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이 정도로 차려입었으면 괜찮겠지?’
아네트는 조심스럽게 자신의 드레스를 둘러보았다. 채도 높은 파란색 원단에 다이아몬드 가루를 뿌린 드레스는 꼭 밤하늘의 별처럼 반짝였다. 여기에 하나로 땋아 올린 금발에는 블루 벨벳 로즈의 헤어 코사지를 장식해 포인트를 주었다. 전체적인 색조는 차분하되 디테일이 은근히 화려해서, 라펠의 ‘은인’이란 분을 뵙기엔 적합한 차림 같았다.
마지막 점검을 끝낸 아네트는 미소를 띤 얼굴로 무도회에 입장했다. 파티의 주최자인 루시니 백작 내외와 형식적인 인사를 나눈 후,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라펠은 보이지 않았다. 이에 아네트는 의아한 표정이 되었다.
‘분명 먼저 가 있으라고 했는데?’
라펠의 부탁 때문에 참석하긴 했으나, 그와 단둘이 마차 안에 있는 건 부담스러웠다. 아네트는 정에 약한 편이었고, 전생에 5년간 부부 생활을 했었던 라펠에겐 더더욱 약한 편이었다. 그가 마지막에 병간호만 잘 해주지 않았어도 진즉에 떠났을 텐데. 아네트는 혹시나 라펠이 또 다정하게 굴면 그에게 넘어갈까 봐 두려웠다.
그래서 아네트는 부러 따로따로 참석하자고 권유했다. 다행히 라펠은 부부동반 무도회에 참석한 경험이 없어서, 그녀의 요청을 흔쾌히 수락했다. 그는 곁길로 새는 타입은 아니었으니 분명 무도회에 먼저 도착했을 터였다. 하지만 라펠이 도무지 보이질 않았다. 그처럼 눈에 띄는 외모의 남자는 찾기가 쉬워야 정상이었다.
“아네트 바이에른 양?”
이때, 누군가가 아네트에게 말을 걸어왔다. 아네트는 눈을 깜박이며 낯선 신사를 바라보았다. 한 손엔 마호가니 케인을 들고, 짙푸른 정장을 빼입은 남자는 연배가 제법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 손질된 짧은 수염과 탄탄한 체형이 세련된 느낌이었다.
“이런, 내가 누군지 잘 모를 테죠. 난 주로 해외에 많이 체류하는 편이니까요. 해롤드 에반스 백작이라고 합니다. 이렇듯 훌륭한 숙녀분과 통성명을 하게 되어 기쁘군요.”
정중하게 자기소개를 해 오는 신사는 나이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예의 발랐다. 아네트는 그것만으로도 해롤드에게 상당히 호감을 느꼈다. 그녀는 흔쾌히 해롤드가 내민 손을 맞잡으며 부드럽게 웃었다.
“아, 에반스 백작님이시군요. 말씀은 많이 들었습니다. 아네트 바이에른 카네시스에요.”
해롤드 에반스는 예전에, 그러니까 아네트의 이전 세대에서 가장 신비로운 인물로 꼽혔었다. 아무도 그가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는지, 해외에서 무슨 사업을 하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그러나 가뭄에 콩 나듯 들려오는 해롤드의 소문은 온통 굉장한 것뿐이었다. 반역 세력을 색출해 냈다든지, 해외에서 숨어들어와 도피 중인 중죄인을 잡았다든지 등등.
해롤드는 비록 지금은 은퇴해서 자신의 영지에 틀어박혀 있었지만, 그의 신비로움이 퇴색된 건 아니었다. 그래서 아네트는 눈을 반짝이며 옛 전설이었던 인물을 올려다보았다. 그 순간, 해롤드의 입가에 웃음이 걸렸다.
“생각보다 사랑스러운 분이군요. 제가 이십 년만 더 젊었어도 라펠, 그놈에겐 뺏기지 않는 건데. 이거 참 아쉽습니다 그려.”
