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금빛 광택이 도는 드레스는 꼭 가을의 햇살에 비친 잠자리의 날개처럼 가벼운 질감으로 반짝였다. 옷감만으로 보면 호화롭다 못해 과한 느낌이 들 지경이었다. 하지만 드레스의 보디스와 소매를 장식한 리본이 검붉은 벨벳이라 경박한 느낌을 묵직하게 잡아 주었다. 포인트 원단과 같은 재질로 된 검붉은 벨벳 장갑은 팔꿈치까지 올라와서 어쩐지 요염한 느낌이었다.
라펠은 오늘의 아네트가 꼭 가을의 무르익은 크랜베리처럼 보인다고 생각했다. 그 새콤하고 농익은 맛을 상상한 그의 입안에 군침이 돌았다. 이쯤 되니 광산 문제 따윈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대로 최고급 선물 포장지처럼 반짝이는 아네트의 드레스를 끌어 내리고 싶었다. 아무래도 자신은 정말 미쳐가는 모양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네트는 잔뜩 긴장한 얼굴로 마차 밖을 내다보았다. 목적지가 점차 가까워지고 있었다. 초조하게 양손을 모아 쥔 아네트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입을 열었다.
“당신의 광산 관리인을 만나게 해 줘서 고마워요, 라펠. 당신이 날 믿고 일을 맡겨줘서…… 정말로 고맙게 생각해요. 이건 진심이에요.”
“천만에.”
라펠은 죄책감에 가슴이 뜨끔했다. 사실 아네트를 더 빨리 믿어주지 못한 게 미안할 따름이었다. 근데도 아네트는 자신에게 원망 한마디 없이 외려 고맙다며 인사를 했다.
이에 마음이 불편해진 라펠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마음 같아선 아네트에게 좀 더 잘 해주고 싶은데, 살아생전 여자에게 잘 해줘 본 적이 없어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 와중에도 마차는 계속 굴러가서 드디어 라펠의 광산 사업소 앞에 멈췄다.
“아, 생각보다 빨리 도착했네요.”
아네트는 두근거리는 자신의 가슴 위를 손바닥으로 꾹 내리눌렀다. 지금껏 바이에른 가의 온실 속 화초로 살아온 아네트에게 이보다 큰일은 없었다. 자신이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남을 속여넘기게 될 줄이야. 그 누가 알았겠는가?
‘가슴이 떨려.’
아네트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 무섭지 않다면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자신을 믿고 앞으로 나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라펠의 손을 잡고 마차 밖으로 내린 아네트가 그에게 작별인사를 건넸다. 여기까지 바래다준 라펠이 고마워서, 아네트의 목소리는 꼭 꿀처럼 달콤했다.
“그럼 다녀올게요, 라펠. 행운을 빌어 줘요.”
라펠은 고개를 끄덕였다. 혹여나 들킬 우려가 있었기에, 라펠은 집에 가 기다리기로 했다. 하지만 그는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눈빛으로 아네트를 바라보았다. 라펠의 새파란 눈동자가 조금 어두워지고, 남자다운 입매가 꿈틀거렸다. 한참을 뜸 들이던 라펠의 입에서 결국 나온 말은 멋없는 인사였다.
“잘 다녀와.”
“네.”
아네트가 화사하게 눈꼬리를 접으며 웃었다. 그녀는 그대로 몸을 돌려 라펠의 광산 사업소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하지만 라펠이 잡은 손을 놓아주질 않았다. 자신의 손을 통째로 감싸 쥔 그의 커다란 손아귀에서 알 수 없는 미련이 느껴졌다.
“라펠……?”
아네트는 고개를 갸웃하며 그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라펠은 눈을 깜박이며 그녀를 바라볼 따름이었다. 자신이 아네트의 손을 꽉 쥐고 있단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한 얼굴이었다. 아네트의 시선이 맞잡은 손으로 내려가자, 그제야 라펠이 화들짝 놀라며 손을 놓아주었다.
“잘, 잘 다녀오라고.”
