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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화





















“귀빈께서 자리하여 아주 화사한 오후로군요, 나의 고객님.”



아네트의 손등 위에 입을 맞춘 라일린이 눈웃음을 쳤다. 그는 다행스럽게도 오늘은 정상적인 신사의 복색을 하고 있었다.



훤칠한 키와 늘씬한 몸에 딱 맞는 검은 스트라이프 정장은 그를 더욱 세련되고 아름다워 보이게 했다. 특히나 크림슨 레드의 베스트와 화려한 공작새 깃털이 꽂힌 블랙 실크햇이 참으로 독특했다. 하지만 아네트는 저번에 본 라일린의 충격적인 모습을 아직 기억하고 있었다.



“라일린 씨. 저번에 우리 저택에서 가져갔던 그 메이드 복은 반납했나요?”



아네트가 우아하면서도 깐깐하게 따져 물었다. 그러자 라일린의 요염한 얼굴에 ‘이크!’ 하는 표정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변덕스러운 고양이 같은 측면이 있는 그는 흥미를 잃은 것엔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물론 메이드 복도 이 대상에 포함되었다. 이를 본 아네트가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괜찮다면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셨으면 좋겠군요. 각 메이드에게 지급되는 수량이 정해져 있어서요.”



지금쯤 카네시스 후작가에서 일하는 어떤 가엾은 메이드는 마음을 바짝바짝 졸이고 있을 게 틀림없었다. 메이드 복은 한 명당 두 벌씩 지급되니까, 자신의 것이 왜 사라졌는지 영문도 모르고 당황하겠지. 아네트의 말을 들은 라일린이 우아한 태도로 허리를 숙이며 그녀의 손등에 재차 입을 맞췄다.



“뭐든 고객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그거참 고맙군요.”



아네트가 상냥하지만 단호한 미소를 머금고 라일린에게 잡힌 손을 빼냈다. 오늘은 그와 한가롭게 메이드 복 얘기나 하러 온 건 아니었다. 품 안에서 신전에 관련된 책을 한 권 꺼낸 아네트가 어딘가의 페이지를 펼쳤다.



“제가 조사해 본 바에 따르면, 신전에는 ‘신의 종’이란 제도가 있더군요. 고아나 가난한 이들을 거두어서 신전을 관리하는 하수인으로 쓴다지요. 그들은 신관과 달리 일개 종에 불과해서, 신원파악도 허술하고 기록도 거의 없대요. 물론 오데사 르이 신전처럼 큰 곳이라면 조금 더 관리가 까다롭겠지만, 그래도 어쩌면 제가…….”



“아하. 고객님께선 여종으로 분해서 신전에 잠입하려는 거군요. 그리고 그곳에 기도하러 온 레이디 셀레스틴을 만날 생각이시지요? 하수인이라면 눈에 띄지도 않고, 신변 조사도 허술하니까요.”



턱을 괸 라일린이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역시나 그와는 대화가 잘 통했다. 아네트는 고개를 끄덕여 그의 말을 시인했다.



“맞아요. 솔직히 제가 종노릇을 잘 해낼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지금으로선 이게 최선의 방법 같네요. 혹시 다른 의견 있으신가요?”



곱게 자란 아네트는 여종과는 거리가 먼 입장이었다. 물론 최선은 다하겠지만, 솔직히 말해서 그다지 자신은 없었다. 하지만 신전에 잠입하려면 마땅히 다른 방법이 없었다. 책을 샅샅이 뒤져보아도, 그나마 신의 종 같은 하수인들이 가장 무난하게 잠입할 수 있는 경로였다. 그들은 언제든 있다가도 없는 떠돌이 신세나 다름없었으니까 말이다.



물론 잠입한다 해도 셀레스틴에게 접근하는 것 또한 문제였다. 일개 종 따위가 감히 왕세자비가 될 셀레스틴에게 접근 가능할 리 없었다. 하지만 그 부분에 대해선 아네트에게도 다 생각이 있었다.



“…일단 신전 안으로 잠입하는 것만 도와주세요. 그 뒤엔 제가 알아서 할 수 있으니까.”



아네트가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미래의 왕세자비가 드나들 만큼 큰 신전에 몰래 숨어드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라일린이 운영하는 세크리트 길드라면 분명 어떻게든 잠입할 경로를 찾아 줄 터였다.



