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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화





















올 때는 따로 왔지만, 갈 때는 함께였다. 마차 안에 다소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이럴 때 보통 부드럽게 말을 건네는 쪽은 아네트였다. 라펠은 그녀의 옆얼굴을 곁눈질했지만, 그녀는 속눈썹을 내리깐 채 생각에 잠겨 있었다. 결국 시간이 가는 게 아까워진 라펠이 먼저 헛기침을 하며 입을 열었다.



“왕세자 전하는 괜찮아 보이더군. 어찌나 멀쩡한지 꾀병이 아닐까 싶을 정도야.”



라펠이 은근슬쩍 루드비히의 꾀병을 일러바쳤다. 바닥에 누워 죽어가는 것처럼 굴던 루드비히는 정작 아네트가 사라지기 무섭게 몸을 벌떡 일으켰다. 보는 라펠이 다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덕분에 왕세자의 발작 소동은 무사히 잘 마무리되었지만, 루드비히가 괘씸하긴 마찬가지였다. 여우 새끼도 아니고 사내자식이 뭐 그리 순식간에 태세를 전환한단 말인가.



라펠은 오늘 일로 한 가지 교훈을 얻었다. 해롤드가 말한 ‘불쌍한 체라도 해라.’라는 건 바로 루드비히의 행동 같은 걸 일컫는 소리였다. 자신이 아네트에게 좀 쩔쩔맸던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덕분에 라펠은 아주 큰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어쨌든 그 왕세자는 걱정 말라고. 보아하니 벽에 똥칠할 때까지 잘 먹고 잘 살게 생겼어.”



라펠이 보기에 그건 사람이 아니라 여우 괴물이었다. 그는 치를 떨지 않으려고 애쓰며 무뚝뚝하게 말했다. 라펠의 억양 강한 말투에 비로소 생각에서 깨어난 아네트가 눈을 깜박였다. 이미 아네트의 머릿속에서 루드비히는 사라지고 없었다. 그 대신 아네트가 떠올리고 있던 건 다른 남자였다.



“아참, 라펠. 당신의 은인이라는 분을 만났어요. 해롤드 에반스 백작님 맞으시지요?”



“그 영감을 만났어? 언제?”



라펠의 미간이 확 찌푸려졌다. 파티에 억지로 불러낸 보복으로 네 아내에게 흑역사를 죄 폭로하겠다던 해롤드의 말이 떠올랐다. 아니나 다를까, 이쪽을 보고 은은하게 웃는 아네트의 얼굴이 심상치 않았다.



“파티에 도착하자마자 운 좋게 바로 만났어요. 당신에 대해 잘 아시는 것 같더라고요.”



“혹시 당신에게 쓸데없는 소리를 했어? 왜, 내가 어릴 때 어땠다든지 하는 얘기들.”



“음. 글쎄요.”



아네트가 애매한 미소를 지으며 말끝을 흐렸다. 차마 라펠에게 해롤드가 그의 흉을 봤다고 말할 순 없었다. 그토록 소중하게 생각하는 은인이 자신을 욕하다니, 아무것도 모르는 라펠이 가엾었다.



“그 늙은이가 하는 소리는 아무것도 믿지 마. 다 과장해서 하는 소리니까.”



몸을 뒤로 기댄 라펠이 불퉁한 얼굴로 툭 내뱉었다. 그 말에 아네트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덕분에 마차 안엔 다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속이 답답해진 라펠이 결국 성미를 이기지 못하고 아네트를 확 잡아끌어 자신의 무릎 위에 앉혔다.



“대체 무슨 생각 해, 아네트?”



아네트의 고개를 잡아 돌린 라펠이 으르렁대듯 물었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놀란 아네트가 그를 내려다보다가 순순히 대꾸했다.



“아무 생각도 안 하고 있었어요.”



“거짓말. 설마 왕세자를 걱정하고 있는 건 아닐 테지. 그놈은 사기꾼이야.”



