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라펠과 루드비히, 두 배다른 형제의 관계는 예전부터 꽤 복잡했다. 사실 복잡할 수밖에 없는 관계이기도 했다.
나이로 따지자면 라펠이 두어 살 더 형이었지만, 그는 일개 사생아에 불과했다. 그리고 루드비히는 고귀한 왕실의 적통이었다. 같은 부친을 두었지만 둘의 입장은 하늘과 땅 차이였다. 한 마디로 루드비히가 빛이라면, 라펠은 그 뒤에 드리워진 그림자나 다름없는 셈이었다.
그래서 라펠은 아네트와 결혼하는 게 싫었었다. 루드비히의 대신이라니. 하물며 혈통 우월주의가 심한 바이에른 가 출신의 여자라는 게 끔찍했다. 라펠과 바이에른은 말 그대로 상극이었다. 그는 이 결혼이 파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거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지금은…….’
인정하긴 싫지만 아네트는 특별했다. 그녀의 눈동자에서 떨어지는 눈물은 꼭 그의 심장 위로 떨어지는 뜨거운 촛농 같았다. 처음엔 자신이 화약을 잘못 떠맡은 줄 알았는데, 지금 보니 보물을 놓친 건 저쪽이었다. 그런 주제에 뒤늦게 어슬렁대며 남의 아내를 기웃대는 꼴이라니. 자연히 루드비히를 보는 라펠의 시선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아네트는 이제 제 아내입니다. 그리고 전하와 마주치는 걸 불편해하죠. 번듯한 약혼녀도 있으신 분께서 자꾸 왜 이러시는지 모르겠군요. 폐하께선 이 사실을 아실런지요?”
라펠의 입에서 부왕의 얘기가 흘러나오자, 루드비히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었다. 벽에 비딱하게 기대선 루드비히의 입에서도 자연히 날카로운 대꾸가 흘러나왔다.
“이 나이에 부왕의 허락을 받고 다녀야 할 줄 미처 몰랐군. 난 그저 약혼녀와 같이 파티에 참석하려다, 그녀가 취소하는 바람에 혼자 왔을 뿐이야.”
“하! 어린애도 안 믿을 변명을 하시는군요. 그럼 제 아내에게 볼일이 있는 건 아니니, 저는 그녀를 데리고 이만 퇴장하지요.”
라펠이 픽 웃으며 등을 돌리려 했다. 그러자 아네트를 아직 만나지 못한 루드비히는 초조해졌다. 겉으론 아닌 척했지만, 아네트와 마주치기 위해 이곳에 온 건 사실이었다. 근데 그녀를 데리고 가 버리겠다니. 아네트가 꼭 자신의 소유인 것처럼 말하는 라펠의 말에 루드비히의 심사가 뒤틀렸다.
“왜, 이젠 내가 보이기만 해도 아내를 빼앗길까 두려운가? 정작 결혼하기 싫다고 부왕께 징징댔던 건 그대였지. 뱀 같은 바이에른의 여자는 싫다더니, 왜? 이제 보니 뱀 취향이셨나? 이랬다저랬다 하는 꼴이 어처구니가 없어서.”
돌아보는 라펠의 얼굴에 욱하는 기색이 떠올랐다. 그는 애초에 말보단 주먹이 앞서는 타입이었다. 하지만 이번엔 상대가 썩 좋지 못했다. 만약 자신이 소드 마스터를 달성했다면 한 대쯤은 때려볼 여지가 있겠지만, 아직은 그럴 처지가 아니었다. 셀그라티스 왕은 왕세자를 폭행한 라펠을 용서치 않을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라펠은 당장이라도 나갈 것 같은 주먹을 참고자 팔짱을 끼고 이죽거렸다.
“그렇게 소중하면 진작에 잘 좀 하지 그러셨습니까. 저와 달리, 전하께선 아네트가 억울한 누명을 썼단 사실을 일찌감치 알고 계셨잖습니까? 그걸 알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니 아네트가 정이 떨어진 거겠지요. 이제 그녀는 왕세자 전하께 아무 미련도, 감정도 없습니다.”
“그러는 그대는? 아네트가 그대를 사랑한다고 생각하나? 천만에. 그녀는 고상하고 섬세한 여인이야. 한데 자네 같은 무뢰배를 좋아할 리 없지.”
