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아네트의 말을 들은 토머스의 눈빛이 갈대처럼 연약하게 흔들렸다. 그는 자신이 뭘 들었는지 반신반의하는 눈빛이었다. 아네트의 뜻을 확신할 수 없었던 토머스는 짐짓 태연하게 이를 받아넘겼다.
“그, 그러십니까? 후작 각하께서 들으신다면 무척 기뻐하시겠군요. 부인 되시는 분께서 안살림뿐 아니라 광산 운영에까지 신경을 쓰시다니! 같은 남자로서 후작님이 참으로 부럽습니다, 허허.”
토머스가 호탕한 척 웃었지만, 그의 눈썹 끝은 미세하게 경련하고 있었다. 토머스의 입장에선 그녀의 관심이 기쁠 리 없었다. 라펠처럼 아예 운영을 다 맡겨버리고, 관심을 두지 않아야 토머스가 제멋대로 할 수 있었다. 자연히 아네트를 바라보는 그의 눈엔 경계심이 떠올랐다.
이를 본 아네트는 우아하게 손을 들어 턱을 괴었다. 그러자 그녀의 벨벳 장갑 위로 끼워진 커다란 다이아몬드가 눈부신 빛을 뿜었다. 평소 아네트였다면 절대 착용하지 않았을 과한 디자인이었다. 그러나 시선 끌기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미끼이기도 했다. 토머스의 시선이 그 다이아몬드로 향한 순간, 아네트가 오만하게 웃었다.
“맞아요. 그이는 광산에 별 관심이 없지요. 그래서 말인데요…… 귀한 건 역시 그 가치를 알아보는 사람에게 속해야 하지 않을까요? 브래들리 씨의 생각은 어떠신가요?”
“…예? 실례지만 부인, 그 무슨 말씀이신지요? 저, 저는 잘 이해가…….”
아네트는 당황하는 토머스를 보며 한층 더 요염한 미소를 머금었다. 라일린에게서 보고 배운 그 웃음이었다. 이 순간을 위해 일부러 화려한 옷을 차려입고, 토머스에게 과한 호의를 내비쳤다. 은근한 태도로 고개를 기울인 아네트가 눈을 빛내며 토머스에게 속삭였다.
“제 말은요. 제가 그 광산의 소유주가 되면 훨씬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단 말이지요. 운영 면에서든, 수익 면에서든 전부 다요. 그리고 아마… 저를 도와준 충성스러운 관리인에게도 제법 두둑한 성의 표시를 할 수 있겠지요?”
아네트의 제안을 들은 토머스의 눈이 충격으로 크게 흡떠졌다. 설마 그녀에게서 이런 말을 듣게 되리라곤 생각도 하지 못한 표정이었다. 이를 본 아네트는 한층 자신감이 생겼다. 자연히 연기에도 물이 올랐다. 고개를 갸웃한 아네트가 고양이처럼 웃으며 토머스에게 압력을 가했다.
“어떻게 생각하세요, 브래들리 씨? 저를 좀 도와주실 마음이 있나요?”
“부인, 그…… 너무 갑작스러운 이야기라, 저는 어찌 대답해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토머스의 대머리가 당혹감으로 촉촉해졌다. 사실 그의 입장에선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알라만드의 명을 받고서 라펠의 광산 관리인으로 침투한 상태였으니까. 근데 고용주의 딸이 갑자기 자기도 광산이 탐난다며 발을 들이민 셈이니, 오죽 난감할까. 원하는 만큼 토머스를 당황시킨 아네트는 여기서 한발 물러나기로 했다.
“아무래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신 것 같네요, 브래들리 씨.”
“예예, 부인. 정말 송구하오나 지금은 뭐라 답을 드릴 수가 없습니다.”
땀을 뻘뻘 흘리던 토머스가 반색을 하며 아네트의 미끼를 덥석 물었다. 이에 아네트는 답을 못 받아서 뾰로통한 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둘 사이에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을 먼저 깬 쪽은 아네트였다.
“그럼 브래들리 씨. 듣자 하니 고향이 웨스트 데이룬 쪽이시라고요?”
“맞습니다, 부인. 데이룬에 대해 잘 아십니까?”
