숨겨 놓은 이중장부에요. 지금껏 당신에겐 가짜 사업 보고서를 올려왔던 거죠. 여기 보면, 그가 몇 개월에 걸쳐 꾸준히 빼돌린 횡령 금액이 적혀있어요.”



“이거 굉장한 자료로군. 용케 안 걸렸어.”



라펠이 제법 두툼한 서류 두께를 확인하며 혀를 내둘렀다. 어떻게 이게 드레스 자락 밑에서 나올 수 있지? 마법인가? 놀라는 라펠을 앞에 두고 아네트가 멋쩍게 웃었다. 이 방법은 사실 라일린의 메이드 복에서 힌트를 얻었다.



여성의 드레스 자락은 하도 풍성했기 때문에, 그 밑에 무언가를 감춰도 티가 잘 나지 않았다. 설령 티가 좀 난다 한들 그 누가 숙녀의 치맛자락 밑을 검사하겠다고 나서겠는가? 아네트는 여기에 한술 더 떠서 일부러 바스락거리는 재질의 드레스를 입었다. 행여 들릴지도 모를 서류의 소리를 감추기 위해서였다. 덕분에 토머스는 그녀의 드레스 밑에 뭐가 숨겨져 있는지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라펠, 오는 길에 이 서류를 검토해 봤는데요……. 이건 꽤 장기적이고 치밀한 계획이더군요. 토머스 브래들리는 몇 년에 걸쳐서 꾸준히 당신의 광산 사업을 악화시킬 작정이었어요. 그러다 종국엔 빚더미로 나앉고, 경매를 통해 광산이 딴 사람에게 넘어가게끔 만들려고요.”



말을 마친 아네트가 애매하게 웃었다. 그렇게 되면 광산의 새 주인이 누가 될 진 안 봐도 뻔했다. 만약 자신이 도중에 끼어들지만 않았어도, 바이에른 공작가의 재산 목록엔 철광석 광산이 하나 추가되었겠지. 그리고 부친은 먹이를 삼킨 뱀처럼 서늘하게 웃었을 것이다.



아네트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몇 년씩이나 공을 들여 야금야금 독을 풀다가, 한 번에 꿀떡 집어삼키는 게 알라만드의 방식이었다. 그래서 아네트는 광산 사업 관리인부터 조사를 시작했다. 만약 토머스가 첩자가 아니었다면 다음엔 광산 현장 감독을. 그다음엔 부감독을 차례대로 조사할 작정이었다. 다행히 첫 단추부터 잘 꿴 덕에 그럴 필요까진 없었지만 말이다.



아네트는 문득 전생에 자신이 죽은 후, 라펠이 광산을 끝까지 지켰는지에 대해 궁금해졌다. 부친의 계획은 꽤 장기간에 걸친 것이었기에, 전생의 아네트는 미처 그 결과를 보지 못하고 죽었다. 하지만 어차피 지금 와 확인해 볼 방법은 없었다. 그나마 이번 생엔 이 사실을 알고, 막아줄 수 있었다는 게 아네트의 유일한 위안이었다.



“정말 다행이에요, 라펠. 당신의 철광석 사업이 무사해서요.”



아네트가 부끄러움에 뺨을 붉히며 작은 목소리로 소곤거렸다. 성공했다는 기쁨이 가라앉자, 새삼스레 눈앞의 현실이 보여 머리가 차가워졌다. 이 일을 꾸민 게 자신의 아버지인지라 라펠을 볼 면목이 없었다. 그녀의 분홍색 눈동자가 울 것처럼 일그러지자, 이를 발견한 라펠이 그녀를 번쩍 안아 올렸다. 그리고 퉁명스러운 어조로나마 그녀를 어르기 시작했다.



“쉬이, 왜 울상을 하고 그래. 잘 해 놓고서.”



“하지만 라펠, 하마터면 아버지가 당신 사업을 망하게 할 뻔했는걸요.”



비록 이번엔 잘 막았다지만, 토머스를 제거한다고 해서 알라만드가 과연 광산을 포기할까? 아네트는 그 점이 걱정스러웠다. 두려움과 미안함이 뒤섞인 그녀의 눈동자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라펠은 저 눈물이 뚝뚝 떨어져 내릴까 봐 마음이 다급해졌다. 자연히 아네트를 달래는 그의 어조도 조금 더 빨라졌다.



“뭐가 미안해? 당신 덕분에 사업 망하는 건 면했잖아. 얼른 이 망할 관리인 놈이 빼돌린 재산이나 찾으러 가자고. 그걸로 당신이 저번에 갖고 싶다던 블루 다이아몬드? 그거나 사러 가지.”



“……다이아몬드요?”



“그래. 저번에 변변찮은 꽃 몇 송이 꺾어준 게 다잖아. 명색이 남편인데 한 번쯤은 뭔가 사 주고 싶었어. 원한다면 색깔별로 다 사든가.”



