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아네트가 다시 눈을 떴을 땐 늦은 오후였다. 근육질의 남자 팔뚝이 그녀의 몸을 끌어안고 있어서 꽤 묵직했다. 자신이 오후까지 잤다는 걸 깨달은 아네트가 멍한 눈을 깜박였다. 그러자 눈앞에 밤의 장막처럼 짙은 흑발이 드리워지는가 싶더니, 뜨거운 입술이 눈가에 와 닿았다.
“일어났군. 배는 안 고픈가?”
정사의 여운이 나른하게 남아있는 남자의 목소리는 탁해서 더욱 섹시하게 느껴졌다. 평소보다 다정하게 말을 건 라펠이 또다시 관자놀이에 입술을 내리눌렀다. 그 감촉에 비로소 잠이 완전히 깬 아네트가 부스스하게 상반신을 일으켰다. 그녀의 머릿속에 오전에 있었던 일들이 떠올랐다.
‘아, 맞아. 어젯밤에 같이 잠들었다가 아침에…….’
아네트는 무도회 직후, 마차를 타고 돌아오는 길에 자신이 잠들었단 것까진 기억했다. 하지만 그 후에 라펠이 그녀를 안아 침실로 옮겨주고, 그 틈을 타 은근슬쩍 곁에 드러누워 잤다는 사실은 몰랐다. 덕분에 아침부터 체온을 찾아 비비적거리다 뜨거운 꼴을 당했다. 고개를 숙인 아네트가 뺨을 붉히자, 옆에 드러누워 있던 라펠이 몸을 일으켜 그녀의 안색을 살폈다.
“왜 그러지? 몸이 안 좋은가?”
라펠은 자신이 너무 거칠게 안았나 싶어 아네트의 안색을 이리저리 살폈다. 아네트는 그런 라펠의 손길을 거부하지 않고 가만히 그를 올려다보았다. 제 욕심을 양껏 채운 남자는 자신의 여자에게 제법 관대했다.
아네트는 또다시 자신에게 잘해주는 라펠의 변덕이 그리 달갑지 않았다. 차라리 몸뿐인 관계가 나을 것 같았다. 그래야 자신도 미련 없이 새로운 인생을 찾아 떠날 수 있지 않겠는가. 아네트는 자신의 머리칼을 쓸어올리는 라펠의 손길에 눈을 감았다.
그를 떠나 새로운 행복을 찾게 되더라도, 분명 이 손이 그리운 날들이 있을 테지. 그의 체온을 떠올리며 쓸쓸한 기분에 잠기는 밤들이 있을 테지. 아네트는 애써 이 기분을 떨쳐내기 위해 라펠에게 물었다.
“나, 당신에게 궁금한 게 있어요. 물어봐도 되나요?”
역시나, 아네트의 이마를 매만지던 그의 손길이 우뚝 멈췄다. 차라리 라펠이 자신을 또 밀어내 준다면 고마울 것 같았다. 아네트는 곧 돌아설 그의 모습을 예상하며 눈을 깜박였다. 하지만 라펠은 눈썹을 찌푸리면서도 불퉁하게 대꾸했다.
“…물어보는 건 본인 자유겠지.”
다만 대답하는 건 자기 맘이란 뜻이었다. 어쨌든 질문 자체는 해도 된다는 얘기인가? 아네트는 자신의 얼굴을 쓸어내리는 그의 커다란 손바닥에 뺨을 기댄 채 입을 열었다.
“요즘 철광석의 수요가 굉장히 급증했다더군요. 그래서 당신의 철광석 광산도 가치가 폭등했고요. 당신이 보기엔 어때요? 그곳에서 이익이 잘 창출되고 있나요?”
“왜? 당신도 내 광산에 관심 있나?”
라펠이 대답 대신 한쪽 눈썹을 치켜 올리며 물었다. 아네트는 그가 혹 자신이 광산을 탐내서 묻는다고 오해할까 봐 걱정스러웠다. 자연히 부연 설명을 덧붙이는 아네트의 어조가 조금 빨라졌다.
“아뇨, 라펠. 그런 게 아니라요. 산업적으로 굉장히 큰 변화라잖아요? 그래서 난, 궁금한 점들이 몇 가지 있어서…….”