아까 루드비히가 부렸던 개수작을 떠올린 라펠의 눈이 새파랗게 타올랐다. 그가 쉽게 진정할 것 같지 않자, 아네트가 한숨을 삼키며 그의 가슴에 아예 몸을 기대었다. 그러자 라펠이 흠칫하며 성질을 부리던 걸 멈추었다. 그 틈을 타 아네트가 조용히 말했다.



“루드비히 전하는 그냥 시간이 좀 필요하신 것뿐이에요. 제가 이제 그분의 것이 아니라는 걸 인정할 시간이요. 그것 때문에 괜히 당신까지 말려들게 된 것 같아 미안하게 생각해요.”



말을 마친 아네트가 몸을 약간 뒤척이며 편한 자세를 잡았다. 라펠의 단단한 어깨와 목 사이의 틈새에 머리를 기대자, 알 수 없는 안정감이 느껴졌다. 언젠가 떠나야 할 남자인데 자신은 왜 이런 감정을 느끼는 건지. 라펠이 보지 못하는 곳에서 아네트의 눈동자가 약간 먹먹해졌다.



“괜히라니. 당신은 내 아내야. 그런 이상한 놈들로부터 당신을 지키는 게 내 의무고. 그러니 미안하단 소리 같은 건 하지 마.”



지나치게 예의 바른 아네트의 말투가 불안해진 라펠이 딱 잘라 말했다. 그녀는 꼭 자신에게 선을 긋는 것 같았다. 불안해진 라펠의 두 팔이 아네트의 몸을 뒤에서 옭아매듯 끌어안았다. 그 단단한 팔뚝은 언제까지나 아네트를 놓아줄 것 같지가 않았다. 그래서 아네트는 기분이 더 이상해졌다.



‘날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왜 이렇게 행동하는 걸까?’



아네트는 라펠의 변덕스러운 상냥함에 휘둘리고 싶지 않았다. 이런 따뜻함에 속아 마음을 내주면, 그다음엔 갑자기 ‘네가 알 바 아냐.’ 식으로 나오며 쌀쌀맞게 손을 뿌리치겠지. 아네트는 이런 자신의 예측이 옳다는 확신을 얻고 싶었다. 그래서 자신을 옭아맨 라펠의 팔뚝을 손끝으로 매만지며 조용히 물었다.



“당신 외삼촌에 대한 얘기…… 안 해줄 건가요?”



그 순간, 라펠의 몸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익숙한 패턴이었다. 아네트는 그가 곧 몸을 떼어내며 매몰차게 자신을 뿌리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라펠은 뜻밖에도 앓는 소리를 내더니, 그녀의 어깨에 자신의 이마를 기대왔다. 아네트를 꼭 끌어안은 그의 팔에 조금 더 힘이 들어갔다. 꼭 난감해하기라도 하듯이.



“…다는 말 못 해줘.”



이건 예상 밖의 반응이었다. 아네트의 눈동자가 조금 움직였다. 그녀가 자신의 미래를 망쳤던 마부, 이반에 대해 아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애초에 위조된 신분으로 공작가에 들어온 고용인이기 때문이었다. 바이에른 공작가의 모든 사용인은 그 신변 조사가 철저하게 이루어지는 편인데, 이반이 이를 어찌 통과했는지 의문일 따름이었다.



‘아니, 이젠 이반이 아니라 벤이라고 불러야 하나.’



한숨을 쉰 라펠이 그녀의 목덜미에 대고 이마를 비벼왔다. 그의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온 뜨거운 숨결이 목덜미를 간지럽히는 느낌에 솜털이 다 곤두섰다. 이를 즐기듯이 입술로 목덜미를 지분거리던 라펠이 이윽고 그 무거운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도 그를 잘 몰라. 어릴 때 본 게 전부였으니까. 그는 노름을 좋아했고, 주로 도박장에서 살았지. 그리고 왕실에서 나오는 내 양육비를 가로채서 전부 탕진했어. 그때 내 양육비를 전달하며 동태를 살피던 게 해롤드였는데…… 그는 내가 검술에 재능이 있단 사실을 깨달았지. 그리고 폐하에게 보고해서 나를 친자로 거두게끔 했어.”