“제 남편을 아시나요?”
“알다 뿐이겠습니까. 이건 비밀인데 말입니다…….”
주위를 둘러본 해롤드가 목소리를 낮추며 아네트에게 손짓했다. 신비로운 인물의 신비로운 행동에 아네트는 저도 모르게 덩달아 귀를 기울였다. 그러자 심각한 표정을 지은 해롤드가 그녀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아무에게도 말한 적 없는 비밀입니다만. 제가 그놈이 오줌 싼 이불도 갈아 본 사람입니다.”
“네? 라펠이 이불에 실, 실례를 했었다고요?”
“그땐 꽤 귀여웠죠. 차마 오줌쌌단 말도 못하고 엉엉 울면서 바짓자락을 붙드는데, 입꼬리가 자꾸 올라가는 걸 참느라 아주 애썼습니다. 그 어린 것이 저렇게 시커멓고 재미없는 놈으로 커버릴 줄이야. 그 누가 알았겠습니까?”
해롤드가 능청스럽게 혀를 내두르는 시늉을 했다. 너무나 충격적인 흑역사 폭로에 아네트는 처음엔 경악 어린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내 그녀의 입가에도 미소가 걸렸다. 아네트의 기억 속에서 라펠은 늘 크고 난폭한, 그리고 성질 더러운 ‘성인 남자’였다. 그런 라펠이 이불에 오줌을 쌀 만큼 어렸을 때가 있었다니.
해롤드의 말을 듣던 아네트는 웃으면서도 한 가지 느낀 점이 있었다. 주위를 둘러본 그녀가 목소리를 낮춰 해롤드에게 물었다.
“에반스 백작님께서 라펠의 그 ‘은인’ 되시는 분이로군요. 그렇지요?”
해롤드는 대답 대신 입술 위에 손가락을 세우며 웃었다. 이에 유쾌함을 느낀 아네트는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본의 아니게 라펠의 은인을 먼저 만나버렸지만, 어차피 해롤드를 만나기 위해 참석한 파티였다. 성실한 아네트로선 오늘의 과업을 일찌감치 달성한 느낌이라 심적으로 여유로워졌다. 그런 아네트의 표정을 티 안 나게 분석하던 해롤드가 갑자기 화제를 전환했다.
“그놈이 참 못됐죠?”
“네?”
“솔직하지 못한 놈이 자존심까지 세니 원. 고슴도치가 따로 없죠. 자기가 상처받지 않으려고 남을 먼저 상처 주는 겝니다. 쯧쯧, 못난 놈.”
아네트는 뭐라 대꾸해야 할지 난감해서 그저 미소만 지었다. 라펠의 은인이라는 해롤드가 갑자기 그의 흉을 보기 시작했다. 근데 그게 다 맞는 말이라서 뭐라고 반박할 수가 없었다. 아네트의 흔들리는 동공을 흘끗 본 해롤드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그놈이 정 속썩이면 그냥 확 이혼해 버리십쇼. 아직 젊고 예쁜데, 굳이 그 성질 더러운 녀석과 살 필요가 무어 있습니까. 제가 부인이었다면 뒤도 안 돌아보고 그놈을 팽개치고 갈 겁니다. 한번 버림을 받아 봐야 정신을 차리지, 쯧.”
아네트는 미처 몰랐지만, 말을 일부러 극단적으로 해서 사람의 반응을 떠보는 건 해롤드의 주특기였다. 해롤드는 라펠을 욕하면서 아네트의 표정 변화를 초 단위로 놓치지 않고 관찰했다. 그녀의 그린 듯이 섬세한 눈썹이 조금 움찔하는가 싶더니, 아니나 다를까. 아네트의 입에서 라펠을 변호하는 말이 흘러나왔다.
“그렇게까지 못된 사람은 아니에요. 그냥…… 조금 고집이 셀 뿐이죠.”