“농담인데 당황하긴.”
한쪽 입꼬리를 삐뚜름하게 든 라펠이 그녀의 금발을 쥐고서 손가락으로 비비 꼬았다. 확실히 예전 같았으면 자신도 아네트가 광산을 탐내는 줄 알고 비꼬아 받아들였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아네트가 저번에 자신의 부친과 싸우는 현장을 목격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가 뭘 원하는지 알고 있어요. 하지만 그게 뭐든지 간에, 라펠에게서 아무것도 빼앗을 생각 하지 마세요. 그는 절대로 아버지에게 그걸 주지 않을 테니까.’
그때의 아네트는 창백한 얼굴로 부들부들 떨면서도 자신의 부친에게 맞서 싸웠다. 그 모습을 보고도 아네트를 의심하는 건 지나치게 너무한 처사였다. 라펠은 자신이 이미 그녀를 꽤 신뢰하고 있단 사실을 인정하기로 했다. 그는 순순히 아네트가 궁금해하는 것에 대해 알려주었다.
“맞아. 이익이 어마어마하게 늘었어. 뒤늦게 내 철광석 광산 자체를 매입하고 싶다는 사람도 줄을 이었지. 델티움에서 가장 실 채굴량이 많은 광산이니까.”
“그렇군요. 음… 있잖아요, 라펠. 혹시 당신의 광산이 금전적인 이익 외에도 뭔가…… 정치나 외교에서 영향력을 발휘할만한 요소가 있나요?”
라펠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대신 그는 팔을 뻗어 아네트를 등 뒤에서 끌어안고 그녀의 목덜미를 부드럽게 핥았다. 그 새하얀 목덜미에는 라펠이 정사 때 깨문 흔적이 발긋하게 남아있었다. 가느다란 목에 남은 자국이 안쓰럽긴 했지만, 한편으론 자신의 흔적을 남겼다는 것이 어두운 가학심을 불러일으켰다. 이를 짐짓 다정한 체 핥아준 라펠이 입을 열었다.
“맞아, 이걸로 몇몇 나라들에게 외교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어. 평민들에게도 철기가 보급되면서 산업 효율이 증가한 건 좋은 일이지만, 모든 나라가 다 철광석이 채굴 가능한 건 아니거든. 실제로 나도 상당량의 철광석을 해외로 팔아넘기고 있고.”
“아아. 그렇다면 만약 당신의 광신을 매입한다면…… 특정 국가들과의 외교 및 무역에 입김을 좀 불어 넣을 수 있겠군요.”
라펠의 말을 이해한 아네트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역시나 아버지인 알라만드는 단순히 금전적인 이득 때문에 철광석 광산을 노리는 게 아니었다. 애초에 바이에른 공작가는 델티움에서 가장 부유한 가문 중 하나였으니까. 알라만드가 탐내는 건 철광석 광산 그 자체가 아니라, 이를 통해 타국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었다.
라펠은 생각에 잠긴 아네트의 몸을 좀 더 바짝 끌어당겨 안았다. 가녀린 아네트는 그의 품 안에 쏙 들어오는 편이었다. 라펠은 위에서 내려다보이는 그녀의 동그란 머리통도, 긴 금발 사이로 살짝 보이는 귓가도, 가녀린 목덜미도 전부 예쁘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왜 자신의 광산에 대해 물어봤는지 대충은 짐작이 갔다.
‘사실 이 광산이 이렇게까지 돈이 될 줄은 몰랐는데.’
라펠은 운이 정말로 좋았다. 그의 친부인 셀그라티스 왕은 전공에 대한 보상으로 라펠에게 다이아몬드 광산과 철광석 광산을 내렸다. 당시엔 철기가 너무 제련하기 힘들어서 비쌌고, 그만큼 비효율적이라 쓰임새도 한정적이었다. 따라서 라펠이 받은 철광석 광산은 별다른 관심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몇 년 뒤 시대의 흐름이 이렇게 변할 줄 그 누가 알았겠는가?
‘아마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모르고서 내게 하사한 거겠지.’
라펠은 냉소적으로 생각했다. 그의 친부인 셀그라티스 왕은 겉보기엔 라펠을 아주 아끼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가 쥐여주는 것들은 대개 겉만 번드르르하고, 알맹이는 없었다. 라펠은 이게 자신의 기분 탓인지, 아니면 실제로 왕이 의도한 바인지 궁금했다.