퉁명스럽게 내뱉으며 고개를 휙 돌리는 라펠의 태도는 꼭 아네트를 싫어하는 것 같았다. 차갑게 생긴 이목구비와 고집스러운 눈썹 때문에 더더욱 그러했다. 하지만 아네트는 이미 전생의 라펠을 겪어본 바 있었다. 정말로 싫었다면 라펠은 자신의 손을 잡아 주지도, 잘 다녀오란 인사를 건네지도 않았을 것이다.
‘무엇보다 날 믿고 일을 맡겨주지도 않았겠지.’
아네트는 그 점이 가장 기뻤다. 철광석 광산은 현재 라펠의 가장 큰 알짜배기 자산이었다. 그리고 그걸 노리는 건 무려 아네트의 부친, 알라만드였다. 이런 상황에서 라펠이 자신에게 이 일을 맡기기까지 얼마나 큰 고민이 있었을진 안 봐도 뻔했다. 하물며 그 개인주의 심한 라펠이, 타인을 믿지 않는 라펠이 날 믿고서……!
아네트는 생각할수록 어쩐지 눈물이 날 것 같아서 지금 할 일에 집중하기로 했다. 그녀는 부러 뒤를 돌아보지 않고 사업소 안쪽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지금은 눈앞의 거사에만 집중하고 싶었다. 그래서 아네트는 뒤에 남겨진 라펠이 어떤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지 미처 깨닫지 못했다.
“아이구, 부인! 약속대로 방문 주셨군요. 이런 곳까지 발걸음 해 주시다니, 참으로 영광입니다! 덕분에 이 어두침침한 광산이 다 환해지는 느낌이로군요!! 저는 토머스 브래들리라고 합니다. 이렇듯 만나 뵈어 참으로 기쁩니다!”
입구까지 뛰어나온 중년의 남자가 노골적으로 아첨하는 태도로 허리를 굽혔다. 아네트는 생긋이 웃으면서 토머스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머리는 숱이 없어서 눈부시게 반짝이는데, 턱수염만큼은 청년처럼 수북하고 새카만 게 인상적이었다. 아무래도 모근이 죄 아래쪽에 몰린 모양이었다. 차라리 위아래가 뒤바뀌었으면 훨씬 좋았을 텐데, 참으로 기구했다.
아네트는 그의 얼굴을 알고 있었다. 물론 라일린의 보고서에서 본 것도 있었지만, 아네트는 그 전부터 토머스를 알고 있었다. 저토록 모근이 슬프게 쏠린 남자를 기억 못 할 리 없었다.
‘맞아, 아버지의 하수인 중 하나야. 예전에 저택을 드나드는 걸 본 기억이 있어.’
그나마 부친인 알라만드가 딸을 얕잡아 본 게 천만다행이었다. 그는 아네트에게 자신의 ‘사업’에 대해 공공연히 알려주진 않았지만, 이를 굳이 숨기지도 않았다. 애초에 그럴 필요성을 못 느꼈던 것이다. 알라만드는 순종적인 아네트를 자신의 소유물처럼 생각했으니까. 덕분에 아네트는 그의 생각보다 많은 걸 파악하고 있었다.
‘토머스 브래들리라고? 아마 본명이 아니겠지.’
아네트는 눈을 깜박이며 토머스를 바라보았다. 그가 알라만드의 딸인 자신을 알아볼지 궁금했다. 하지만 토머스 또한 여간내기가 아닌지라, 비굴하게 웃는 얼굴에선 아무것도 읽을 수 없었다. 그래서 아네트는 화사하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만나 뵙게 되어 기뻐요, 브래들리 씨. 일을 참 잘 해주셨다면서요? 오늘 이렇듯 광산의 사업 방향에 대해 유익한 대화를 나눌 수 있어 기쁘네요. 실제로 뵈니 정말로 남자답고 근사하세요!”
아네트의 태도는 고용인을 대한다기엔 지나치게 친근했다. 그녀는 꼭 십 년 만에 재회한 첫사랑을 보듯이 토머스를 보고 있었다. 이에 토머스는 조금 당황하는가 싶더니, 곧 평정심을 되찾고 넉살 좋게 대꾸했다.
“아무렴요! 제게 광산을 맡겨주신 후작님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잘 해내야지요. 제 노고를 다 알아주시다니, 정말 영광입니다.”