어차피 고향도 위조한 게 틀림없었지만, 토머스는 웃는 얼굴로 아네트의 질문에 답했다. 역시 제법 물오른 연기력이었다. 하지만 아네트는 그에게 관대하게 속아주기로 했다. 어차피 자신도 지금 토머스를 속이는 중이었으니 말이다. 호기심 어린 표정을 지은 아네트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그 데이룬 지방에서 유행하는 전통 노래가 있다지요? 예전에 우연히 들어봤는데, 생각보다 음이 풍부하고 듣기 좋더라고요. 하지만 가사가 생소해서 그런가, 대체 뭘 의미하는 노래인지 잘 모르겠더라고요. 브래들리 씨는 그쪽 출신이시니 잘 아시겠지요?”
“전, 전통요 말씀이십니까? 그…렇지요.”
토머스의 눈부신 머리에서 땀 한 방울이 주룩 흘러내렸다. 비록 가짜 고향의 특산물이라든지, 유명한 지명 같은 건 줄줄이 외웠다지만 전통요까진 무리였다. 하지만 괜찮았다. 어차피 아네트도 몰랐으니까.
‘다 꾸며낸 얘기인데.’
아네트는 속마음을 감추며 방긋 웃었다. 그리고 토머스를 의심하지 않는 것처럼 순진하게 눈을 깜박이며 물었다.
“네. 부족한 실력이지만 한번 들어보실래요? 무엇을 그리는 노래인지 꼭 알고 싶어서요.”
“아, 예예. 물론입지요!”
얼굴이 밝아진 토머스가 아는 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데이룬 지방의 전통요에 대해선 아무것도 몰라 당황하던 찰나였다. 행여 이것 때문에 꼬투리가 잡혀서 정체가 탄로 나면 어쩌나 싶었다. 근데 아네트 쪽에서 먼저 불러봐 주겠다니, 그야말로 고마울 따름이었다. 까짓것 노래의 의미는 일단 듣고 나서 아무렇게나 둘러대면 그만 아니겠는가?
“그럼, 부끄럽지만 조금 불러볼게요.”
아네트는 이런 토머스의 속내를 모른 체하며 목을 가다듬었다. 그러자 아첨하는 미소를 띤 토머스가 고개를 숙이며 그녀의 노래에 집중할 자세를 취했다. 이를 확인한 아네트가 입을 열어 아무 노래나 부르기 시작했다.
아침 햇살은 금빛
오후 햇살은 흰빛
저녁 햇살은 붉은빛
그리고 달이 뜨면 모두 다 사라지지
정말로 아무 노래였다. 하지만 효과만큼은 확실했다. 몸을 앞으로 기울이고 있던 토머스가 그대로 테이블 위에 엎어져 잠들었다. 그에게서 요란하게 코 고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이를 확인한 아네트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간이 별로 없어. 그 안에 토머스가 배신자라는 증거를 찾아야 해.’
회귀자로서 아네트가 얻은 ‘특수 능력’은 사람을 재우는 것이었다. 다행히 능력이 즉효성인지라 대부분이 30초 안에 곯아떨어졌다. 다만 흠이 있다면, 능력의 지속 시간을 짐작하기 어렵단 점이었다.
만약 상대가 라펠처럼 잠이 부족한 사람일수록 지속 시간은 오래 갔다. 하지만 정신이 말똥한 사람을 억지로 잠재웠을 경우, 효과는 채 5분도 가지 않았다. 그러니 지금 같은 상황에선 최대한 빨리빨리 움직여야 했다.
아네트는 응접실을 한 바퀴 빙 돌아보면서 눈에 띄는 것들을 다 건드려 보았다. 그러나 테이블 근처 선반에도, 책꽂이에도 별다른 것은 없었다. 라일린의 보고서에 의하면 토머스는 딱히 이 근방에 집을 얻지 않았다. 그 대신 토머스는 이 커다란 광산 사업소 건물 안에서 숙식까지 함께 해결했다.
‘그렇다면 남는 건 저기뿐이야.’
아네트는 맨 처음 토머스의 응접실로 들어왔을 때 눈여겨본 뒤쪽 문으로 다가갔다. 아마 이 문 안쪽이 토머스의 ‘개인적인’ 생활 공간일 터였다. 하지만 문은 단단히 잠겨있었다. 아네트는 황급히 토머스에게 되돌아가 그의 품 안을 조심스럽게 뒤져 보았다.