아픈 곳을 찔린 루드비히가 이를 악물고 라펠을 조롱했다. 왕실의 적통인 루드비히가 자신을 멸시하듯 내려다보자, 라펠의 턱에 힘이 들어갔다. 태 하나 잘 타고 태어나서 모든 걸 가진 주제에, 아네트까지 도로 빼앗아가려는 루드비히의 이기심이 역겨웠다. 그래서 라펠은 양심을 완전히 내려놓은 채 뻔뻔하게 루드비히의 속을 긁었다.
“아뇨. 아네트는 절 좋아합니다. 그것도 아주 많이. 전하께서도 느끼셨을 텐데요? 만약 그녀가 절 좋아하지 않았다면, 전하께서 손을 내밀었을 때 진작에 그 품에 안겼을 겁니다. 뭐, 그녀도 보는 눈이 있다면 겉만 번지르르한 약골보다야 저 같은 진짜 사내를 좋아하겠죠.”
몸치인 루드비히를 비웃는 라펠의 입꼬리가 비열하게 올라갔다. 그 순간, 먼저 평정을 잃은 쪽은 루드비히였다. 자신의 부끄러운 약점을 찔린 데다, 아네트에게 거절당한 트라우마까지 동시에 공격당한 루드비히는 이성을 잃었다. 그는 이를 갈며 곧바로 라펠의 멱살을 붙들었다.
“그 입 닥쳐!! 네깟 놈이 뭘 안다고 지껄이는 것이냐? 넌 아무것도 몰라!! 그녀에 대해서도, 우리의 관계에 대해서도!!!”
라펠은 무덤덤한 눈으로 자신의 멱살을 틀어쥔 루드비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의 짙푸른 눈동자에서, 분노로 얼룩진 이목구비에서 자신과 닮은 부분들이 설핏 보였다. 그래서인지 기분이 더 더러웠다.
“저런. 제가 비록 아는 건 없어도 이거 하나는 잘 압니다만.”
천천히 손을 올린 라펠이 자신의 멱살을 틀어쥔 루드비히의 손 위를 뭉개듯이 움켜쥐었다. 그 믿기지 않는 악력에 루드비히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한평생 검을 악착같이 휘둘러 온 라펠과, 류트를 연주하고 펜을 들던 루드비히의 악력은 애초에 비교할 바가 못 되었다. 루드비히는 결국 손마디가 부서질 듯한 고통에 라펠의 멱살을 쥔 손을 놓아야 했다.
그 순간, 라펠이 역으로 루드비히의 어깨 부근을 틀어쥐고 그를 벽으로 밀쳤다. 이제 라펠의 팔꿈치와 팔뚝이 루드비히의 목 부근을 강하게 압박하고 있었다. 벽과 라펠의 몸 사이에 끼어서 질식당하는 기분이 들었다. 루드비히는 그 무도한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을 쳤지만, 라펠은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그 상태로 고개를 숙여 루드비히에게 얼굴을 바짝 들이민 라펠이 으르렁대듯 내뱉었다.
“자신보다 힘이 강한 상대에게 덤비는 건 멍청한 짓이죠. 특히 단둘이 있을 땐 더더욱.”
“크흑… 흡……!!”
루드비히가 핏발 선 눈으로 노려보며 라펠의 옷깃을 움켜쥐었다. 하도 필사적으로 잡아당기다 보니, 라펠의 옷깃이 부욱 소리를 내며 찢어졌다. 바로 그때, 커튼 틈새를 비집고 들어온 아네트가 그들의 몰골을 발견했다.
“라펠…… 어머나!!”
아네트의 동공이 흔들렸다. 얼핏 보기에 라펠과 루드비히는 다투는 게 아니라, 뭔가 뜨거운 성인들의 열정을 나누는 것처럼 보였다. 라펠은 무려 루드비히에게 ‘벽치기’를 시전하고 있었고, 루드비히는 손을 뻗어 그런 라펠의 옷을 찢어버린 몰골이었으니까. 심지어 얼굴을 바짝 들이대고 뜨거운 눈빛이 오가는 그 상황이라니.
‘내, 내가 방해했나?’