라일린은 그녀의 요청에 곧바로 대답하는 대신, 아무 말도 없이 아네트를 빤히 바라보았다. 자신이 이 일에 관여해서 얻을 수 있는 이득과, 혹 아네트가 실패할 경우 겪게 될 위험부담에 대해 계산해 보는 눈이었다. 라일린의 침묵이 길어지자, 아네트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여종으로 분한다는 제 의견이 혹 별로인가요? 아니면 역시… 라일린 씨라도 신전에 잠입하는 건 무리인가요?”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제게 불가능한 일이란 없습니다.”



무리냐는 아네트의 질문이 그의 자존심을 건드린 모양이었다. 라일린이 독을 품은 꽃처럼 화사하게 웃었다. 이건 비밀이었지만, 그는 세상에 남아 있는 몇 안 되는 마법사 중 하나였다. 다만 정보 길드라는 위장에 가려져서 그 누구도 라일린의 정체를 눈치채지 못할 뿐.



애초에 라일린의 손아귀 안에 들어오지 않는 정보란 없었다. 그는 델티움의 수면 밑에 가라앉아 있는 가장 큰 빙하, 세크리트 길드의 마스터였으니까. 하지만 아네트는 그런 라일린조차도 눈치채지 못한 비밀을 하나 간직하고 있었다. 바로 그녀가 회귀자라는 것이었다. 아네트의 비밀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라일린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좋습니다. 신전에 몰래 잠입하는 것까진 도와드릴 수 있을 것 같군요. 하지만 그 뒤는 말씀하셨듯이, 고객님의 역량입니다. 저희는 뒷일을 책임져 드릴 수 없어요.”



다행히 라일린의 결정은 긍정적이었다. 아네트는 기쁨을 애써 억누르며 생긋이 웃는 얼굴로 감사를 건넸다.



“정말 고마워요, 라일린 씨. 역시 라일린 씨가 못 하시는 일은 없군요. 참 유능하세요.”



“물론이지요. 다만 한 가지 지적하고 싶은 점이 있다면…….”



라일린이 고양이처럼 묘한 눈빛으로 아네트를 향해 손을 뻗었다. 남자라곤 믿기 힘들 만큼 섬세하고 흰 손이 아네트의 갸름한 얼굴선을 따라 미끄러지듯 이리저리 움직였다. 그의 손이 당장이라도 맨살에 닿을 것처럼 그 주위를 맴돌자, 괜히 솜털이 다 곤두서고 호흡이 빨라졌다.



“라일린 씨?”



아네트는 저도 모르게 몸을 조금 물리며 그의 손끝에서 멀어지려고 했다. 그러나 그 순간, 라일린이 그녀의 턱을 살며시 움켜쥐었다. 얼굴에 와 닿는 낯선 손가락은 차가웠고, 그 끝에선 어쩐지 몽환적인 향기가 풍겼다. 놀라서 커진 아네트의 눈동자를 본 순간, 라일린이 화사하게 눈웃음을 쳤다. 그리고 아네트의 얼굴에서 손을 떼며 별일 아니란 듯 여상한 어조로 말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여종으로 분한다는 계획은 너무 무모합니다. 그러기엔 고객님께선 너무 눈에 띄는 얼굴이니까요. 설령 거적을 걸치고 있다 한들, 타고난 품위는 가리기 힘든 법이지요. 그런 얼굴로 고아나 거렁뱅이들이 섞인 여종 따위로 분하겠다니. 대번에 들킬 겁니다.”



“아, 그런 건가요…….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아네트는 다시 원래대로 돌아온 대화의 분위기에 안도했다. 아무래도 자신의 얼굴을 자세히 살피려고 손을 댄 모양이었다. 라일린의 외모는 지나치게 화려하고 아름다워서 사람의 눈을 어지럽히는 경향이 있었다. 그래서 별 뜻 없는데도 괜히 지금처럼 사람을 긴장하게 했다. 태연한 척하는 아네트의 귀 끝이 약간 상기된 걸 발견한 라일린이 작게 웃었다.



“뭐, 그건 제가 어떻게든 해 보겠습니다. 신전에 잠입하기 적당한 날을 조사해서 연락드리지요. 마침 곧 오데사 르이 신전에서 가을을 맞이해 추수 제례를 한다더군요. 제가 알기로 제례에선 신관들이 의식용 가면을 쓴다지요. 그 점을 노리는 건 어떻겠습니까?”



“가면이라, 그거 잘됐네요! 생각도 못 해본 방법이에요. 평소 같았다면 얼굴을 드러내니 들켰을 테지만… 제례 기간에는 괜찮겠지요. 여기에 신전을 찾는 사람도 많을 테니, 몰래 잠입하기도 한결 더 수월하겠죠.”