‘열쇠, 열쇠…… 찾았다!!’
토머스의 오른쪽 조끼 안주머니에서 열쇠 비슷한 뭔가가 만져졌다. 하지만 토머스가 하필 테이블에 엎드린 자세로 잠들어 있어서, 안주머니의 열쇠를 꺼낼 수가 없었다. 아네트는 낑낑거리며 토머스의 어깨를 잡고서 그의 몸을 들어 올렸다. 다행히 안간힘을 쓴 끝에 그의 조끼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낼 순 있었으나, 문제가 생겼다.
“으으음…….”
인상을 찡그린 토머스가 깨어날 기미를 보였다. 어느새 요란하게 코를 골던 소리도 사라진 후였다. 당황한 아네트가 얼른 노래를 불러서 토머스를 도로 재웠다. 한번 능력을 쓴 사람에게 또 능력이 들을지 의심스러웠으나, 다행히 토머스는 다시 잠들어 주었다. 그의 코에서 잠시 멈췄던 드르렁거림이 흘러나오자, 아네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큰일 날 뻔했어.’
새삼스레 이 일의 위험성이 체감되어 손이 떨려왔다. 항상 온실 속 화초로, 착한 아이로 살아왔던 아네트에겐 더없이 긴장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머뭇거릴 시간이 없었다. 토머스의 체온이 남아 뜨끈한 열쇠를 움켜쥔 아네트는 서둘러 응접실 뒤쪽 문을 땄다. 그 안에는 약간 퀴퀴한 냄새가 나는 침실이 자리하고 있었다.
‘제발, 뭐라도 증거를 찾을 수 있길……!’
아네트는 속으로 간절히 빌며 토머스의 침실 안쪽으로 들어섰다. 자신을 믿고 일을 맡겨 준 라펠에게 뭔가 성과를 가져다주고 싶었다. 그리고 이 기회에 라펠을 향해 뻗친 아버지의 마수를 차단할 수 있길 바랐다.
다행히 그녀의 기도는 머지않아 그 보답을 받을 수 있었다.
* * *
“제 무례를 용서해 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부인.”
실컷 잠들었다 일어난 토머스가 겸연쩍게 얼굴을 붉혔다. 그러자 머리까지 덩달아 새빨개져서, 토머스는 꼭 커다란 삶은 문어처럼 보였다. 아네트는 예의 바르게 그의 대머리에서 시선을 떼며 상냥하게 웃었다.
“어머, 피곤하면 그러실 수 있죠. 저는 브래들리 씨가 그만큼 광산 사업을 위해서 열심히 일해주셨던 거라고 믿어요.”
“그렇게 관대하게 봐 주시니 그저 감읍할 따름입니다. 저, 부인께서 주신 요청에 대해선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러니 제게 조금만 시간을 주십시오.”
토머스는 아직도 아네트가 남편의 광산을 탐내는 요부라고 믿는 눈치였다. 그가 목소리를 낮춰 속삭이자, 아네트가 은근한 눈짓을 보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말은 저렇게 해 놓고 자신의 부친에게 연락해서 이 일을 어찌 처리할지 물어볼 작정이겠지.
하지만 별 상관은 없었다. 지금 아네트의 풍성한 드레스 자락 안쪽에는 토머스의 횡령 자료가 숨겨져 있었으니까. 이걸 들고 라펠에게 돌아가는 대로 토머스는 끝이었다. 그러니 알라만드에게 답신을 받을 기회도 없겠지. 아네트는 아직도 뛰는 가슴을 억누르며 우아하게 웃었다.
“그럼 안녕히 가세요, 브래들리 씨. 만나 뵈어서 정말 반가웠답니다.”
“저도 영광이었습니다, 부인. 그럼 가시는 길 조심하시길.”
토머스는 아네트가 왜 자신에게 ‘안녕히 계세요.’ 대신에 ‘안녕히 가세요.’라고 인사하는지 깨닫지 못했다. 그는 그저 말이 헛나왔겠거니, 하고 별 대수롭지 않게 이를 넘겼다. 그리고 그것이 토머스 브래들리(가명)가 마지막으로 본 아네트의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