역시 토머스도 그리 쉬운 남자는 아니었다. 그는 라펠이 광산을 하사받은 직후, 그것을 관리하기 위해 고용한 사람이었다. 지금 라펠의 철광석 광산은 온통 토머스의 손에 의해 좌지우지된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라펠은 스스로의 힘으로 귀족의 작위를 따낼 만큼 저돌적인 남자였지만, 문제는 그 후였다. 귀족이 된다는 건 생각보다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특히나 새 가문을 일으킨 신흥 귀족이라면 더더욱.
라펠은 초대 가주로서 많은 걸 결정해야 했다. 저택은 어디에 지을지, 얼마나 큰 규모로 지을지, 고용인들은 얼마나 뽑을지, 영지는 또 어떻게 관리할지, 세율은 어떻게 적용할지 등등. 그 와중에 전공으로 수여 받은 광산들도 관리해야 했다. 말 그대로 혼자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애초에 검만 휘두른 라펠이 광산의 일일 채굴량이라든지 납품처, 사업 수익성 따위를 관리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그래서 라펠은 자신이 받은 다이아몬드 광산과, 철광석 광산의 관리인을 각각 뽑아 맡기기로 했다. 문제는 거기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때부터 아버지는 이미 사람을 심어뒀던 거야.’
토머스의 앞에서 아무것도 모르는 척 웃는 아네트의 입가에 힘이 들어갔다. 그 당시엔 철광석 따위보다 다이아몬드가 훨씬 귀했다. 그래서 라펠은 다이아몬드 광산에 집중했다. 덕분에 철광석 광산 관리인은 ‘적당히’ 뽑았고 말이다. 그렇게 뽑힌 토머스가 바로 알라만드의 하수인이었다.
“자아, 어서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오늘의 특별한 대화를 위해 아주 좋은 차를 준비해 놓았답니다. 곁들여 먹기 좋은 스콘도 종류별로 구비해 놓았습니다! 부디 즐거운 티타임이 되었으면 좋겠군요.”
“어머, 친절하시기도 해라! 그럼 감사히 초대에 응하도록 하죠. 갈까요?”
아네트는 햇살을 받아 찬란하게 빛나는 토머스의 대머리를 바라보며 생글생글 웃었다. 반사광 때문에 눈부셔서 그런지 눈꼬리가 더 자연스럽게 접혔다. 아무것도 모르는 토머스는 호의적인 아네트의 표정을 보며 안심하는 기색이었다.
아네트는 그의 뒤를 따라 토머스의 개인 응접실로 들어섰다. 사무실과 공용으로 쓰이는 응접실은 꽤 넓고 정갈했다. 덕분에 토머스가 한층 더 청렴한 사람처럼 보였다. 하지만 아네트는 주의 깊게 방안을 둘러보다 응접실 뒤쪽으로 보이는 문 하나를 발견했다. 그녀의 눈동자가 반짝 빛났다.
‘뭔가를 숨긴다면 저기겠군.’
시치미를 뗀 아네트는 시종일관 다정한 태도로 토머스와 잡담을 나눴다. 도중에 토머스가 ‘설마 나에게 관심 있나?’ 하는 표정을 지을 만큼 은근하고도 노골적인 호의였다. 서로 어느 정도 한담을 주고받고 나자, 토머스가 드디어 은근슬쩍 운을 뗐다.
“그나저나 마님, 혹 광산 사업에 대해 궁금하신 거라도 있으신지요? 이런 질문이 실례라면 사죄드리겠습니다. 하지만 마님처럼 귀하신 분들은 대개 이런 광산에는 별 관심 없으신지라…….”
드디어 아네트가 기다렸던 질문이 나왔다. 중요한 건 이제부터였다. 어깨를 으쓱한 아네트가 소파에 기대앉으며 평소답지 않게 오만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눈꼬리가 요요하게 휘면서 토머스를 향해 은근한 눈빛을 보냈다.
“아아. 하지만 전 관심이 아주 많거든요. 특히 그이의 광산이라면 더더욱.”
목소리를 낮춘 아네트가 탐욕스럽게 속삭였다. 마치 남편의 광산을 탐내 마지않는 요부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