아네트의 얼굴이 환해졌다. 아무래도 여종으로 분하는 것보단, 가면을 쓴 신관 중 하나로 위장하는 게 훨씬 나았다. 나쁜 짓을 하는데 얼굴까지 가릴 수 있다니. 심리적으로도 훨씬 부담이 덜해지는 느낌이었다. 한결 밝아진 아네트의 얼굴을 감상하던 라일린이 느릿하게 말했다.



“제 의견이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이군요. 혹시 또 의논하고 싶으신 문제가 더 있으신지요?”



라일린은 내심 아네트가 남편을 버리고서 밀출국하겠다고 말하길 기대했다. 일단 그녀가 델티움을 떠나기만 하면, 그 뒤로는 자신이 은근슬쩍 그녀의 새 삶에 스며들 작정이었다. 때마침 라일린의 유도 질문을 받은 아네트가 생각에 잠겼다. 그녀의 단정한 얼굴에서 유독 발그레한 입술이 매혹적으로 움직였다.



“안 그래도 알아보고 싶은 게 하나 있어요.”



“그게 뭔가요, 고객님?”



기대감에 찬 라일린이 그녀를 향해 고개를 기울였다. 아네트의 단정하게 틀어 올린 금발이, 희고 둥근 이마가, 우아한 콧날이 보기 좋았다. 그러나 아네트에게서 흘러나온 질문은 전혀 뜻밖의 것이었다. 이지적인 눈빛을 한 아네트가 똑 부러지는 어조로 물었다.



“타인의 광산 소유권을 빼앗을 수 있는 방법이 어떤 게 있는지 알아볼 수 있을까요? 가능하다면 하나도 남김없이 다.”



“광산 소유권…… 말씀이십니까?”



“네. 합법적인 방법도, 불법적인 방법도 전부 알아봐 주세요.”



아네트는 생각에 잠긴 나머지 라일린의 힘 빠진 어조를 눈치채지 못했다. 그녀라고 결혼 전 한가롭게 신부 수업만 했던 건 아니었다. 알라만드는 그녀를 왕세자비로 만들고자 했고, 딸에게 과분할 만큼의 고등 교육을 시켰다. 덕분에 아네트는 부친이 예상하는 것보다 더 많은 걸 알고 있었다. 특히나 그가 어떤 방식으로 원하는 걸 손에 넣는지에 대해서도 말이다.



하지만 아네트는 광산의 소유권에 대한 법은 잘 몰랐기 때문에, 라일린의 도움이 좀 필요했다. 확실히 라일린과 연줄을 트는 건 제법 어려운 일이었지만, 한번 튼 이후로는 대단히 만족스러웠다. 세크리트 길드는 돈만 받으면 철저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델티움 최고의 ‘심부름’ 업체였다. 그리고 아네트는 그들에게 마음껏 의뢰할 수 있을 만큼 넉넉한 돈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 이 거래에서 상호 간에 좋은 시너지가 나올 수밖에.



“고객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기운 빠진 한숨을 내쉰 라일린이 웃으며 그녀의 의뢰를 수락했다. 눈앞의 귀부인은 벌레 하나도 못 죽일 듯이 순진하고 우아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행보는 하나하나가 정말로 기상천외하고 흥미진진했다.



‘부디 남편의 광산을 빼앗을 작정이라면 좋겠는데.’



뭐, 그럴 일은 없을 것 같긴 했다. 아네트의 신변을 대략적으로 꿰고 있는 라일린은 속으로 혀를 찼다. 그녀는 자신을 찾아오기 전까지만 해도 남편과 사이가 꽤 나빴다. 하지만 요즘은 관계가 호전되고 있는 모양이었다. 최근 무도회에서 아네트가 남편과 동행했다는 목격담이 두 건이나 들어왔으니까. 실로 아쉽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럼 잘 부탁드려요, 라일린 씨. 매번 정말 고마워요.”



자리에서 일어나 이쪽을 향해 웃는 아네트의 얼굴이 꼭 햇살처럼 환히 빛났다. 진심 어린 감사의 인사가 꿀처럼 달콤하게 귓가에 감겨왔다. 그녀의 솔직한 눈동자에는 라일린을 향한 그 어떤 탐욕도, 잔꾀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라일린은 그녀가 마음에 들었다.



어쩔 수 없다는 듯 피식 웃은 라일린이 그녀의 손등 위에 작별의 키스를 했다. 욕심을 숨긴 붉은 입술이 새하얀 손등 위에 담백하게 내려앉았다.



“부디 다음에 또 뵙길 기대하지요. 나의 특별한 고객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