왜 남들 입에서 라펠의 욕이 나오면 기분이 이렇게 나쁜지 모를 노릇이었다. 아네트는 자신에게 ‘소개해 주고 싶은 은인이야.’라고 말하던 라펠의 진지한 얼굴을 떠올렸다. 그는 어찌나 해롤드를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자존심을 굽히고 아네트에게 ‘부탁’이란 말까지 꺼냈었다. 근데 정작 만난 해롤드는 라펠을 잔뜩 욕해대니, 아네트는 마음이 무척 언짢아졌다.
그렇다고 이 자리에서 해롤드와 싸우는 것도 좋은 선택은 아니었다. 어쨌든 라펠은 그를 은인으로 생각했으니까, 그를 소개받는 자리에서 싸운다면 마음 상할 터였다. 아네트는 차라리 이 불편한 대화를 빨리 마무리 짓고, 해롤드와 떨어져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녀는 우아한 미소를 머금은 채 단호한 어조로 물었다.
“혹시 제 남편이 어디 있는지 아시나요? 그에게 인사부터 하고 싶은데요.”
“흠.”
해롤드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빙그레 웃었다. 아네트는 자신의 감정이나 성깔에 끌려다니지 않고, 불필요한 갈등을 피할 줄 알았다. 나이에 맞지 않게 현명한 태도였다. 적어도 해롤드가 보기엔 그랬다. 자신의 까끌한 턱을 천천히 쓰다듬던 해롤드가 이윽고 어딘가를 가리켰다. 커튼이 두텁게 쳐져 있는 발코니였다.
“고맙습니다.”
마지막까지 예의 바르게 대꾸한 아네트가 그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녀가 막 발걸음을 옮기려는 찰나, 뒤에서 해롤드의 충고가 날아왔다.
“내가 부인이라면 지금 저곳에 들어가진 않을 겁니다.”
이건 또 무슨 소리지? 아네트는 그를 돌아보았지만, 해롤드는 뜻 모를 얼굴로 빙글빙글 웃을 따름이었다. 그에게 물어본다 한들 답을 줄 것 같진 않았다. 아네트는 할 수 없이 폭탄이 도사리고 있을 발코니 쪽으로 향했다.
보통 이런 무도회에서 발코니에 따로 나와 커튼을 친 건 ‘방해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 안에선 대개 불륜 커플이나, 비밀스러운 연인들의 밀회가 이루어졌다. 그것도 아주 화끈한 방식으로.
물론 라펠이 그럴 것 같진 않았지만, 혹시 모를 일이었다. 그는 지나치게 잘나고 매력적인 남자였다. 얼굴만으로도 자체발광하는 남자가 키도 크고 몸도 좋으니, 여자라면 누구나 눈길을 줄 만했다. 아네트는 마음의 각오를 다지고서 해롤드가 가리킨 발코니 쪽으로 다가갔다. 커튼 너머로 새어 나오는 대화 소리를 들어보니, 라펠이 그 안에 있는 건 확실했다.
하지만 그는 아네트의 예상과 상당히 다른 방식으로 ‘화끈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과거야 어쨌든 그녀는 이제 제 부인입니다. 그러니 부디 제 아내에게서 손 떼시죠. 전하께서 발정난 개처럼 주위를 어슬렁거릴 때마다 제 충심이 자꾸 뒤집어지려고 해서 말입니다.”
안에서 들려오는 라펠의 목소리는 꼭 제련된 강철처럼 차갑고 딱딱했다. 그 거침없는 폭언을 들은 아네트의 입이 저절로 벌어졌다. 라펠이 ‘전하’라고 부를만한 사람, 그리고 내 아내에게서 손 떼라는 말을 할 만한 대상. 이 두 가지 조건을 충족시킬만한 인물은 델티움에 한 명뿐이었다.
‘설마…… 루드비히 전하와 같이 있는 거야?’
충격을 받은 아네트의 낯빛이 창백하게 질렸다.