라펠이 은근슬쩍 자신의 부유함을 어필했다. 그러면서도 아네트와 눈을 똑바로 마주치지 못하고, 부루퉁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게 그다웠다. 솔직하지 못한 라펠은 보기보다 부끄러움이 많은 편이었다. 눈물 고인 눈으로 그의 무뚝뚝한 옆얼굴을 바라보던 아네트가 결국 웃었다.



“하지만 예쁜 꽃이었어요. 누가 직접 꽃을 꺾어준 건 당신이 처음이었는걸요. 정말 고마워요, 라펠.”



다정한 아네트의 말에 라펠의 관자놀이가 조금 더 붉어졌다. 눈처럼 차갑고 흰 피부에 떠오른 홍조는 더욱 티가 잘 났다. 지금은 심지어 대낮이라 그의 얼굴을 가려 줄 어둠조차 없었다. 아네트는 배려심 깊게 이를 못 본 척하며 물었다.



“그래서 토머스 브래들리 건은 어떻게 처리할 건가요?”



“글쎄, 지금부터 생각해 봐야지.”



라펠이 울음을 그친 아네트를 조심스레 땅 위에 내려 주었다. 그리고 그녀가 용케 빼돌려 온 이중장부를 집어 들었다. 대체 어떻게 이걸 찾아낸 건진 모르겠지만, 아네트는 얌전한 외모와 달리 유능했다. 어쩌면 검만 휘두를 줄 아는 자신보다 더 나을 수도 있었다.



곰곰이 장부를 내려다보는 라펠의 눈빛이 점차 날카로워졌다. 막연히 아네트의 말을 듣고서 토머스를 의심하는 것과, 그 결과물을 실제로 보는 건 생각보다 다른 느낌이었다. 체계적으로 짜인 계획서를 보고 있자니 화가 들끓었다. 이렇게까지 자신의 사업을 망하게 해서, 광산을 빼앗고 싶었던 걸까.



‘있는 놈들이 더하다더니, 딱 그 짝이로군.’



라펠은 자신에게 좀 더 많은 힘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그는 뛰어난 검사였고, 전쟁에서도 혁혁한 전공을 세웠었다. 하지만 르탄의 독립 전쟁은 모두 끝났다. 자신의 손으로 끝내버렸다.



사냥이 끝난 뒤 쓸모없어진 사냥개는 잡아먹히기 마련이었다. 라펠은 다행히 사람인지라 그렇게 되진 않겠지만, 그의 지위와 재산이 지금 위태로운 건 분명했다. 그러니 이번엔 새로운 쓸모를 증명하여 자신을 보호할 힘을 손에 넣어야 했다. 그의 적들은 모두 쟁쟁하기 그지없는 위인들이었으니 말이다.



“수고했어, 아네트. 뒷일은 내가 알아서 하지. 이제 들어가서 쉬어.”



고개를 숙인 라펠이 그답지 않게 다정하게 아네트의 뺨에 키스했다. 손끝에 와 닿는 그녀의 금발이, 입술에서 느껴지는 부드러운 뺨의 감촉이 소중했다. 아네트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그는 반드시 더 강해져야만 했다.









* * *









밖에서 비 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급 상점가의 카페에 앉은 아네트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허브티를 앞에 둔 채 창밖을 내다보았다. 라펠은 자신이 보석을 보러 외출한 줄 알 테지만, 이는 눈속임이었다. 아네트는 사실 라일린을 만나기 위해 이곳에 왔다.



‘준비가 다 됐다고 했었지.’



이제 곧 초가을이었다. 그럼 오데사 르이 신전에서 풍성한 추수를 기원하며 제례를 올릴 터였다. 그곳의 가을 추수 제례는 꽤나 유명한 행사였기 때문에, 아네트는 이 틈을 타 신전에 잠입할 생각이었다. 가면을 쓴 신관 중 하나로 분하면 그 누구도 아네트의 정체를 알지 못할 터였다.



아네트는 멍하니 라일린을 기다리며 창밖을 내다보았다. 그 순간, 아네트의 눈을 확 사로잡는 풍경이 있었다. 가장 먼저 눈에 띈 건 아름답고 화려한 우산이었다. 적색의 레이스로 덮인 우산에는 연보랏빛 나비들이 가득히 날아오르고 있었다. 보석 가루라도 뿌린 건지, 우산이 움직일 때마다 나비의 날개들이 화사하게 반짝였다.



그러나 그 나비들조차도 우산을 든 남자의 얼굴보다 더 화려할 순 없었다.



“……라일린 씨?”



이름을 불린 순간, 라일린이 이쪽을 바라보았다. 검붉은 그림자가 드리워진 흰 얼굴이 꼭 붉은 나비처럼 색정적인 빛을 띠었다. 그는 평소와 달리 웃지 않고 심각한 표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