처음으로 나오는 라펠의 개인사에 아네트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겸연쩍은 표정을 지은 라펠이 손을 뻗어 그녀의 눈을 덮다시피 가렸다. 아네트가 눈을 깜박이자, 그녀의 긴 속눈썹이 라펠의 손바닥을 간지럽혔다. 그러자 라펠이 핀잔하듯 그녀의 새하얀 뺨을 깨물며 중얼거렸다.



“그런 눈으로 날 보지 마. 하려던 말도 자꾸 까먹으니까.”



그 말에 아네트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녀는 아직 라펠의 개인사가 좀 더 듣고 싶었다. 라펠은 자신의 손바닥 밑으로 보이는 아네트의 갸름한 턱과 꽃잎 같은 입술을 바라보았다. 자신 앞에서 지나치게 무방비한 아네트의 태도는 자꾸만 잠든 짐승을 깨우려는 듯 부채질하고 있었다. 이를 가까스로 억누른 라펠이 말을 계속 이어갔다.



“어쨌든 난 그렇게 왕궁에 거둬졌어. 아마도 그대가 아는 것보다 훨씬 빨리. 다만 내 재능이 어디까지인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에, 친자로 인정받기까진 오래 걸렸지. 그나마 르탄의 옛 반란 세력들이 들고일어난 덕에 내가 활약할 수 있었고, 생각보다 일찍 작위를 수여 받았어. 그리고 당신과 결혼했지.”



잠시 말을 마친 라펠이 고개를 숙여 아네트의 입술 위에 가볍게 키스했다. 그녀에게서 풍겨 오는 달콤한 살 내음이, 부드러운 입술의 감촉이 기가 막히게 좋았다. 아네트를 손에서 놓친 루드비히가 지금 와 눈에 핏발을 세우며 그녀를 되찾으려고 염병을 떠는 것도 이해가 갈 지경이었다.



이렇게 좋은 여자를 떳떳하게 아내로 맞이하지 못하고, 나락으로 떨어트려 결혼하게 되다니. 가련한 아네트의 처지를 떠올린 라펠의 마음이 무거워졌다. 한편으론 그의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이기적인 마음이 새빨간 입을 찢으며 잘됐다고 웃었다. 만약 운명의 잔혹한 장난이 아니었다면, 자신의 순번은 영영 돌아오지 않았을 테니까.



라펠은 애써 자신의 지독한 이기심을 잘 갈무리해 숨겼다. 목소리를 가다듬은 그가 마지막으로 아네트에게 설명했다.



“그리고 벤은… 솔직히 말하자면 몰라. 내가 왕궁에 입궁할 때 그와의 연은 이미 끊어진 거나 마찬가지였으니까. 별로 돈독한 혈연관계도 아니었고. 그래서 벤이 노름빚 때문에 사채업자들을 피해 잠적했거나, 어디 노름판에서 일찌감치 죽어 나자빠진 줄 알았지. 근데 설마 당신의 마부로 들어가서 그런 짓을 꾸몄을 줄이야. 전혀 상상도 못 했어.”



드디어 말을 마친 라펠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모든 걸 다 말한 건 아니었지만, 이쯤 되면 ‘벤’에 대한 건 솔직하게 다 털어놓은 셈이었다. 그로 인해 인생이 뒤바뀐 아네트는 최소한 벤에 대해서 알 권리가 있었다. 분명 속이 뒤집어질 텐데, 이야기를 다 들은 아네트는 미소를 머금고 대꾸했다.



“고마워요. 비록 다 얘기해 준 건 아니겠지만, 당신도 최선을 다한 거겠죠. 난 사실… 당신이 끝까지 얘기 안 해줄 줄 알았거든요.”



아네트의 악의 없는 감사는 그 어느 때보다 라펠의 양심을 아프게 찔렀다. 입술을 앙다문 라펠이 관자놀이를 약간 붉히며 고개를 돌렸다. 그는 한동안 아네트의 긴 금발을 만지작거리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 순간, 라펠의 내면에선 치열한 갈등이 벌어지고 있었다.



‘지금 아네트에게 사과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