아네트의 동공에 지진이 일어났다. 그녀는 하마터면 그대로 뒤로 돌아 나갈 뻔했다. 만약 커튼 너머로 들려오던 그들의 다툼 소리를 듣지 못했다면 정말 그랬을지도 몰랐다. 다행히 아네트의 기척을 먼저 눈치챈 라펠이 손을 풀고 루드비히를 놓아주었다.
“아네트.”
루드비히를 의식한 라펠의 부름이 평소보다 유독 더 다정했다. 자신의 목을 움켜쥐고 켁켁대던 루드비히가 이쪽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 아네트가 들어온 순간, 루드비히의 표정이 갑자기 180도 뒤바뀌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이를 드러내고 발톱을 휘두르던 루드비히가 갑자기 애절한 얼굴로 아네트를 불렀다.
“아네트…….”
울 것처럼 표정을 흐린 루드비히가 비틀거리며 아네트에게 다가가다 풀썩 주저앉았다. 이를 본 아네트가 놀라서 서둘러 루드비히를 부축했다.
“어머나! 전하, 괜찮으세요?”
“발작, 발작이 또 일어날 것 같아…… 괴로워.”
아네트의 팔에 머리를 기댄 루드비히가 고개를 젖히고 숨을 쌕쌕거렸다. 자신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갑자기 불쌍한 체하는 루드비히의 모습에 라펠은 황당해졌다. 그는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의 옷자락을 부욱 뜯어버릴 만큼 팔팔하기 그지없었다.
‘저게 대체 뭐 하는 수작질이지?’
라펠의 눈썹이 불쾌하게 일그러졌다. 누가 봐도 루드비히가 개수작을 부리는 게 틀림없었다. 그러나 아네트는 수작에 홀딱 넘어간 듯 걱정스럽기 짝이 없는 얼굴로 그를 보살폈다.
“숨을 천천히 들이쉬세요, 전하. 불안하다고 숨을 빠르게 쉴수록 상태는 더 악화될 거에요. 걱정하지 말고 고개를 더 젖히세요.”
“고통스러워, 아네트…… 허억, 헉.”
루드비히가 보란 듯 눈가를 촉촉하게 적시며 아네트의 팔에 뺨을 비볐다. 자존심이고 나발이고 죄 던져버린 게 틀림없었다. 이 꼴을 눈앞에서 본 라펠은 말 그대로 어처구니가 없었다. 남자는 모름지기 남자다워야 한다고 생각하는 라펠의 눈에, 저런 루드비히의 모습은 문화충격 그 자체였다.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루드비히를 발로 뻥 걷어차며 연기 그만하라고 윽박지르고 싶었다. 그러나 루드비히의 신분이야 그렇다 쳐도, 아네트가 보는 앞에서 그딴 행동을 할 순 없었다. 그럼 아네트의 눈에 자신이 대체 어떻게 보이겠는가?
‘내가 피도 눈물도 없는 야만인인 줄 알 테지.’
라펠은 이를 박박 갈며 속이 뒤집어지는 걸 꾸욱 참았다. 그러나 아네트는 역시 현명했다. 걸치고 있던 숄을 이용해 루드비히의 머리를 잘 받쳐준 아네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라펠을 향해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라펠, 제가 가서 사람을 불러올게요. 그때까지 전하를 좀 지켜봐 줘요.”
사실 루드비히를 생각한다면 자신이 남아 그를 보살피고, 라펠이 가서 사람을 불러오는 게 나았다. 하지만 아네트는 ‘밀회’에 주로 사용되는 발코니에서 루드비히와 단둘이 남아 기다리고 싶지 않았다. 그랬다간 사람들의 구설수에 오르기 딱 좋았다. 차라리 라펠과 루드비히를 단둘이 남겨놓는 편이 훨씬 현명한 선택이었다.
“물론이지. 나만 믿어, 아네트. 아주 잘 보살펴 드릴 테니까.”
라펠의 입가에 아주 환한 미소가 걸렸다. 그의 웃음을 본 아네트는 어쩐지 쥐와 고양이를 단둘이 남겨놓고 가는 느낌이라 찝찝해졌다. 하지만 우물쭈물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정말로 루드비히가 발작을 일으킨 거라면, 서둘러 그를 구해야 했다. 아네트는 황급히 커튼을 걷고 나가서 사람들을 불렀다.
“여기, 왕세자 전하께서 쓰러지셨어요! 누가 좀 도와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