“라펠.”
이때, 라펠의 품에 인형처럼 가만히 안겨 있던 아네트가 고개를 돌려 그를 불렀다. 뭔가 생각을 마친 듯 진지하기 그지없는 표정이었다. 그 상태로 손을 뻗어 라펠의 손을 움켜쥔 아네트가 한숨을 섞어 말했다.
“나, 알고 있어요. 제 아버지가…… 당신의 광산을 탐내고 있다는 걸요. 그리고 당신에게 부당한 압력을 가하고 있다는 것도요.”
말을 마친 아네트가 면목 없다는 듯 고개를 푹 떨구었다. 라펠은 그녀의 작은 손가락들이 괴로운 듯 시트를 꼭 움켜쥐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 애처로운 모양새를 보자, 라펠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관대한 말이 흘러나왔다.
“괜찮아. 그래 봐야 내 외삼촌이란 작자보단 못하더군. 장인어른께서도 분발을 좀 하셔야겠어. 푸른 피의 바이에른이 둘째가라니, 원.”
예상치 못한 라펠의 자조적인 농담에 아네트가 배시시 웃었다. 그녀는 처음으로 라펠이 자신과 비슷한 고민을 안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신이 아버지 때문에 고민하는 것처럼, 라펠 또한 외가에 얽힌 문제가 좀 있는 모양이었다. 그래서인지 마주 보는 그의 눈빛에서 공감대가 느껴졌다.
살면서 라펠과 공감대를 형성해 보게 될 줄이야. 전생엔 단 한 번도 없었던 경험이었다. 역시나 이번 생은 자신의 노력에 따라 조금씩 달라지고 있는 걸까? 아네트는 어쩐지 코끝이 찡해졌다. 맞잡은 라펠의 손을 만지작거리던 아네트가 이윽고 결의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라펠, 당신의 광산은 내가 꼭 지켜 줄게요. 아무도 당신걸 빼앗아 갈 순 없어요. 그게 설령 제 아버지라고 해도요.”
그 말을 들은 라펠의 푸른 눈이 조금 커졌다.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네트를 바라보던 라펠이 이윽고 소리 내어 웃었다. 날카롭던 눈매가 초승달처럼 가늘게 휘어지고, 못된 말만 내뱉던 붉은 입술이 환한 미소를 머금었다. 웃음기 남은 푸른 눈으로 아네트를 바라본 라펠이 대답했다.
“고마운 말이로군. 당신 덕에 아주 든든해.”
아네트는 그의 긍정적인 반응에 한결 마음이 따뜻해졌다. 떠날 땐 떠나더라도 그의 광산은 꼭 지켜 주고 갈 작정이었다. 자신을 끌어안은 그의 벗은 맨가슴이, 몸을 두르고 있는 팔이, 뺨과 목덜미에 내리누르는 입술의 체온이 따뜻했다. 저렇게 잘생긴 남편을 떠나야 한다는 게 아쉬웠지만, 그에게도 자신에게도 그편이 더 나았다.
라펠은 자신의 치부를 건드리지 않을 형식적인 관계만을 원했다. 하지만 아네트는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았다. 기껏 얻은 두 번째 생이었으니, 누군가를 사랑하고 아끼며 서로 의미 있는 관계를 갖고 싶었다. 라펠이 이를 거부한다면 아네트도 그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전에 광산 문제부터 해결하고.’
아네트의 작은 분홍색 입술이 앙다물어졌다. 솔직히 알라만드와 대적한다는 건 무섭고 막막했다. 하지만 라펠을 지키고 싶은 마음은 여전했다. 전생에 그가 해 준 병간호에 대한 은혜 갚음이라고 하긴 뭣하지만, 이 정도는 해 주는 게 옳았다. 애초에 자신의 친정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으니 말이다.
다행히 아네트는 착한 딸로 지내는 동안, 뒤에서 보고 들은 바가 좀 있었다. 그 말인즉슨 알라만드가 원하는 걸 손에 넣는 ‘패턴’이란 걸 알고 있단 뜻이었다.
이제 착한 딸로 지내는 걸 그만둘 때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